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2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영선(英善) 1889∼1955 파명:안양군(安陽君)
 영선(英善) [1889(고종 26)∼1955]
호는 백농(白쩅), 익원(翼元)의 차남으로 1889년(고종 26) 3월 9일 경기도 용인시 기흥읍 영덕리 덕곡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의로운 일에 앞장서는 투사기질이 있었다. 16세 때에는 종중산소가 부당하게 타인에게 매도된 것을, 법원 재판에서 직접 변론하여 환원케 하였다.
1906년(광무 10) 17세 때 수원 명륜중학교를 졸업하고 18세 때 을사조약 · 정미조약에 관한 내용을 듣고 울분을 참지 못하여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였다.
이 때부터 이미 혁명가로서의 인생관을 확립했고 선각자적인 세계관을 정립하였다. 그러나 사법권 · 행정권 · 외교권을 일본에 넘겨주던 당시의 상황에서 1908년 조국의 장래를 위해 만주로 건너가 남만주 각지에서 여러 동지들을 규합하는 등 항일독립투쟁 대열에 직접 뛰어들어, 조국에서 일본의 압제에 시달리다 지쳐 이주해 오는 동포들의 의식주 해결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뜻한 바가 있어 1913년 단장 조맹선(趙孟善) · 의병대장 이석대(李奭大) · 고문 김학소(金學昭)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대한독립단에 가담하였다.
공에게 주어진 최초의 임무는 압록강 일대를 정탐하는 동시에 각 지방과의 연락책이었다. 공은 보부상으로 변장하여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기 때문에 1915년에는 공의 공적이 인정되어 대한독립단 남만지단장(南滿支團長)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공은 그간의 활동경험으로 전문적인 전술전략을 배우지 않고서는 조국 광복을 이룰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1919년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갔다.
지청천(池靑天 : 1888∼1959) · 리범석(李範奭 : 1900∼1972) 장군으로부터 전문적인 군사지식을 습득한 후 그 해에 상해임시정부로 가서 당시 의정원의장 이동녕(李東寧 : 1869∼1940)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 선생 앞에서 선서하고 재무부에 복무하였다.
1920년 당시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국채 판매 및 국내 지방조직의 임무를 띠고 밀파되어 국내 동지들과 접선하였다. 임무를 수행하던 중 1921년 6월 29일 서울 종로경찰서 고등계형사 삼륜(三輪)에게 체포되어 25일간 갖은 고문 끝에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당시 서대문형무소에는 천여 명의 정치범들이 수감되어 있었던 바 1923년경 구미에서 정치시찰단이 내한한다는 소식이 있자 일본은 한일병탄에 불만을 품은 인사가 없다는 것을 가장함으로써 강압정치상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중인 정치범 일부를 지방으로 분산수감하게 되어 공을 비롯하여 백여 명의 정치범들이 함흥감옥으로 이감되었다.
12월 28일 이감되자 공은 이 기회에 한민족은 한일병탄과 일본의 강압정치에 반대한다는 사실을 폭로하여 세계만방에 한민족의 억울함을 호소코자 남대문 역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경계가 심하여 한 사람도 동조하는 사람이 없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원산역까지 오게 되었다. 열차가 약 1시간 머무는 동안 공은 일어서서 “이만한 일도 실행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조국의 독립을 바라겠는가? 백명이 희생함으로써 조국이 자주독립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냐.”고 한 후 홀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자 다른 수인(囚人)들도 감격하여 만세를 부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일본 경찰이 놀라 진압하려 하므로 공은 앞으로 나아가 호송 간수장에게 “전 책임은 나 리영선에 있으니, 나 한 사람만 처벌하고 다른 사람은 처벌치 말라” 고 하였다.
그 결과 1924년 1월 4일 함흥감옥 책임자는 “당신이 한 행동은 당연히 다시 한번 재판을 받아야 하겠지만 간수장과 굳은 약속이 있었으므로 특별히 내 권한으로 다음과 같이 처벌하겠다.” 고 하면서 옥중의 옥이라고 할 수 있는 암실독방(暗室獨房)에 168시간 감금을 시키니 공은 거의 실신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간수들이 공을 감옥 병실로 옮기고자 하였으나, “인명은 재천이다. 너희놈들에게 죽을 것 같았으면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다.”고 거부하자 일반 수인실에 수감되었다. 이에 모든 수인들도 감격하여 기필코 독립투쟁 대열에 목숨을 바칠 각오를 다짐하였다.
1925년 7월 4일 감옥에서 풀려났는데, 그 때 나이 37세였다. 출옥 후 곧 장춘 · 길림 · 하얼빈 등지에서 자작농장을 창설한 후 국내에서 이주해 온 동포들의 생활을 도와주는 동시에 후세들의 교육사업에 힘썼다.
1933년 일본세력을 배경으로 한 만주국이 건국기념식을 거행하자, 공은 남자현(南慈賢 : 1872∼1933) 여사 · 문익빈(文益彬) 선생 등과 함께 기념식에 참석한 일본인 전권대사 무등(武藤)을 폭탄투하로 살해코자 계획하였으나 발각되어 1933년 2월 28일 남강서(南崗署)에 다시 체포되어 갖은 악형을 받았다. 이를 보다 못한 남자현 여사는 공이 더 큰 일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여 자기가 단독 주모자라는 것을 주장하여 5개월만에 공과 문익빈 선생은 석방되었다. 그 후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농장경영을 하는 한편 자라나는 후세들의 교육을 위하여 교육사업에 투신하여 자주독립사상을 주입시켰다. 1955년 11월 6일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셋다리부락에서 향년 67세로 별세하였다.
호는 백농(白쩅), 익원(翼元)의 차남으로 1889년(고종 26) 3월 9일 경기도 용인시 기흥읍 영덕리 덕곡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의로운 일에 앞장서는 투사기질이 있었다. 16세 때에는 종중산소가 부당하게 타인에게 매도된 것을, 법원 재판에서 직접 변론하여 환원케 하였다.
1906년(광무 10) 17세 때 수원 명륜중학교를 졸업하고 18세 때 을사조약 · 정미조약에 관한 내용을 듣고 울분을 참지 못하여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였다.
이 때부터 이미 혁명가로서의 인생관을 확립했고 선각자적인 세계관을 정립하였다. 그러나 사법권 · 행정권 · 외교권을 일본에 넘겨주던 당시의 상황에서 1908년 조국의 장래를 위해 만주로 건너가 남만주 각지에서 여러 동지들을 규합하는 등 항일독립투쟁 대열에 직접 뛰어들어, 조국에서 일본의 압제에 시달리다 지쳐 이주해 오는 동포들의 의식주 해결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뜻한 바가 있어 1913년 단장 조맹선(趙孟善) · 의병대장 이석대(李奭大) · 고문 김학소(金學昭)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대한독립단에 가담하였다.
공에게 주어진 최초의 임무는 압록강 일대를 정탐하는 동시에 각 지방과의 연락책이었다. 공은 보부상으로 변장하여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기 때문에 1915년에는 공의 공적이 인정되어 대한독립단 남만지단장(南滿支團長)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공은 그간의 활동경험으로 전문적인 전술전략을 배우지 않고서는 조국 광복을 이룰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1919년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갔다.
지청천(池靑天 : 1888∼1959) · 리범석(李範奭 : 1900∼1972) 장군으로부터 전문적인 군사지식을 습득한 후 그 해에 상해임시정부로 가서 당시 의정원의장 이동녕(李東寧 : 1869∼1940)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 선생 앞에서 선서하고 재무부에 복무하였다.
1920년 당시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국채 판매 및 국내 지방조직의 임무를 띠고 밀파되어 국내 동지들과 접선하였다. 임무를 수행하던 중 1921년 6월 29일 서울 종로경찰서 고등계형사 삼륜(三輪)에게 체포되어 25일간 갖은 고문 끝에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당시 서대문형무소에는 천여 명의 정치범들이 수감되어 있었던 바 1923년경 구미에서 정치시찰단이 내한한다는 소식이 있자 일본은 한일병탄에 불만을 품은 인사가 없다는 것을 가장함으로써 강압정치상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중인 정치범 일부를 지방으로 분산수감하게 되어 공을 비롯하여 백여 명의 정치범들이 함흥감옥으로 이감되었다.
12월 28일 이감되자 공은 이 기회에 한민족은 한일병탄과 일본의 강압정치에 반대한다는 사실을 폭로하여 세계만방에 한민족의 억울함을 호소코자 남대문 역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경계가 심하여 한 사람도 동조하는 사람이 없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원산역까지 오게 되었다. 열차가 약 1시간 머무는 동안 공은 일어서서 “이만한 일도 실행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조국의 독립을 바라겠는가? 백명이 희생함으로써 조국이 자주독립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냐.”고 한 후 홀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자 다른 수인(囚人)들도 감격하여 만세를 부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일본 경찰이 놀라 진압하려 하므로 공은 앞으로 나아가 호송 간수장에게 “전 책임은 나 리영선에 있으니, 나 한 사람만 처벌하고 다른 사람은 처벌치 말라” 고 하였다.
그 결과 1924년 1월 4일 함흥감옥 책임자는 “당신이 한 행동은 당연히 다시 한번 재판을 받아야 하겠지만 간수장과 굳은 약속이 있었으므로 특별히 내 권한으로 다음과 같이 처벌하겠다.” 고 하면서 옥중의 옥이라고 할 수 있는 암실독방(暗室獨房)에 168시간 감금을 시키니 공은 거의 실신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간수들이 공을 감옥 병실로 옮기고자 하였으나, “인명은 재천이다. 너희놈들에게 죽을 것 같았으면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다.”고 거부하자 일반 수인실에 수감되었다. 이에 모든 수인들도 감격하여 기필코 독립투쟁 대열에 목숨을 바칠 각오를 다짐하였다.
1925년 7월 4일 감옥에서 풀려났는데, 그 때 나이 37세였다. 출옥 후 곧 장춘 · 길림 · 하얼빈 등지에서 자작농장을 창설한 후 국내에서 이주해 온 동포들의 생활을 도와주는 동시에 후세들의 교육사업에 힘썼다.
1933년 일본세력을 배경으로 한 만주국이 건국기념식을 거행하자, 공은 남자현(南慈賢 : 1872∼1933) 여사 · 문익빈(文益彬) 선생 등과 함께 기념식에 참석한 일본인 전권대사 무등(武藤)을 폭탄투하로 살해코자 계획하였으나 발각되어 1933년 2월 28일 남강서(南崗署)에 다시 체포되어 갖은 악형을 받았다. 이를 보다 못한 남자현 여사는 공이 더 큰 일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여 자기가 단독 주모자라는 것을 주장하여 5개월만에 공과 문익빈 선생은 석방되었다. 그 후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농장경영을 하는 한편 자라나는 후세들의 교육을 위하여 교육사업에 투신하여 자주독립사상을 주입시켰다. 1955년 11월 6일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셋다리부락에서 향년 67세로 별세하였다.
응희(應禧) 1579∼1651 파명:안양군(安陽君)
  응희(應禧) [1579(선조 12)∼1651(효종 2)]
자는 자수(子綏), 호는 옥담(玉潭). 안양군의 현손이며 여흥령 현(玹)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부인(愼夫人) 평산신씨이다.
1592년(선조 25) 14세 때 부친상을 당하고, 2년 후인 1594년(선조 27)에는 조모상까지 당했다. 당시 과천 남면 산내곡에 장례지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업을 이어가며 학문과 예절에 정열을 다 쏟아 원근에서 그 덕망을 칭송하였다.
광해군 때에 이이첨(李爾瞻 : 1560∼1623)이 인목대비를 폐위하고자 꾀할 때 크게 상심하여 백의항소(白衣抗疏)로 극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과천 수리산 아래에 은거하였다. 조정에서는 공의 학식이 고명함을 알고 중용하려 했으나 재삼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바에 의하면, 안양군이 연산군 때 원사(寃死)를 당하면서 유언으로 관직에 나아가지 말라고 하여 그 유훈을 따른 것이라 한다.
배위는 경주김씨로 승정원 도승지 통정대부 형조참의 위(偉)의 딸이다. 김씨는 7남 2녀를 두었는데 7형제가 모두 진사에 급제하여 주위에서는 두(斗)자 항렬이라 7두 문장가(七斗文章家)라고 칭송하였다. 공의 저술이 8백여 편이었는데 병자호란 때 방화로 모두 소실되었고, 다만 2권이 남아 보존되고 있다.
공이 58세 때인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공은 가족을 이끌고 해도(海島)로 피난하여 전전하다 2년 후 1638년 9월에 어머니가 향년 85세로 별세하였고, 공은 그 14년 후인 1651년(효종 2) 음력 5월 9일에 향년 73세로 일생을 마쳤다. 2년 후 부인도 별세하여 산내곡, 지금의 경기도 군포시 산본동 산195번지에 합장하였다.
340여 년이 지난 1993년 국가 개발정책에 의하여 선영지역이 수용되자 부득이 경기도 화성군 봉담면 상기리로 이장하여 새로운 선영을 정하였다. 이장 때 분묘에서 출토된 지석이 묵서청자(墨書靑瓷) 8판으로 되어, 공의 공적이 자세히 기록되었으며 새로운 선영에 다시 매봉(埋封)하였다.
유품에는 묘지석 7개 1벌과 <옥담유고(玉潭遺稿)> · <옥담사집(玉潭私集)>이 있다.
자는 자수(子綏), 호는 옥담(玉潭). 안양군의 현손이며 여흥령 현(玹)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부인(愼夫人) 평산신씨이다.
1592년(선조 25) 14세 때 부친상을 당하고, 2년 후인 1594년(선조 27)에는 조모상까지 당했다. 당시 과천 남면 산내곡에 장례지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업을 이어가며 학문과 예절에 정열을 다 쏟아 원근에서 그 덕망을 칭송하였다.
광해군 때에 이이첨(李爾瞻 : 1560∼1623)이 인목대비를 폐위하고자 꾀할 때 크게 상심하여 백의항소(白衣抗疏)로 극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과천 수리산 아래에 은거하였다. 조정에서는 공의 학식이 고명함을 알고 중용하려 했으나 재삼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바에 의하면, 안양군이 연산군 때 원사(寃死)를 당하면서 유언으로 관직에 나아가지 말라고 하여 그 유훈을 따른 것이라 한다.
배위는 경주김씨로 승정원 도승지 통정대부 형조참의 위(偉)의 딸이다. 김씨는 7남 2녀를 두었는데 7형제가 모두 진사에 급제하여 주위에서는 두(斗)자 항렬이라 7두 문장가(七斗文章家)라고 칭송하였다. 공의 저술이 8백여 편이었는데 병자호란 때 방화로 모두 소실되었고, 다만 2권이 남아 보존되고 있다.
공이 58세 때인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공은 가족을 이끌고 해도(海島)로 피난하여 전전하다 2년 후 1638년 9월에 어머니가 향년 85세로 별세하였고, 공은 그 14년 후인 1651년(효종 2) 음력 5월 9일에 향년 73세로 일생을 마쳤다. 2년 후 부인도 별세하여 산내곡, 지금의 경기도 군포시 산본동 산195번지에 합장하였다.
340여 년이 지난 1993년 국가 개발정책에 의하여 선영지역이 수용되자 부득이 경기도 화성군 봉담면 상기리로 이장하여 새로운 선영을 정하였다. 이장 때 분묘에서 출토된 지석이 묵서청자(墨書靑瓷) 8판으로 되어, 공의 공적이 자세히 기록되었으며 새로운 선영에 다시 매봉(埋封)하였다.
유품에는 묘지석 7개 1벌과 <옥담유고(玉潭遺稿)> · <옥담사집(玉潭私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