의창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3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갱생(更生) 1585∼1646 파명:의창군(義昌君)
  갱생(更生) [1585(선조 18)∼1646(인조 24)]
승정원 도승지를 역임했다.
승정원 도승지를 역임했다.
덕춘(德春) 1645∼1707 파명:의창군(義昌君)
  덕춘(德春) [1645(인조 23)∼1707(숙종 33)]
행 가선대부 호조참판을 지냈다.
행 가선대부 호조참판을 지냈다.
명하(鳴夏) 1614∼1689 파명:의창군(義昌君)
  명하(鳴夏) [1614(광해군 6)∼1689(숙종 15)]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이조참판을 지냈다.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이조참판을 지냈다.
사영(思永) 1634~1710 파명:의창군(義昌君)
  사영(思永) [1634(인조 12)∼1710(숙종 36)]
자는 근보(謹甫), 호는 사수(仕修). 수(綏)의 증손이며 명하(鳴夏)의 아들이다.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의 수제자로 1675년(숙종 1) 증광별시 을과에 들어 도승지 · 7도관찰사 · 지의금부사 · 예조참판에 올랐고 숙종대왕이 제문을 하사하였다.
자는 근보(謹甫), 호는 사수(仕修). 수(綏)의 증손이며 명하(鳴夏)의 아들이다.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의 수제자로 1675년(숙종 1) 증광별시 을과에 들어 도승지 · 7도관찰사 · 지의금부사 · 예조참판에 올랐고 숙종대왕이 제문을 하사하였다.
수(綏) 1548∼1601 파명:의창군(義昌君)
  수(綏) [1548(명종 3)∼1601(선조 34)]
자는 수지(綏之), 호는 남계(南溪). 1600년(선조 33) 별시 을과에 급제하고 군수, 제학(提學)을 지냈다. 사영(思永)의 증조이다.
자는 수지(綏之), 호는 남계(南溪). 1600년(선조 33) 별시 을과에 급제하고 군수, 제학(提學)을 지냈다. 사영(思永)의 증조이다.
시걸(時傑) 1576∼1604 파명:의창군(義昌君)
  시걸(時傑) [1576(선조 9)∼1604(선조 37)]
예조참판를 지냈다.
예조참판를 지냈다.
우상(雨相) 1893~1964 파명:의창군(義昌君)
  우상(雨相) [1893(고종 30)∼1964]
충남 공주 유구 출신. 1919년 고종태황제 인산에 참여하여 학생들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수받아 즉시 귀향, 22인의 동지를 규합하여 당년 3월 14일 호서지방에서는 제일 선봉으로 유구만세를 선도하여 옥고를 치렀다.
1950년 6 · 25전쟁 당시 공산치하에 구금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생환하였다. 종사에 헌신하여 1939년 기묘년 파보와 1962년 임인년 파보 발간에 총무로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위답 마련에도 진력하였다. 자유당 당시 야당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충남 공주 유구 출신. 1919년 고종태황제 인산에 참여하여 학생들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수받아 즉시 귀향, 22인의 동지를 규합하여 당년 3월 14일 호서지방에서는 제일 선봉으로 유구만세를 선도하여 옥고를 치렀다.
1950년 6 · 25전쟁 당시 공산치하에 구금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생환하였다. 종사에 헌신하여 1939년 기묘년 파보와 1962년 임인년 파보 발간에 총무로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위답 마련에도 진력하였다. 자유당 당시 야당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재두(載斗) 1854∼1904 파명:의창군(義昌君)
  재두(載斗) [1854(철종 5)∼1904(광무 8)]
통정대부 승 가선대부를 지냈다.
통정대부 승 가선대부를 지냈다.
정필(正弼) 1763∼1788 파명:의창군(義昌君)
  정필(正弼) [1763(영조 39)∼1788(정조 12)]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천기(天紀) 1683∼1722 파명:의창군(義昌君)
  천기(天紀) [1683(숙종 9)∼1722(경종 2)]
진사. 경종대왕이 병약하므로 노론4대신과 뜻을 같이 하여 세제 영조대왕의 대리청정을 주청하여 이를 실천케 했으나 소론의 반대로 그 결정이 철회되니 1722년(경종 2) 4월 13일 39세의 젊은 춘추에 장폐(杖斃)당하였다.
진사. 경종대왕이 병약하므로 노론4대신과 뜻을 같이 하여 세제 영조대왕의 대리청정을 주청하여 이를 실천케 했으나 소론의 반대로 그 결정이 철회되니 1722년(경종 2) 4월 13일 39세의 젊은 춘추에 장폐(杖斃)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