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천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5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부룡(夫龍) 1725∼1795 파명:운천군(雲川君)
  운천군의 8대손이며 소위장군(昭威將軍) 본정(本禎)의 증손이다.
약관에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지방의 변방에서 오랫동안 근무하였다. 벼슬이 절충장군에 이르러 당상관으로서 정사를 의론하고 북방정책에 많이 참여하였다. 문장도 뛰어나 각종 필서(筆書)가 전해지고 있으며 특히 함경도에서 근무하면서 그 곳의 경치풍광을 적은 <부룡문집(夫龍文集)>이 전해지고 있다.
공은 낙향 후에는 후학을 가르치고 인근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며 농사 개량과 근면성실이 빈농탈출의 길이라는 농민계도에 여생을 바쳤다. 그의 장례식 때에는 그를 기리는 만장행렬이 수십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1795년(정조 19)에는 그의 공적과 증조 본정(本禎)의 행적이 옳게 평가되어 동생 부선(夫善)까지 가선대부에 추증되고 그의 조부 세문(世文)과 부친 두남(斗南)에게는 통정대부에 봉하는 교지가 내려졌다.
대성문학원(大聖文學院)에서는 그의 덕행과 행적을 높이 칭송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포창문(褒彰文)으로서 가문 전체를 치하하였고 조정에서도 전지를 내리고, 그의 아들 상묵(尙默)에게는 가선대부 한성부 좌윤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봉하는 교지와 완문(完文)을 내렸다.
공의 유필(遺筆)로 전해지는 것 중에는 `이득전지, 난득형제(易得田地, 難得兄弟)\'라는 글이 있어 형제간의 소중함을 강조하였고 어른을 공경하고 형제간에 화목하라는 경조목덕(敬祖睦德)을 가훈으로 남기고 있어 그 후손들에게까지 옳게 지도하려고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약관에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지방의 변방에서 오랫동안 근무하였다. 벼슬이 절충장군에 이르러 당상관으로서 정사를 의론하고 북방정책에 많이 참여하였다. 문장도 뛰어나 각종 필서(筆書)가 전해지고 있으며 특히 함경도에서 근무하면서 그 곳의 경치풍광을 적은 <부룡문집(夫龍文集)>이 전해지고 있다.
공은 낙향 후에는 후학을 가르치고 인근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며 농사 개량과 근면성실이 빈농탈출의 길이라는 농민계도에 여생을 바쳤다. 그의 장례식 때에는 그를 기리는 만장행렬이 수십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1795년(정조 19)에는 그의 공적과 증조 본정(本禎)의 행적이 옳게 평가되어 동생 부선(夫善)까지 가선대부에 추증되고 그의 조부 세문(世文)과 부친 두남(斗南)에게는 통정대부에 봉하는 교지가 내려졌다.
대성문학원(大聖文學院)에서는 그의 덕행과 행적을 높이 칭송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포창문(褒彰文)으로서 가문 전체를 치하하였고 조정에서도 전지를 내리고, 그의 아들 상묵(尙默)에게는 가선대부 한성부 좌윤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봉하는 교지와 완문(完文)을 내렸다.
공의 유필(遺筆)로 전해지는 것 중에는 `이득전지, 난득형제(易得田地, 難得兄弟)\'라는 글이 있어 형제간의 소중함을 강조하였고 어른을 공경하고 형제간에 화목하라는 경조목덕(敬祖睦德)을 가훈으로 남기고 있어 그 후손들에게까지 옳게 지도하려고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송운(松雲) 1595∼1645 파명:운천군(雲川君)
  인산군계(仁山君系)로서 증 승헌대부에 올랐다. 병자호란 때 군사를 일으켜 공을 세웠다.
시재(時宰) 1648∼1701 파명:운천군(雲川君)
  원인도정계(原仁都正系)이며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훈련원도정 통정대부 행 부령도호부사 병마첨절제부사를 지냈다.
언형(彦馨) 1668∼1728 파명:운천군(雲川君)
  원인도정계(原仁都正系)이며 통정대부에 올라 행 장단도호부사 병마첨절제사 겸 우방어사를 지냈다.
태현(泰賢) 1740∼1806 파명:운천군(雲川君)
  자는 채여(采汝), 성사(聖師)의 아들이며 1771년(영조 47) 식년 전시에 병과로 급제, 장령(掌令)을 지냈다. 묘소는 철원군 묘장면 백학동에 있다. 운천군파에서 유일한 문과 대과 급제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