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9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겸수(謙洙) 1801∼1837 파명:신성군(信城君)
  자는 경수(景受), 유명의 차남이다.
1832년(순조 32) 생원시에 급제하여 참봉이 되고, 1837년(헌종 3) 식년 전시 갑과에 급제, 직장(直長)을 지냈다.
배위는 해주오씨 연상(淵尙)의 딸이다.
묘소는 진평군 묘 앞 인좌이다.
1832년(순조 32) 생원시에 급제하여 참봉이 되고, 1837년(헌종 3) 식년 전시 갑과에 급제, 직장(直長)을 지냈다.
배위는 해주오씨 연상(淵尙)의 딸이다.
묘소는 진평군 묘 앞 인좌이다.
담(담) 1739∼1780 파명:신성군(信城君)
  자는 자후(子厚), 호는 유련(遊蓮). 신성군 5대손이며 정황의 장남이다.
생원시에 급제하여 좌랑(佐郞)을 지내고 이조참판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가선대부 완흥군(完興君)에 봉해졌다.
배위는 정부인 원주원씨로 경하(景夏)의 딸이다.
묘소는 평운군 묘 앞 임좌이다.
생원시에 급제하여 좌랑(佐郞)을 지내고 이조참판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가선대부 완흥군(完興君)에 봉해졌다.
배위는 정부인 원주원씨로 경하(景夏)의 딸이다.
묘소는 평운군 묘 앞 임좌이다.
면상(冕相) 1846∼1905 파명:신성군(信城君)
  자는 성규(聖圭), 호는 성재(誠齋). 신성군 9대손이며 승수의 계자로 생부는 경평군파 종영(種永)이다.
1865년(고종 2) 진사시에 급제 좌랑(佐郞)을 지내고, 1889년(고종 26) 문과 갑과에 급제,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사 · 오위도총부 부총관 · 가의대부 행 종정경을 역임했다.
배위는 정부인 파평윤씨로 의정(義定)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분양 자좌이다.
1865년(고종 2) 진사시에 급제 좌랑(佐郞)을 지내고, 1889년(고종 26) 문과 갑과에 급제,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사 · 오위도총부 부총관 · 가의대부 행 종정경을 역임했다.
배위는 정부인 파평윤씨로 의정(義定)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분양 자좌이다.
승수(升洙) 1804∼1879 파명:신성군(信城君)
  자는 경유(景猷), 시호는 효헌(孝憲), 유명의 3남이며 겸수의 아우이다.
1846년(헌종 12) 식년시 을과에 급제. 자헌대부 지종정경부사(知宗正卿府事) · 이조판서 겸 지경연 의금부 춘추관사 · 동지 성균관사 ·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지냈다.
배위는 정부인 풍산홍씨로 선보(善譜)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분양 해좌이다.
1846년(헌종 12) 식년시 을과에 급제. 자헌대부 지종정경부사(知宗正卿府事) · 이조판서 겸 지경연 의금부 춘추관사 · 동지 성균관사 ·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지냈다.
배위는 정부인 풍산홍씨로 선보(善譜)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분양 해좌이다.
유명(惟命) 1767∼1817 파명:신성군(信城君)
  자는 치순(穉順), 호는 동포(東圃). 정황의 손자이며 담의 아들이다.
1795년(정조 19) 성균관에 선발되어 원릉(元陵)참봉이 되었다가 이윽고 효원전(孝元殿)의 낭관(郞官)이 되었다. 1801년(순조 1) 증광 문과 병과에 급제, 괴원(槐院)에 예속되었다가 이듬해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 여러 벼슬을 거쳐 우부승지가 되었다. 1812년(순조 12) 관서지방에 큰 기근이 들어 감진사(監賑使)로 뽑혀 나갔다. 그 때 유적(流賊)이 서쪽지방에서 창궐하여 전국을 휩쓸 지경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위험하게 생각했으나 공은 태평스럽게 나아가 23개 고을을 순행하니 백여 일 만에 이를 잘 다스리고 돌아왔다. 이어 좌부승지 · 좌승지를 역임하는 동안 중간에 이천부사를 지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승지가 되고 1814년(순조 14) 경례(慶禮)에 집사(執事)로서 수고한 공으로 가선대부에 오르고, 완원군(完原君)에 봉해졌으며 이어 병조 · 형조 · 예조 참판, 성균관 대사성 · 동지의금부사 · 오위도총부 부총관 · 승문원 제조를 역임했다.
배위는 정부인 광산김씨로 두칠(斗七)의 딸이다.
묘소는 함릉군 묘 앞 해좌이다.
1795년(정조 19) 성균관에 선발되어 원릉(元陵)참봉이 되었다가 이윽고 효원전(孝元殿)의 낭관(郞官)이 되었다. 1801년(순조 1) 증광 문과 병과에 급제, 괴원(槐院)에 예속되었다가 이듬해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 여러 벼슬을 거쳐 우부승지가 되었다. 1812년(순조 12) 관서지방에 큰 기근이 들어 감진사(監賑使)로 뽑혀 나갔다. 그 때 유적(流賊)이 서쪽지방에서 창궐하여 전국을 휩쓸 지경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위험하게 생각했으나 공은 태평스럽게 나아가 23개 고을을 순행하니 백여 일 만에 이를 잘 다스리고 돌아왔다. 이어 좌부승지 · 좌승지를 역임하는 동안 중간에 이천부사를 지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승지가 되고 1814년(순조 14) 경례(慶禮)에 집사(執事)로서 수고한 공으로 가선대부에 오르고, 완원군(完原君)에 봉해졌으며 이어 병조 · 형조 · 예조 참판, 성균관 대사성 · 동지의금부사 · 오위도총부 부총관 · 승문원 제조를 역임했다.
배위는 정부인 광산김씨로 두칠(斗七)의 딸이다.
묘소는 함릉군 묘 앞 해좌이다.
익응(益應) 1852∼1939 파명:신성군(信城君)
  자는 공우(公友), 신성군의 10대손이며 유명(惟命)의 증손, 생부는 정상(定相)이며 언상(彦相)의 아들이다.
음사(蔭仕)로 통훈대부 진안현감 겸 남원진관 병마절제도위를 지냈다.
배위는 숙부인 청송심씨로 성택(聖澤)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연평리 갑좌이다.
음사(蔭仕)로 통훈대부 진안현감 겸 남원진관 병마절제도위를 지냈다.
배위는 숙부인 청송심씨로 성택(聖澤)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연평리 갑좌이다.
재건(載乾) 1868∼1911 파명:신성군(信城君)
  자는 대시(大始), 호는 석천(石泉). 유명의 현손이며 익응의 계자로 생부는 영양군파(永陽君派) 조응(祚應)이다.
1887년(고종 24) 경과 정시 병과에 급제, 통 훈대부 홍문관 시강(侍講)을 지냈다.
배위는 숙부인 안동권씨로 영수(榮洙)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연평리 경좌이다.
1887년(고종 24) 경과 정시 병과에 급제, 통 훈대부 홍문관 시강(侍講)을 지냈다.
배위는 숙부인 안동권씨로 영수(榮洙)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연평리 경좌이다.
정현(廷顯) 1739∼1812 파명:신성군(信城君)
  자는 회희(晦熙), 신성군의 5대손이며 함계군의 아들이다.
1792년(정조 16) 식년 전시 병과에 급제, 통정대부 승지를 지냈다.
배위는 숙부인 안동권씨로 장(樟)의 딸이다.
묘소는 함계군 묘 앞 임좌이다.
1792년(정조 16) 식년 전시 병과에 급제, 통정대부 승지를 지냈다.
배위는 숙부인 안동권씨로 장(樟)의 딸이다.
묘소는 함계군 묘 앞 임좌이다.
정황(廷煌) 1705∼1762 파명:신성군(信城君)
  자는 원장(元章), 호는 둔와(鈍窩). 함릉군의 장남으로 공조 정랑(正郞)을 지내고, 통정대부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배위는 양주조씨 정빈(鼎彬)의 딸이다.
묘소는 함릉군 묘 우강 간좌이다.
배위는 양주조씨 정빈(鼎彬)의 딸이다.
묘소는 함릉군 묘 우강 간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