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7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원준(元俊) 1572∼1661 파명:수도군(守道君)
  자는 백영(伯英), 호는 모암(慕菴). 수도군의 6대손이다.
사마시에 급제하여 안음(安陰)현감 · 청산(靑山)현감 · 영평(永平)현감 · 종부시(宗簿寺) 주부를 거쳐 팔질우로특전(八?優老特典)으로 품계가 통정대부에 올랐다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배명되고 위로 3대가 추증의 은전을 받았다.
성격이 온화하여 평생에 남을 흘겨보거나 참혹한 짓을 하지 않고 집에서는 기거(起居)에 엄한 법도가 있어서 항상 처자를 대함에 이를 드러내고 웃거나 성내는 일이 없었다. 집에서는 그와 같이 엄하면서도 남의 물건을 받을 때면 거저 받는 일 없이 다른 물건과 바꾸어 주기를 즐겼다. 사람들과 사귀되 성실신의하고 간곡측은히 하였다. 친구가 빈궁하면 거두어 구휼하고 부조를 하였으며 또한 마음과 정성을 다하였다.한때 외종형제들이 어렵게 되자 토지를 주어 경작케 하였는데 외종들이 임의로 처분함을 보고 아들들이 분개하여 되돌려 받고자 하니 공은 이를 만류하며 “그들이 곤궁하여 한 짓이니 그대로 두라.”고 하였다.
젊어서부터 <소학> 읽기를 좋아했고 글씨를 쓰고 시를 짓되 옛사람의 것을 따라서 하였다. 일찍이 당시의 명유(名儒)들과 교유하며 아름다운 산수를 찾아 풍류를 즐기며 500여 편의 많은 시와 글을 문집으로 남겼으며 아들을 가르치기 위해 <경시아배서(警示兒輩書)>도 만들었다.
공은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가 위독하자 무명지를 잘라 피를 흘려 넣어드려 회생케 한 일이 있고, 종신토록 봉양하지 못함을 원통히 여겼다. 부모의 기일이 다가오면 한달 전부터 근신하며 고기반찬을 먹지 않고 제삿날이 되면 단정히 앉아서 한 끼니 죽을 먹으며 종일토록 슬퍼하며 말을 하지 않고 제사를 올렸다. 또 공은 평소에 글자를 옷 사이에 꿰매 넣게 하여 죽을 때까지 가지고 다니며 말하되 “내 옛 임금이 손수 쓰신 것을 차마 버릴 수 없음이라.”고 하였다.
공의 이러한 행동을 본 사람들은 절로 공경하였다 한다. 또 문장과 학식이 수도군과 종남정의 구업을 승계할 만하였으나 혼탁한 조정에서 벼슬하지 않고 광해군 시절에 묻혀 지내다가 인조반정 후에야 특별히 지방의 수령으로 제수되었으며 만년에는 여강에서 한가히 지내다가 1661년(현종 2) 정월 14일, 향년 90세로 별세하였다. 묘소는 광주(廣州) 학야동 선영 유좌(酉坐)의 언덕에 부인과 합폄(合킋)하였다. 차남 민후(敏厚 : 양녕대군파로 출계)가 영사원종(寧社原從)의 공훈에 기록되는 은전으로 자헌대부 의정부 좌참판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으로 추증되었다.
공이 임종 직전에 손수 쓴 절필 한 수는 다음과 같다.
요임금 때 하늘의 해는 사해를 비쳐 만백성을 편안케 하였으며,
순임금 적 궁전의 바람은 훈훈하여 성남을 풀어주는 거문고 소리로다.
천년을 매한가지로 성군의 시대 만났으니,
태평세월 함께 즐김이 예와 이제가 똑같구나.
읽어볼수록 그 품은 금도를 생각하게 되는데 사람들은 다 그의 벼슬과 덕행을 칭송하지 못함을 아쉬워 하였다.
공은 또한 <내 아이들을 경계하는 글>(慕菴公 警示兒輩書)을 지어 남겼다.
사람의 사람됨이 학문에 있나니 학문을 능히 하지 않으면 어찌 사람이 되리요. 아비가 자식에게는 교육 뿐이며, 자식이 아비에게는 순종할 따름이니라. 아비가 가르치지 아니하고 자식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금수와도 같아서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느니라. 자식은 순종하고자 하여도 아비가 가르치지 아니하고 아비가 가르치고자 하여도 자식이 잘 순종하지 아니하면 양쪽이 서로 어그러져서 마침내 반목을 이루어, 필경은 불효하고 인자하지 못한 지경으로 돌아가서 죄를 인륜에 얻고 재앙을 하늘에 받게 되나니 가히 두려웁지 아니한가? 가히 삼가하지 아니하랴? 나는 하늘에 죄를 지음이 많아서 일찍이 엄부(嚴父)를 여의고 이어서 자모의 상을 당하였으며 마침내 형제도 멀어지고 붕우에는 신의를 잃었노라. 비록 효도하려 하여도 할 곳이 없었고 형에게 공손하려 하여도 의지할 길이 없었으며 벗에게 신의를 구하였건만 어찌할 수 없었노라.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치면 통한이 골수에 스며들어 마음은 썩고 병은 더하여 필경 무슨 모양이 되었는가 하면 구석을 향하여 찡그리고 사람을 대하면 부끄러워서 감히 평온하고 떳떳하지 못함으로써 근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도리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어느 겨를에 자식을 가르쳐서 불운함을 면하리오. 내가 낳은 자식 보기를 길가는 사람같이 하여, 능히 아비로서 자처하지 못하겠노라. 너희들은 비록 순종하고자 배우지만 무엇을 좇아 얻으리요? 아비가 있으면서 가르치지 아니한 책임은 아비에게 있고, 자식의 허물이 아니니라. 이렇듯 고루함이란 장차 무덤에 가게 된 자들의 소치로다. 진실로 가석하도다. 그러나 사람의 품성이란 각각 다른 데가 있어서 품성이 맑은 자는 교육을 받지 않고도 먼저 깨달으며 품성이 흐린 자는 비록 부지런하게 가르쳐도 효과가 없나니 이것으로 볼진대 사람의 능함이란 사람됨에 있고 오로지 가르치거나 가르치지 않거나에 있지 아니함이 명백하도다. 옛 사람이 자식을 바꾸어 가르치는 자가 있었는데 도리어 의탁하므로 배우지 못하였다 핑계하게 되었다. 과부의 자식으로도 선량한 자가 많았으니 어찌 아비의 가르침을 받아서 그리 되었겠는가? 이는 오직 근면 노력함이 마땅하다고 여겨 스스로 닦아서 죄에 빠지지 않고 예의에 어긋나지 않으며 그러므로 가위 사람이라 할지로다. 말세에 낳아서 혼탁하고 속된 세상을 살면서 몸소 처신을 잘 행하고 힘써 법도를 지켜서 가히 허물을 면케 하라. 오직 원하노니 너희들은 힘을 헤아리고 능함을 본받아서 처지에 입각하여 허물이 없도록 하되 위로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아래로 노복에게도 온화하게 하여 과오와 후회 없이 문호를 보존케 하라. 자식을 가르치는 방도에는 술책이 있나니 입으로 외우듯 잘 되라고만 하는 자도 있고 혹은 예의를 지키고 심성을 닦도록 함을 중요시하는 자도 있는데 나의 소원은 남과 달라서 예의를 준수하고, 심성을 수련하기에 힘쓰기를 굳이 너희들에게 소망할 뿐, 입으로만 잘 되라고 외우는 데에 있지 않노라. 다만 가히 종적을 감추고 뒤침에는 남이 알지 못하게 하고 규각(圭角)이 없게 하여 남의 거스림을 자초하지 말 것이며 남의 높고 낮음을 서로 비교하지 말 것이요, 남의 장단점을 또한 망령되게 평하지 않는다면 초목과 더불어 함께 썩을지라도 나는 한스럽지 않겠으며 나는 뉘우치지도 않겠노라.
내 이미 배우지 못함으로써 외람됨을 알지 못하여 군왕의 은혜를 그르쳐서 상사(上司)를 욕되게 함에 이르렀고 모든 사리를 뒤엎으면서 이미 생애를 넘겼으니 항상 일을 그르쳤음을 두려워 하거니와 위로는 군부를 등지어 두렵기가 마치 얇은 얼음을 밟는 것만 같아 매양 물러나서 편안히 지내기만 생각하였으나 또한 스스로 어쩌지 못하였노라. 벼슬하기란 즐거움이 없나니 근심과 고뇌가 그 가운데 있노라. 애오라지 평소의 포회를 글로 써 보임으로 경계하노니 이런 심정을 양찰하여 어그러짐이 없도록 힘써 부응하기를 바랄 뿐이다.
사마시에 급제하여 안음(安陰)현감 · 청산(靑山)현감 · 영평(永平)현감 · 종부시(宗簿寺) 주부를 거쳐 팔질우로특전(八?優老特典)으로 품계가 통정대부에 올랐다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배명되고 위로 3대가 추증의 은전을 받았다.
성격이 온화하여 평생에 남을 흘겨보거나 참혹한 짓을 하지 않고 집에서는 기거(起居)에 엄한 법도가 있어서 항상 처자를 대함에 이를 드러내고 웃거나 성내는 일이 없었다. 집에서는 그와 같이 엄하면서도 남의 물건을 받을 때면 거저 받는 일 없이 다른 물건과 바꾸어 주기를 즐겼다. 사람들과 사귀되 성실신의하고 간곡측은히 하였다. 친구가 빈궁하면 거두어 구휼하고 부조를 하였으며 또한 마음과 정성을 다하였다.한때 외종형제들이 어렵게 되자 토지를 주어 경작케 하였는데 외종들이 임의로 처분함을 보고 아들들이 분개하여 되돌려 받고자 하니 공은 이를 만류하며 “그들이 곤궁하여 한 짓이니 그대로 두라.”고 하였다.
젊어서부터 <소학> 읽기를 좋아했고 글씨를 쓰고 시를 짓되 옛사람의 것을 따라서 하였다. 일찍이 당시의 명유(名儒)들과 교유하며 아름다운 산수를 찾아 풍류를 즐기며 500여 편의 많은 시와 글을 문집으로 남겼으며 아들을 가르치기 위해 <경시아배서(警示兒輩書)>도 만들었다.
공은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가 위독하자 무명지를 잘라 피를 흘려 넣어드려 회생케 한 일이 있고, 종신토록 봉양하지 못함을 원통히 여겼다. 부모의 기일이 다가오면 한달 전부터 근신하며 고기반찬을 먹지 않고 제삿날이 되면 단정히 앉아서 한 끼니 죽을 먹으며 종일토록 슬퍼하며 말을 하지 않고 제사를 올렸다. 또 공은 평소에 글자를 옷 사이에 꿰매 넣게 하여 죽을 때까지 가지고 다니며 말하되 “내 옛 임금이 손수 쓰신 것을 차마 버릴 수 없음이라.”고 하였다.
공의 이러한 행동을 본 사람들은 절로 공경하였다 한다. 또 문장과 학식이 수도군과 종남정의 구업을 승계할 만하였으나 혼탁한 조정에서 벼슬하지 않고 광해군 시절에 묻혀 지내다가 인조반정 후에야 특별히 지방의 수령으로 제수되었으며 만년에는 여강에서 한가히 지내다가 1661년(현종 2) 정월 14일, 향년 90세로 별세하였다. 묘소는 광주(廣州) 학야동 선영 유좌(酉坐)의 언덕에 부인과 합폄(合킋)하였다. 차남 민후(敏厚 : 양녕대군파로 출계)가 영사원종(寧社原從)의 공훈에 기록되는 은전으로 자헌대부 의정부 좌참판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으로 추증되었다.
공이 임종 직전에 손수 쓴 절필 한 수는 다음과 같다.
요임금 때 하늘의 해는 사해를 비쳐 만백성을 편안케 하였으며,
순임금 적 궁전의 바람은 훈훈하여 성남을 풀어주는 거문고 소리로다.
천년을 매한가지로 성군의 시대 만났으니,
태평세월 함께 즐김이 예와 이제가 똑같구나.
읽어볼수록 그 품은 금도를 생각하게 되는데 사람들은 다 그의 벼슬과 덕행을 칭송하지 못함을 아쉬워 하였다.
공은 또한 <내 아이들을 경계하는 글>(慕菴公 警示兒輩書)을 지어 남겼다.
사람의 사람됨이 학문에 있나니 학문을 능히 하지 않으면 어찌 사람이 되리요. 아비가 자식에게는 교육 뿐이며, 자식이 아비에게는 순종할 따름이니라. 아비가 가르치지 아니하고 자식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금수와도 같아서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느니라. 자식은 순종하고자 하여도 아비가 가르치지 아니하고 아비가 가르치고자 하여도 자식이 잘 순종하지 아니하면 양쪽이 서로 어그러져서 마침내 반목을 이루어, 필경은 불효하고 인자하지 못한 지경으로 돌아가서 죄를 인륜에 얻고 재앙을 하늘에 받게 되나니 가히 두려웁지 아니한가? 가히 삼가하지 아니하랴? 나는 하늘에 죄를 지음이 많아서 일찍이 엄부(嚴父)를 여의고 이어서 자모의 상을 당하였으며 마침내 형제도 멀어지고 붕우에는 신의를 잃었노라. 비록 효도하려 하여도 할 곳이 없었고 형에게 공손하려 하여도 의지할 길이 없었으며 벗에게 신의를 구하였건만 어찌할 수 없었노라.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치면 통한이 골수에 스며들어 마음은 썩고 병은 더하여 필경 무슨 모양이 되었는가 하면 구석을 향하여 찡그리고 사람을 대하면 부끄러워서 감히 평온하고 떳떳하지 못함으로써 근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도리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어느 겨를에 자식을 가르쳐서 불운함을 면하리오. 내가 낳은 자식 보기를 길가는 사람같이 하여, 능히 아비로서 자처하지 못하겠노라. 너희들은 비록 순종하고자 배우지만 무엇을 좇아 얻으리요? 아비가 있으면서 가르치지 아니한 책임은 아비에게 있고, 자식의 허물이 아니니라. 이렇듯 고루함이란 장차 무덤에 가게 된 자들의 소치로다. 진실로 가석하도다. 그러나 사람의 품성이란 각각 다른 데가 있어서 품성이 맑은 자는 교육을 받지 않고도 먼저 깨달으며 품성이 흐린 자는 비록 부지런하게 가르쳐도 효과가 없나니 이것으로 볼진대 사람의 능함이란 사람됨에 있고 오로지 가르치거나 가르치지 않거나에 있지 아니함이 명백하도다. 옛 사람이 자식을 바꾸어 가르치는 자가 있었는데 도리어 의탁하므로 배우지 못하였다 핑계하게 되었다. 과부의 자식으로도 선량한 자가 많았으니 어찌 아비의 가르침을 받아서 그리 되었겠는가? 이는 오직 근면 노력함이 마땅하다고 여겨 스스로 닦아서 죄에 빠지지 않고 예의에 어긋나지 않으며 그러므로 가위 사람이라 할지로다. 말세에 낳아서 혼탁하고 속된 세상을 살면서 몸소 처신을 잘 행하고 힘써 법도를 지켜서 가히 허물을 면케 하라. 오직 원하노니 너희들은 힘을 헤아리고 능함을 본받아서 처지에 입각하여 허물이 없도록 하되 위로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아래로 노복에게도 온화하게 하여 과오와 후회 없이 문호를 보존케 하라. 자식을 가르치는 방도에는 술책이 있나니 입으로 외우듯 잘 되라고만 하는 자도 있고 혹은 예의를 지키고 심성을 닦도록 함을 중요시하는 자도 있는데 나의 소원은 남과 달라서 예의를 준수하고, 심성을 수련하기에 힘쓰기를 굳이 너희들에게 소망할 뿐, 입으로만 잘 되라고 외우는 데에 있지 않노라. 다만 가히 종적을 감추고 뒤침에는 남이 알지 못하게 하고 규각(圭角)이 없게 하여 남의 거스림을 자초하지 말 것이며 남의 높고 낮음을 서로 비교하지 말 것이요, 남의 장단점을 또한 망령되게 평하지 않는다면 초목과 더불어 함께 썩을지라도 나는 한스럽지 않겠으며 나는 뉘우치지도 않겠노라.
내 이미 배우지 못함으로써 외람됨을 알지 못하여 군왕의 은혜를 그르쳐서 상사(上司)를 욕되게 함에 이르렀고 모든 사리를 뒤엎으면서 이미 생애를 넘겼으니 항상 일을 그르쳤음을 두려워 하거니와 위로는 군부를 등지어 두렵기가 마치 얇은 얼음을 밟는 것만 같아 매양 물러나서 편안히 지내기만 생각하였으나 또한 스스로 어쩌지 못하였노라. 벼슬하기란 즐거움이 없나니 근심과 고뇌가 그 가운데 있노라. 애오라지 평소의 포회를 글로 써 보임으로 경계하노니 이런 심정을 양찰하여 어그러짐이 없도록 힘써 부응하기를 바랄 뿐이다.
제열(齊說) 1635∼1712 파명:수도군(守道君)
  자는 몽경(夢卿), 호는 동봉(東峰). 수도군의 8대손으로 모암 원준의 손자이며 서윤 징후의 3남이다.
타고난 자질이 명석하고 민첩하였으며 효도와 우애가 지극하였으며 부모의 기일이 되면 한달간 소찬을 들고 3일 전부터 반드시 죽을 조금씩 먹기를 평생 동안 하였다. 필마로 명산대천을 주유하며 시회석(詩會席)에 이르면 태연자약하게 고담과 시속담을 의기있게 설파하며 나라를 걱정하고 세상을 개탄하였다. 공의 해박한 지식과 경륜은 명재상과 고관들이 존경의 예로 대하였으며 석사 도인들이 머리 숙여 종유하였다.
나라에서 유일의 선비를 기용하는데 천거되어 1686년(숙종 12) 처음 선원전 참봉에 제수되었다. 다음 해 여소전으로 옮겼으며 1689년(숙종 15) 곤위(인현왕후)가 폐출된 후 즉시 벼슬을 버리고 출사하지 않고 강호에 자취를 감추었다가 곤위가 다시 복위되자 서울 집으로 돌아오니 사람들 모두가 그 절의에 탄복하였다. 1696년(숙종 22)에 다시 사옹원 참봉에 제수되었고 1698년(숙종 24) 원외감번에 있을 때 큰 흉년으로 원민들이 굶주리고 있을 때 진청(賑廳)에서 곡식을 꾸어다가 원민을 살렸다. 그해에 돈녕부 봉사에 승진했고 겨울에 단종대왕 복위하는 일로 마침 백관이 정의를 하였을 때 공이 상주하기를 “이미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임금의 자리를 넘겨주었다 해서 물려준 요임금에게 어찌 그 자리가 없겠습니까.” 하니 보고 듣는 백관들이 모두 칭찬하고 가상히 여겼다. 그래서 급기야는 능으로 봉하였다. 총리가 최석정을 시켜 공에게 도감 감조관을 제수케 하였다. 공은 말하기를 “나의 조부께서 보안감으로 계실 때 능을 보수한 보람이 있는데 지금 내가 어찌 그 일에 조금인들 게을리할 수 있겠는가.” 하고 정성을 다하여 맡은 일에 힘썼다. 공이 최상규에게 시 한 수로 화답하기를 “한마음으로 감축하여 내 조부의 뜻을 따르는 터, 조금이라도 결함이 있으면 정녕코 따르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하였으니 이 또한 공의 충성과 효성을 익히 알아볼 수 있다. 공은 승륙(陞六)이 되어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었다. 그때 같은 고을 관리가 죄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게 되자 그의 어린 딸이 아비의 사정을 하소연하면서 슬퍼하는 것을 부중이 다 측은히 여기면서도 감히 한마디 말도 못하거늘 공은 홀로 감개하고 여러 당상관에게 말하여 그 죄를 늦추게 하였다. 그 말이 조리가 있고 분명하게 판별되자 마침내 생의(生議)에 붙이어 사형에서 벗어났다.
공이 평생에 남을 사랑하고 억울한 일을 모면케 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1699년(숙종 25) 신계현령(新溪縣令)을 제수받고 임소에 부임한 지 수개월이 지나자 고을 백성들이 공의 은혜스런 정사에 대하여 “이 고을이 생긴 이래로 공같이 정사를 잘한 이는 없었다.”라고 극찬하며 공의 경질을 보게 된 고을 백성들이 공의 유임을 간곡히 바라는 소원을 묘당(廟堂)에 올렸으나 공은 더 유하지 않고 돌아왔다. 이때 공의 춘추가 65세였다. 1702년(숙종 28) 회덕현감으로 제수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708년(숙종 34)에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사어(司禦)와 청암도찰방으로 봉직하다가 1710년(철종 36) 임기만료로 체직되었다. 그해 겨울에 중뢰례(重牢禮 : 회혼례)를 베풀었는데 연회에 참석한 재상 · 공경들이 모두 시를 지어 하례하였다. 그중 정승 최상(崔相)의 시에
“홀로 낮은 명위(名位)만을 사랑하여 비굴하게 살아온 지가 오래구나(獨憐低名位卑久). 가슴에 쌓인 심정 애오라지 하어에 베푸네(表蘊聯憑賀語陳).”하였는데 대개 유능한 재주를 가지고 있어도 펴지 못함을 애석히 여겨서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 : 1607∼1684, 이조참판)가 또한 일찍이 공에게 말하기를 “가슴에 복받치는 심정으로 굳게 참는 절개와 풍채가 있으니 그 재기를 내서 세상에 쓴다면 오직 우리들의 행복일 뿐만 아니라 실상 국가의 복이 될지어라.”고 하였다.
1712년(숙종 38) 3월 21일 숙환으로 별세하니 향년 78세였다.
묘소는 충남 청양군 장평면 낙지리 내사천에 있다. 2남 상화(相턗 : 가선대부)의 추천으로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로 증직되었다. 공은 많은 서사(書辭), 시율(詩律)과 소장(疏章) 등을 남겼다.
타고난 자질이 명석하고 민첩하였으며 효도와 우애가 지극하였으며 부모의 기일이 되면 한달간 소찬을 들고 3일 전부터 반드시 죽을 조금씩 먹기를 평생 동안 하였다. 필마로 명산대천을 주유하며 시회석(詩會席)에 이르면 태연자약하게 고담과 시속담을 의기있게 설파하며 나라를 걱정하고 세상을 개탄하였다. 공의 해박한 지식과 경륜은 명재상과 고관들이 존경의 예로 대하였으며 석사 도인들이 머리 숙여 종유하였다.
나라에서 유일의 선비를 기용하는데 천거되어 1686년(숙종 12) 처음 선원전 참봉에 제수되었다. 다음 해 여소전으로 옮겼으며 1689년(숙종 15) 곤위(인현왕후)가 폐출된 후 즉시 벼슬을 버리고 출사하지 않고 강호에 자취를 감추었다가 곤위가 다시 복위되자 서울 집으로 돌아오니 사람들 모두가 그 절의에 탄복하였다. 1696년(숙종 22)에 다시 사옹원 참봉에 제수되었고 1698년(숙종 24) 원외감번에 있을 때 큰 흉년으로 원민들이 굶주리고 있을 때 진청(賑廳)에서 곡식을 꾸어다가 원민을 살렸다. 그해에 돈녕부 봉사에 승진했고 겨울에 단종대왕 복위하는 일로 마침 백관이 정의를 하였을 때 공이 상주하기를 “이미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임금의 자리를 넘겨주었다 해서 물려준 요임금에게 어찌 그 자리가 없겠습니까.” 하니 보고 듣는 백관들이 모두 칭찬하고 가상히 여겼다. 그래서 급기야는 능으로 봉하였다. 총리가 최석정을 시켜 공에게 도감 감조관을 제수케 하였다. 공은 말하기를 “나의 조부께서 보안감으로 계실 때 능을 보수한 보람이 있는데 지금 내가 어찌 그 일에 조금인들 게을리할 수 있겠는가.” 하고 정성을 다하여 맡은 일에 힘썼다. 공이 최상규에게 시 한 수로 화답하기를 “한마음으로 감축하여 내 조부의 뜻을 따르는 터, 조금이라도 결함이 있으면 정녕코 따르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하였으니 이 또한 공의 충성과 효성을 익히 알아볼 수 있다. 공은 승륙(陞六)이 되어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었다. 그때 같은 고을 관리가 죄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게 되자 그의 어린 딸이 아비의 사정을 하소연하면서 슬퍼하는 것을 부중이 다 측은히 여기면서도 감히 한마디 말도 못하거늘 공은 홀로 감개하고 여러 당상관에게 말하여 그 죄를 늦추게 하였다. 그 말이 조리가 있고 분명하게 판별되자 마침내 생의(生議)에 붙이어 사형에서 벗어났다.
공이 평생에 남을 사랑하고 억울한 일을 모면케 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1699년(숙종 25) 신계현령(新溪縣令)을 제수받고 임소에 부임한 지 수개월이 지나자 고을 백성들이 공의 은혜스런 정사에 대하여 “이 고을이 생긴 이래로 공같이 정사를 잘한 이는 없었다.”라고 극찬하며 공의 경질을 보게 된 고을 백성들이 공의 유임을 간곡히 바라는 소원을 묘당(廟堂)에 올렸으나 공은 더 유하지 않고 돌아왔다. 이때 공의 춘추가 65세였다. 1702년(숙종 28) 회덕현감으로 제수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708년(숙종 34)에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사어(司禦)와 청암도찰방으로 봉직하다가 1710년(철종 36) 임기만료로 체직되었다. 그해 겨울에 중뢰례(重牢禮 : 회혼례)를 베풀었는데 연회에 참석한 재상 · 공경들이 모두 시를 지어 하례하였다. 그중 정승 최상(崔相)의 시에
“홀로 낮은 명위(名位)만을 사랑하여 비굴하게 살아온 지가 오래구나(獨憐低名位卑久). 가슴에 쌓인 심정 애오라지 하어에 베푸네(表蘊聯憑賀語陳).”하였는데 대개 유능한 재주를 가지고 있어도 펴지 못함을 애석히 여겨서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 : 1607∼1684, 이조참판)가 또한 일찍이 공에게 말하기를 “가슴에 복받치는 심정으로 굳게 참는 절개와 풍채가 있으니 그 재기를 내서 세상에 쓴다면 오직 우리들의 행복일 뿐만 아니라 실상 국가의 복이 될지어라.”고 하였다.
1712년(숙종 38) 3월 21일 숙환으로 별세하니 향년 78세였다.
묘소는 충남 청양군 장평면 낙지리 내사천에 있다. 2남 상화(相턗 : 가선대부)의 추천으로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로 증직되었다. 공은 많은 서사(書辭), 시율(詩律)과 소장(疏章) 등을 남겼다.
종인(宗仁) 1550∼1593 파명:수도군(守道君)
  자는 인언(仁彦), 수도군의 5대손이며 병마절도사 증 병조판서 구침(龜琛)의 아들이다.
1550년(명종 5) 7월 9일 서울에서 출생하여 임진왜란 때 진주성(晋州城)에서 순국(殉國)하였다. 공은 8척 장신이며 궁마(弓馬)에 능하였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1576년(선조 9)에 무과 별시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배수되었다. 그 후 1591년(선조 24) 12월에 김해부사로 부임, 반년 만에 고을이 무사태평해졌으며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진주판관(晋州判官) 김시민(金時敏 : 1544∼1592)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공은 분연히 일어나 “진주는 남방 대진(大陣)으로 꼭 사수하여야 한다.”고 외치며 군사를 이끌고 촉석성중(矗石城中)으로 달려가 흩어진 군졸들을 거두어 모아 성을 수호하며 적을 막아냈다. 그때 성내의 백성은 남녀 아울러 6∼7만명이었다. 그 무렵 진주절도사 최경회(崔慶會 : 1532∼1593),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 1537∼1593), 충청병사 황진(黃進 : ?∼1593), 의병장 고종후(高從厚 : 1554∼1593), 산천현감 장윤(張潤 : 1552∼1593) 등이 장병을 거느리고 입성하였다. 공은 이들을 기쁘게 맞으며 특히 황진(黃進)의 손을 잡고는 “이와 같이 큰 변란을 당한 이때, 같은 성내에서의 만남은 하늘의 도움이다. 어찌 일희일비(一喜一悲)가 없겠는가.”라고 서로 탄식했다 한다. 공과 황진은 동갑이며 무과(武科)를 동반급제하여 전부터 형제나 다름없는 사이였다.
1593년(선조 26) 6월 20일 왜적은 성을 삼중으로 포위했고 공성(攻城)의 포성(砲聲)은 땅을 뒤흔들었으며 왜적의 깃발은 온 들을 뒤덮었다. 공이 황진과 더불어 적병을 격퇴시키던 어느날 때마침 내린 비로 성의 한모퉁이가 무너진 틈을 이용하여 많은 적병이 잠입, 성내로 침공해 오는 것을 발견하고 분전역투하여 적병 천여 명을 베고 무찔러 격퇴시켰다. 황진이 다시 전지(戰地)를 시찰하려 할 때 적의 탄환이 황진의 왼쪽 이마에 명중, 그 자리에서 전사하였다. 공은 남달리 슬퍼하며 포백(布帛)으로 그 시체를 거둬 삼경임에도 시신을 옆에 끼고 나는 듯이 적진을 뚫고 나아가 청천마전(菁川麻田)벌에 시신을 땅에 묻고 나무를 깎아 `충청병사 황진의 시신이 이곳에 있다. 김해부사 리종인\'이라고 표지를 해 세운 후 다시 성으로 돌아왔다. 군중이 황진 장군의 후계자로 장윤(張潤)을 추대하여 군무를 맡겼으나 장윤도 전사하였다. 적군이 또 성의 서북쪽으로 침입하자 목사(牧使) 서예원(徐禮元)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그때 적의 두목 석종로(昔宗老) 등이 봇물을 터서 성안에 대니 성안은 물로 가득찼다. 3일 후 적들은 한밤중에 허수아비를 만들어 성안으로 던지며 침공하였고 우리 군사는 대패하였다. 공은 최선을 다해 선전했으나 구원군이 없으니 어찌하리. 김천일(金千鎰) 부사와 고종후(高從厚) 부자, 최경회(崔慶會), 양산숙(梁山璹 : 1561∼1593) 등이 남강(南江)에 투신 자살하고 이잠(李潛)과 강희열(姜凞悅) 등 10여 명이 온 힘을 다하여 분전하다 전사하였다. 홀로 남은 공은 흉적(凶賊)을 몰아낼 방책을 세우다가 칼을 뽑아들고 적진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마침내 성이 함락되어 왜적들이 입성하자 공은 왜장 둘을 양 겨드랑이에 끼고 남강가에 이르러 “김해부사 리종인은 물에 빠져 죽는다.”라고 크게 외치며 강물에 투신 순절하였다. 그날이 바로 1593년(선조 26) 6월 29일이다. 그때 공은 향년 44세였다. 선묘조(宣廟朝)에 무훈이 1등으로 기록되고 또 그의 이름이 높은 누각 위 철현판(鐵懸板)에 새겨져 있다. 그 후 <선무원종공신록(宣武原從功臣錄)>에 처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증직되고 다시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이어 공의 입절전지(立節戰地)에 정충단(정忠壇)이 세워졌다. 1607년(선조 40) 경상감사인 정사호(鄭賜湖)가 공의 충절을 듣고 창열사(彰烈祠) 배향을 신청, 위패를 모셨다. 또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은 “슬프도다. 공의 시종 충절의 그 빛은 일월같이 빛나고 그 높은 기상은 산악과 같이 숭고하도다.”라고 <원훈실록(元勳實錄)>에서 공의 충훈을 진술하였다.
이조판서 조진관(趙鎭寬 : 1734∼1806)이 진주재(晋州宰)로 있을 때 공의 충렬을 장하게 여겨 흠앙하는 시를 촉석루 현판에 썼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樓下長江尙怒號 : 촉석루 아래 긴 강물은 아직도 성내 부르짖지만,
李公之死最雄豪 : 리공의 죽음은 가장 웅대하고 호걸스러웠네.
城上腋挾靑衣將 : 성위에서 겨드랑이에 두 청의 입은 왜장을 끼고,
力盡魂逐白馬濤 : 힘이 다하자 혼을 좇아 백마도에 뛰어 들었네.
欲識此時明白死 : 그 때에 명백히 죽은 것을 알고 싶으면,
却呼自己姓名高 : 문득 자기의 성명을 소리 높이 외친 것을 생각하라.
至今不盡魚龍泣 : 지금까지도 어룡의 구슬픔 다하지 못하고 있는데,
人世空隆聖主褒 : 세상에선 부질없이 성주 포창만을 높이네.
진주 창렬사에는 당시의 전사자들의 위패를모시고 매년 음력 3월 초정일(初丁日)과 음력 6월 29일 연 2회에 걸쳐 제향을 봉행하여 영령을 위안하고 있다.
열녀 현풍곽씨(烈女 玄風郭氏)
효열녀 현풍곽씨는 수도군의 5대손인 대윤(大閏)의 부인으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8세의 어린 나이에 부친의 병환이 위중해지자 섬세한 무명지를 잘라 피를 내어 드림으로 쾌차케 하였다. 성년이 되어 혼인하고는 역시 시부모와 남편을 봉양하며 옥동자를 낳아 기르는 중에 10여 년간 부군이 병석에 누워 위독하게 되자 무명지를 잘라 수혈을 하였으나 상을 당하고 말았다. 그후 38년을 청상으로 살아 오는 중에 돌연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에서 충청도 청원군 오창으로 피난가서 있던 중 갑자기 왜적이 나타나 능욕하고자 하여 곽씨의 손을 잡기에 뿌리치며 품속에서 은장도를 꺼내어 자기 손을 잘라 버렸다. 또 젖가슴을 더듬기에 곽씨는 유방을 베어 던지면서 꾸짖기를 “너희놈들은 금수만도 못하다”고 말하고 이내 순절하였다. 왜적은 깜짝 놀라며 감탄하여 나무를 깎아 `천하에 둘도 없는 열녀\'라고 써서 묘목을 세우고 갔다.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 1635년(인조 13)에 충청도 관찰사 이경회(李慶會)가 조정에 상소하여 효열정문(孝烈旌門)을 세우게 되었다. 매년 후손과 유림, 그리고 지방유지들이 제향을 봉행하여 오고 있다.
1550년(명종 5) 7월 9일 서울에서 출생하여 임진왜란 때 진주성(晋州城)에서 순국(殉國)하였다. 공은 8척 장신이며 궁마(弓馬)에 능하였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1576년(선조 9)에 무과 별시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배수되었다. 그 후 1591년(선조 24) 12월에 김해부사로 부임, 반년 만에 고을이 무사태평해졌으며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진주판관(晋州判官) 김시민(金時敏 : 1544∼1592)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공은 분연히 일어나 “진주는 남방 대진(大陣)으로 꼭 사수하여야 한다.”고 외치며 군사를 이끌고 촉석성중(矗石城中)으로 달려가 흩어진 군졸들을 거두어 모아 성을 수호하며 적을 막아냈다. 그때 성내의 백성은 남녀 아울러 6∼7만명이었다. 그 무렵 진주절도사 최경회(崔慶會 : 1532∼1593),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 1537∼1593), 충청병사 황진(黃進 : ?∼1593), 의병장 고종후(高從厚 : 1554∼1593), 산천현감 장윤(張潤 : 1552∼1593) 등이 장병을 거느리고 입성하였다. 공은 이들을 기쁘게 맞으며 특히 황진(黃進)의 손을 잡고는 “이와 같이 큰 변란을 당한 이때, 같은 성내에서의 만남은 하늘의 도움이다. 어찌 일희일비(一喜一悲)가 없겠는가.”라고 서로 탄식했다 한다. 공과 황진은 동갑이며 무과(武科)를 동반급제하여 전부터 형제나 다름없는 사이였다.
1593년(선조 26) 6월 20일 왜적은 성을 삼중으로 포위했고 공성(攻城)의 포성(砲聲)은 땅을 뒤흔들었으며 왜적의 깃발은 온 들을 뒤덮었다. 공이 황진과 더불어 적병을 격퇴시키던 어느날 때마침 내린 비로 성의 한모퉁이가 무너진 틈을 이용하여 많은 적병이 잠입, 성내로 침공해 오는 것을 발견하고 분전역투하여 적병 천여 명을 베고 무찔러 격퇴시켰다. 황진이 다시 전지(戰地)를 시찰하려 할 때 적의 탄환이 황진의 왼쪽 이마에 명중, 그 자리에서 전사하였다. 공은 남달리 슬퍼하며 포백(布帛)으로 그 시체를 거둬 삼경임에도 시신을 옆에 끼고 나는 듯이 적진을 뚫고 나아가 청천마전(菁川麻田)벌에 시신을 땅에 묻고 나무를 깎아 `충청병사 황진의 시신이 이곳에 있다. 김해부사 리종인\'이라고 표지를 해 세운 후 다시 성으로 돌아왔다. 군중이 황진 장군의 후계자로 장윤(張潤)을 추대하여 군무를 맡겼으나 장윤도 전사하였다. 적군이 또 성의 서북쪽으로 침입하자 목사(牧使) 서예원(徐禮元)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그때 적의 두목 석종로(昔宗老) 등이 봇물을 터서 성안에 대니 성안은 물로 가득찼다. 3일 후 적들은 한밤중에 허수아비를 만들어 성안으로 던지며 침공하였고 우리 군사는 대패하였다. 공은 최선을 다해 선전했으나 구원군이 없으니 어찌하리. 김천일(金千鎰) 부사와 고종후(高從厚) 부자, 최경회(崔慶會), 양산숙(梁山璹 : 1561∼1593) 등이 남강(南江)에 투신 자살하고 이잠(李潛)과 강희열(姜凞悅) 등 10여 명이 온 힘을 다하여 분전하다 전사하였다. 홀로 남은 공은 흉적(凶賊)을 몰아낼 방책을 세우다가 칼을 뽑아들고 적진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마침내 성이 함락되어 왜적들이 입성하자 공은 왜장 둘을 양 겨드랑이에 끼고 남강가에 이르러 “김해부사 리종인은 물에 빠져 죽는다.”라고 크게 외치며 강물에 투신 순절하였다. 그날이 바로 1593년(선조 26) 6월 29일이다. 그때 공은 향년 44세였다. 선묘조(宣廟朝)에 무훈이 1등으로 기록되고 또 그의 이름이 높은 누각 위 철현판(鐵懸板)에 새겨져 있다. 그 후 <선무원종공신록(宣武原從功臣錄)>에 처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증직되고 다시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이어 공의 입절전지(立節戰地)에 정충단(정忠壇)이 세워졌다. 1607년(선조 40) 경상감사인 정사호(鄭賜湖)가 공의 충절을 듣고 창열사(彰烈祠) 배향을 신청, 위패를 모셨다. 또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은 “슬프도다. 공의 시종 충절의 그 빛은 일월같이 빛나고 그 높은 기상은 산악과 같이 숭고하도다.”라고 <원훈실록(元勳實錄)>에서 공의 충훈을 진술하였다.
이조판서 조진관(趙鎭寬 : 1734∼1806)이 진주재(晋州宰)로 있을 때 공의 충렬을 장하게 여겨 흠앙하는 시를 촉석루 현판에 썼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樓下長江尙怒號 : 촉석루 아래 긴 강물은 아직도 성내 부르짖지만,
李公之死最雄豪 : 리공의 죽음은 가장 웅대하고 호걸스러웠네.
城上腋挾靑衣將 : 성위에서 겨드랑이에 두 청의 입은 왜장을 끼고,
力盡魂逐白馬濤 : 힘이 다하자 혼을 좇아 백마도에 뛰어 들었네.
欲識此時明白死 : 그 때에 명백히 죽은 것을 알고 싶으면,
却呼自己姓名高 : 문득 자기의 성명을 소리 높이 외친 것을 생각하라.
至今不盡魚龍泣 : 지금까지도 어룡의 구슬픔 다하지 못하고 있는데,
人世空隆聖主褒 : 세상에선 부질없이 성주 포창만을 높이네.
진주 창렬사에는 당시의 전사자들의 위패를모시고 매년 음력 3월 초정일(初丁日)과 음력 6월 29일 연 2회에 걸쳐 제향을 봉행하여 영령을 위안하고 있다.
열녀 현풍곽씨(烈女 玄風郭氏)
효열녀 현풍곽씨는 수도군의 5대손인 대윤(大閏)의 부인으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8세의 어린 나이에 부친의 병환이 위중해지자 섬세한 무명지를 잘라 피를 내어 드림으로 쾌차케 하였다. 성년이 되어 혼인하고는 역시 시부모와 남편을 봉양하며 옥동자를 낳아 기르는 중에 10여 년간 부군이 병석에 누워 위독하게 되자 무명지를 잘라 수혈을 하였으나 상을 당하고 말았다. 그후 38년을 청상으로 살아 오는 중에 돌연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에서 충청도 청원군 오창으로 피난가서 있던 중 갑자기 왜적이 나타나 능욕하고자 하여 곽씨의 손을 잡기에 뿌리치며 품속에서 은장도를 꺼내어 자기 손을 잘라 버렸다. 또 젖가슴을 더듬기에 곽씨는 유방을 베어 던지면서 꾸짖기를 “너희놈들은 금수만도 못하다”고 말하고 이내 순절하였다. 왜적은 깜짝 놀라며 감탄하여 나무를 깎아 `천하에 둘도 없는 열녀\'라고 써서 묘목을 세우고 갔다.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 1635년(인조 13)에 충청도 관찰사 이경회(李慶會)가 조정에 상소하여 효열정문(孝烈旌門)을 세우게 되었다. 매년 후손과 유림, 그리고 지방유지들이 제향을 봉행하여 오고 있다.
진길(晋吉) 1701∼1756 파명:수도군(守道君)
  자는 덕승(德升), 수도군의 12대손으로 생부는 기서(箕敍)이며 희서(熙敍)에게 출계하였다.
1729년(영조 5) 식년시 병과에 급제, 장령(掌令)과 지평(持平)을 지냈다.
배위는 죽산박씨 상검(尙儉)의 딸로 1남 3녀를 두었다.
묘소는 충북 청원군 오창면 관대리에 있다.
1729년(영조 5) 식년시 병과에 급제, 장령(掌令)과 지평(持平)을 지냈다.
배위는 죽산박씨 상검(尙儉)의 딸로 1남 3녀를 두었다.
묘소는 충북 청원군 오창면 관대리에 있다.
징후(徵厚) 1603∼1671 파명:수도군(守道君)
  자는 자원(子遠), 수도군의 7대손이며 모암(慕菴) 참찬공(參贊公) 원준의 장남이다.
어릴 때부터 효심이 깊었으며 4세때에 아버지를 따라 시골에 갔다. 사람들이 땅에 엎드려 여가(餘暇)를 청하는 것을 보고는 공도 땅에 엎드리자 참찬공이 그 연유를 물으니 공은 말하기를 “여가를 받아 모친을 뵈옵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여 참찬공이 감탄하고 즉시 보내어 모친을 뵈올 수 있게 하였다. 공의 형제는 둘인데 동생 첨지공 민후(敏厚)는 어려서 양녕대군파로 출계했다. 공은 날마다 동생을 찾아가 잠시도 떠나지 않자 아버지 참찬공은 그 돈독한 우애에 감탄하여 집을 가까이로 이사했다. 1635년(인조 13) 정월 진사 초시에 형제가 모두 합격하였으나 병자호란으로 복시(覆試)가 열리지 못하자 공은 “국란으로 폐시되니 이 또한 운명이구나.” 하고 다시는 과거를 위한 준비를 하지 않았다. 19세 때 한질(寒疾)에 걸려 여러 달 위태로운 지경이었는데 우연히 시 한 수 읊기를
“비는 천 봉우리의 저녁을 잠그고, 바람은 만 골짜기의 가을을 부르네(雨鎖千峯夕, 風呼萬壑秋).”라고 하였는데 아는 사람의 말이 “아무개는 병이 즉시 나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장수를 누릴 것이며 또한 후손도 번창할 것이다.”라 하였는데 얼마 후 병이 완쾌되었다.
1643년(인조 21) 춘성군 남이웅(南以雄 : 1575∼1648)의 추천으로 참봉이 되었는데 워낙 가난하기 때문에 부득이 취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직분을 다한 공으로 선공감 부봉사, 상서원 부직장 · 직장을 거쳐 사복시 주부로 승진된 지 한달이 못되어 종부시로 옮겼다. 고사(故事)에는 상상(上庠)에 든 사람만이 비로소 종부시의 주부가 될 수 있었음에도 파격적으로 공에게 제수했던 이유는 당시의 종반들이 대부분 근신하지 않았기에 조정의 의론이 공의 재주와 학행이라야만 가히 교화할 수 있다고 합의되었기 때문이다. 백헌(白軒) 경석(景奭 : 1595∼1671)이 말하기를 “아무개가 종부시에 온 지 한달도 지나지 않아 종반이 바로잡혔으니 사람을 잘 등용한 효험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했다. <선원록(璿源錄)>을 봉안하던 곳이 낮은 곳에 있어서 허술함을 보고 공은 분개하여 이를 조정에 건의하여 축대를 높이 쌓고 새로 전각을 지어 곧은 길을 만들고 삼문을 세워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제조(提調)가 그 칭찬의 주문(奏文)을 올리니 임금이 승서를 명하였다. 그해에 지평현감으로 나아갔으나 공정하지 못한 것은 비록 상사의 명이라 해도 따르지 않았기에 3년만에 좌천되었고 고을로 돌아와 훈국랑으로 임명되어 낭향(食良餉)을 주관, 여러 해 시무하였다. 재임 중 사용하고 남은 공금은 일전도 사사롭게 쓰지 않고 모인 돈이 수백금이 되었다. 공이 제조 잠곡(潛谷) 김육(金堉 : 1580∼1658)에게 말하기를 “먼 시골에 사는 선비들이 비록 열심히 학문을 익히고자 하여도 서적이 없어서 걱정하는 것이 애석합니다. 청컨대 그 여분 저축한 돈으로 중요한 서적을 인쇄하여 싼값으로 팔아 본전의 반을 취하고 그 나머지는 취하지 않았으면 합니다.”하니 잠곡이 매우 기뻐하며 이를 허락했다. 공은 즉시 <시전><서전><논어><맹자><고문진보후집(古文眞寶後集)><문장궤범> 등을 적어내고 또 이백(李白) · 두보(杜甫) · 한유(韓愈) 삼가(三家)의 시문을 합본으로 찍은 것을 팔로(八路 : 팔도)의 여러 고을에 보내, 먼곳의 많은 문사들이 이에 힘입은 바가 컸다. 1658년(효종 9)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 1607∼1689)이 이조판서가 되자, 공은 “현명함이 고인(故人)과 같아서 칠문(漆門)과 낙간(落簡)의 일을 맡길 만하다.” 하고는 감찰을 배수케 하였는데 당시 공에 대한 사류의 기대가 이와 같았다. 1660년(현종 1)에 의빈부 도사가 되고 1664년(현종 5)에 돈녕부 판관으로 옮겼으며 이해에 정산현감이 되었다. 1668년(현종 9) 장원서 별제로, 또 장례원 사평 · 사의를 거쳐 1669년(현종 10)에 한성부 서윤이 되었다. 한성부 정원을 넓혀 많은 과거 응시자의 편의를 도모했으며 한성부가 20년 동안 해결하지 못한 부채 송사를 비롯해 끊이지 않는 크고 작은 수많은 송사를 공이 직접 나서 명쾌하게 해결하니 모든 사람들이 공의 명석하고 밝은 일처리에 감탄했고 송사가 저절로 없어졌다. 1671년(현종 12)에는 기근으로 굶어 죽는 자가 많아 관료들이 모두 나서 그 실태를 파악할 겸 아사자들의 시체를 살펴보게 하였다. 그때 공은 신환으로 와병 중임에도 무리하게 몸을 일으켜 시체가 쌓여 있는 곳을 두루 돌며 살피던 중 신병이 더욱 악화되어 1671년(현종 12) 5월 18일 중부 객사에서 별세하니 향년 69세였다.
묘소는 광주(廣州) 학야동 선영 유좌의 언덕에 부인과 합폄하였다. 손자 상화(相턗 :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의 추은으로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으로 증직되었다.
어릴 때부터 효심이 깊었으며 4세때에 아버지를 따라 시골에 갔다. 사람들이 땅에 엎드려 여가(餘暇)를 청하는 것을 보고는 공도 땅에 엎드리자 참찬공이 그 연유를 물으니 공은 말하기를 “여가를 받아 모친을 뵈옵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여 참찬공이 감탄하고 즉시 보내어 모친을 뵈올 수 있게 하였다. 공의 형제는 둘인데 동생 첨지공 민후(敏厚)는 어려서 양녕대군파로 출계했다. 공은 날마다 동생을 찾아가 잠시도 떠나지 않자 아버지 참찬공은 그 돈독한 우애에 감탄하여 집을 가까이로 이사했다. 1635년(인조 13) 정월 진사 초시에 형제가 모두 합격하였으나 병자호란으로 복시(覆試)가 열리지 못하자 공은 “국란으로 폐시되니 이 또한 운명이구나.” 하고 다시는 과거를 위한 준비를 하지 않았다. 19세 때 한질(寒疾)에 걸려 여러 달 위태로운 지경이었는데 우연히 시 한 수 읊기를
“비는 천 봉우리의 저녁을 잠그고, 바람은 만 골짜기의 가을을 부르네(雨鎖千峯夕, 風呼萬壑秋).”라고 하였는데 아는 사람의 말이 “아무개는 병이 즉시 나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장수를 누릴 것이며 또한 후손도 번창할 것이다.”라 하였는데 얼마 후 병이 완쾌되었다.
1643년(인조 21) 춘성군 남이웅(南以雄 : 1575∼1648)의 추천으로 참봉이 되었는데 워낙 가난하기 때문에 부득이 취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직분을 다한 공으로 선공감 부봉사, 상서원 부직장 · 직장을 거쳐 사복시 주부로 승진된 지 한달이 못되어 종부시로 옮겼다. 고사(故事)에는 상상(上庠)에 든 사람만이 비로소 종부시의 주부가 될 수 있었음에도 파격적으로 공에게 제수했던 이유는 당시의 종반들이 대부분 근신하지 않았기에 조정의 의론이 공의 재주와 학행이라야만 가히 교화할 수 있다고 합의되었기 때문이다. 백헌(白軒) 경석(景奭 : 1595∼1671)이 말하기를 “아무개가 종부시에 온 지 한달도 지나지 않아 종반이 바로잡혔으니 사람을 잘 등용한 효험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했다. <선원록(璿源錄)>을 봉안하던 곳이 낮은 곳에 있어서 허술함을 보고 공은 분개하여 이를 조정에 건의하여 축대를 높이 쌓고 새로 전각을 지어 곧은 길을 만들고 삼문을 세워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제조(提調)가 그 칭찬의 주문(奏文)을 올리니 임금이 승서를 명하였다. 그해에 지평현감으로 나아갔으나 공정하지 못한 것은 비록 상사의 명이라 해도 따르지 않았기에 3년만에 좌천되었고 고을로 돌아와 훈국랑으로 임명되어 낭향(食良餉)을 주관, 여러 해 시무하였다. 재임 중 사용하고 남은 공금은 일전도 사사롭게 쓰지 않고 모인 돈이 수백금이 되었다. 공이 제조 잠곡(潛谷) 김육(金堉 : 1580∼1658)에게 말하기를 “먼 시골에 사는 선비들이 비록 열심히 학문을 익히고자 하여도 서적이 없어서 걱정하는 것이 애석합니다. 청컨대 그 여분 저축한 돈으로 중요한 서적을 인쇄하여 싼값으로 팔아 본전의 반을 취하고 그 나머지는 취하지 않았으면 합니다.”하니 잠곡이 매우 기뻐하며 이를 허락했다. 공은 즉시 <시전><서전><논어><맹자><고문진보후집(古文眞寶後集)><문장궤범> 등을 적어내고 또 이백(李白) · 두보(杜甫) · 한유(韓愈) 삼가(三家)의 시문을 합본으로 찍은 것을 팔로(八路 : 팔도)의 여러 고을에 보내, 먼곳의 많은 문사들이 이에 힘입은 바가 컸다. 1658년(효종 9)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 1607∼1689)이 이조판서가 되자, 공은 “현명함이 고인(故人)과 같아서 칠문(漆門)과 낙간(落簡)의 일을 맡길 만하다.” 하고는 감찰을 배수케 하였는데 당시 공에 대한 사류의 기대가 이와 같았다. 1660년(현종 1)에 의빈부 도사가 되고 1664년(현종 5)에 돈녕부 판관으로 옮겼으며 이해에 정산현감이 되었다. 1668년(현종 9) 장원서 별제로, 또 장례원 사평 · 사의를 거쳐 1669년(현종 10)에 한성부 서윤이 되었다. 한성부 정원을 넓혀 많은 과거 응시자의 편의를 도모했으며 한성부가 20년 동안 해결하지 못한 부채 송사를 비롯해 끊이지 않는 크고 작은 수많은 송사를 공이 직접 나서 명쾌하게 해결하니 모든 사람들이 공의 명석하고 밝은 일처리에 감탄했고 송사가 저절로 없어졌다. 1671년(현종 12)에는 기근으로 굶어 죽는 자가 많아 관료들이 모두 나서 그 실태를 파악할 겸 아사자들의 시체를 살펴보게 하였다. 그때 공은 신환으로 와병 중임에도 무리하게 몸을 일으켜 시체가 쌓여 있는 곳을 두루 돌며 살피던 중 신병이 더욱 악화되어 1671년(현종 12) 5월 18일 중부 객사에서 별세하니 향년 69세였다.
묘소는 광주(廣州) 학야동 선영 유좌의 언덕에 부인과 합폄하였다. 손자 상화(相턗 :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의 추은으로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으로 증직되었다.
호신(好信) 1564∼1605 파명:수도군(守道君)
  자는 사립(士立), 호는 나진재(懶眞齋). 호의(好義)의 아우. 수도군의 6대손. 1603년(선조 36) 정시 을과에 급제, 홍문관 부제학과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배위는 숙부인 안동김씨로 충남(忠男)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군내면 명산리 묘좌이다.
배위는 숙부인 안동김씨로 충남(忠男)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군내면 명산리 묘좌이다.
호의(好義) 1560∼1624 파명:수도군(守道君)
  자는 사직(士直), 수도군 6대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7년(선조 30) 정시 갑과에 장원 급제, 병조좌랑 · 정언 · 사서 · 지평 · 평안도도사 · 헌납 · 장령 · 통례원 상례 등을 지냈다. 1609년(광해군 1) 고부사(告訃使)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동부승지 · 우승지를 거쳐 1615년(광해군 7) 형조참판을 역임하였으며 후에 5도방백(五道方伯)을 지냈다. 1624년(인조 2) 65세로 별세했다.
묘소는 광주(廣州) 양지(陽地)에 모셨다.
배위는 정부인 파평윤씨로 기(機)의 딸이다.
묘소는 광주(廣州) 양지(陽地)에 모셨다.
배위는 정부인 파평윤씨로 기(機)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