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창군파 약사

의창군(義昌君)


1428년(세종 10)에 세종대왕의 3남(묘비문에는 9남)으로 태어나 1460년(세조 6)에 별세하였다. 휘는 공(?)이며 시호는 강도(剛悼)이다. 1872년(고종 9) 숭록대부 영종정경(領宗正卿)으로 추봉되었다.

1456년(세조 2) 단종대왕 복위에 연루되어 도성을 떠나 지리산으로 피신, 은거하여 암자와 사찰을 전전하면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은둔생활의 고초가 극심하여 1460년(세조 6)에 병을 얻어 급거 귀경, 그해 10월 2일 33세로 별세하였다. 당시 신빈(愼嬪) 모후의 지극한 보살핌으로 큰 화는 면하고 장례도 예장(禮葬)으로 치러 왕자로서의 예우에는 결함이 없었으나 사산군(蛇山君) 독자만 두고 일찍 별세하여 후손이 크게 번창하지 못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을 당하여 공의 5세 담년(聃年)과 6세 적(績) 등 종손 부자가 순절하는 비운을 맞으니 차손으로 종계를 이어가게 되었다.

벼슬길에는 크게 오르지 못하다가 지파 중 공의 7세손 갱생(更生)으로부터 4대에 걸쳐 벼슬을 하였다. 그들은 도승지 갱생 · 이조참판 명하(鳴夏) · 7도관찰사 및 예조참판 사영(思泳) · 진사 천기(天紀) 등이다. 천기의 대에 이르러 경종대왕 위예지시(違豫之時) 노론 4대신과 뜻을 같이하여 세제(世弟) 영조대왕의 대리청정을 주청하여 이를 실천케 했으나 소론의 반대로 그 결정이 철회되고 1722년(경종 2) 4월 13일 39세 때에 장폐(杖斃) 당하므로 문중의 발전이 크게 저해되었다.

그 이후에 연산(連山)으로 낙향한 원생(元生)의 3대손 후기(厚紀)가 진사 행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겸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을 지냈고 원생의 4대손 덕춘(德春)이 행 가선대부 호조참판을 지낸 공적으로 충남 공주시 유구면과 신풍면 일대에 수십정보의 사패지지를 왕가의 후예답게 유지해 사대부의 품위를 지켜왔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원생의 10대손 우상(雨相)이 고종태황제 인산에 참여하여 학생들로부터 독립선언문을 전수받아 호서지방에서는 선봉으로 3월 14일에 유구만세운동을 선도해서 옥고를 치렀다.

의창군의 묘소는 본래 경기도 양주군 금촌면 진안리 진좌에 예장을 갖춰 모셨다. 그러나 조선 말기 고종태황제의 능이 금곡(金谷) 홍릉(洪陵)으로 정해지자 “인근의 제묘는 이봉하라”고 하는 국명이 내려 1900년(광무 4)에 수원군 음덕면 원두동 국사봉(國社峰) 독제기(纛祭基) 해좌에 사패지지를 받아 이봉되었다. 일제의 강점으로 망국의 운명에 처하게 되자 사패지지에 대한 소유권 문제로 구 산주와의 갈등이 심하여 1946년 4월 11일 당시 종손 봉희(鳳熙 : 1907∼1972)의 주선으로 경기도 남양주시 일패동 산25-4에 갑좌경향으로 석의(石儀)없이 환봉되었다. 그 후 1986년 파종회 결성을 계기로 원 · 묘소에 방치되었던 제반 석의(묘비 · 상석 · 장군석 · 예장석)를 운반하여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고 묘역을 확장 · 정화하였다.

배위는 연안김씨 덕원군부인[德源郡夫人 : 1429(세종 11)∼1482(성종 13)]으로, 1872년(고종 9) 양원군부인(梁源郡夫人)으로 개봉되었다. 묘는 합폄이다.

종원 분포 상황

합계

파종회 연락처

대 표 낙천
파 종 회 주 소
연 락 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