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녕군파 약사
익녕군의
휘는 치(쐌)이고 시호는 소강(昭剛)이며 태종대왕의 8남으로 어머니는 선빈(善嬪) 안씨(安氏)이다. 공은 1422년(세종 4) 10월에 태어나 1464년(세조 10) 7월 10일 향년 43세로 별세했다. 공은 유복자인 까닭에 아버지 태종대왕을 흠모함이 더없이 깊었으며, 천품이 고매 · 총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어질고 겸손한 덕성과 학행이 뛰어났다. 공은 왕자로서의 자질을 고루 갖추어 근엄하였고, 환난이 그칠 날이 없던 세태에서도 능히 명철보신(明哲保身)하여 종친간의 돈목에 남달리 힘썼으며, 종사(宗社)를 위해서도 헌신하였다.
배위는 운봉박씨와 평양조씨이다. 군부인 운봉박씨 사이에서는 무후하였고, 평양조씨에게서 의천군(義泉君)과 수천군(秀泉君) 두 아들을 두었다.
장남 의천군의 휘는 승은(承恩), 자는 백총(伯寵)이다. 처음에 의천정이 되었으나 후에 의천군이 되었다. 공은 도량이 넓고 효성이 지극하여 생모가 아닌 박씨부인을 섬기는 데에 친모와 다름없이 하여 칭송이 자자했다. 조상을 받드는 일 또한 더욱 공경스럽게 하여 속절(俗節)에는 새 음식을 반드시 사당에 올린 후에 맛을 보았다. 다만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여 마침내 이로써 병을 얻어 기유년 정월 15일에 별세하니 향년 39세였다. 공의 병이 위중했을 때 성종대왕이 특별히 의약을 하사했으니 또 남다른 은혜였다. 이 해 4월 9일 아버지 묘소의 안산(案山)인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 118-3번지에 예장했다.
차남 수천군은 휘가 정은(貞恩), 자는 정중(正中), 호는 월호(月湖) · 남곡(嵐谷) · 설창(雪窓)이다. 처음에는 수천부정이었으나 손자인 함천군(咸川君)에 의해 도정으로 증직되었다. 공은 천성이 매우 어질고 총명했으며, 공손하고 겸손하여 당대의 학덕 높은 유명인사들과 교유하였다. 학문을 할 때는 글보다 이치를, 시에는 글보다 격조를 먼저 한 청빈한 선비였다. 음률에도 능하여 고음과 화성을 신묘하게 조화시켜 슬픈 곡을 연주하면 듣는 이는 반드시 울고야 말았다 한다. 영의정을 다섯번이나 역임한 영돈녕 완평부원군 원익(元翼)은 공의 가장 뛰어난 후손으로 공에게 숭헌대부(崇憲大夫)를 증직케 하였다.
공은 류씨와 혼인하여 청기군(靑杞君) 표(彪)를 얻었고, 허씨부인과의 사이에서는 부림수 표(豹) · 결기수 현(玄) · 무령수 월(越) 3남을 두었다.
배위 현부인 문화류씨는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 101 묘소 도당첨(禱堂沾) 남 해좌에 모셨으나, 도시계획사업으로 인하여 1989년 12월 23일 공의 묘소에 부우(쯊右)하였으며 현부인 양천허씨는 묘역 정비의 일환으로 공의 묘 계하에서 1995년 3월 18일 공의 묘에 부좌(쯊左)로 천묘 합폄했다.
3세 청기군은 초수는 수(守)였다가 청기군으로 봉군되었다. 품계는 소덕대부에 이르렀으며 묘소는 도당첨 101번지에서 도시계획사업으로 동소 137번지 고모 옆 동남방으로 천묘했다.
4세 함천군 억재(億載)는 자가 대년(大年)이다. 초수는 부수였다가 후에 시예(試藝)에 뽑혀 창선대부(彰善大夫)에 승진되어 정(正)이 되었다. 그 후 직혼전(直魂殿)에 뽑히고 명선대부(明善大夫), 정의대부(正義大夫) 함천군(咸川君)에 봉해졌다.
공의 덕행은 수천군에게서 본 받았고 또 익녕군 이후로 여러 대 동안 덕을 쌓고 학문에 열중하여 사대부의 집이 되었다. 향년 82세로 별세했으며 향리 소하동 도당첨 101번지 해좌사향(亥坐巳向)에 안장되었다.
종원 분포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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