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8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경중(敬中) 1542∼1548 파명:담양군(潭陽君)
경중(敬中) [1542(중종 37)∼1548(선조 17)]
자는 공직(公直), 호는 단애(丹崖). 1568년(선조 1) 사마에 합격하고 1570년(선조 3)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혀 들어갔다. 1574년(선조 7) 홍문관 정자(正字)가 되었는데, 이 때에 미암(眉岩) 류희춘(柳希春)은 부제학으로 있었고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직제학, 회계(懷溪) 오건(吳健)은 전한(典翰), 동강(東岡) 김우현(金宇顯)은 수찬(修撰), 홍적(洪迪)은 저작(著作)으로 있었으니 홍문관에 현인들이 다 모였다고 사람들이 말하였다. 1576년(선조 9)에 수찬을 지내고 이듬해에 교리(校理)로, 또 다음 해 전적(典籍)이 되었다가 병조좌랑 · 정언(正言)이 되었다. 이 때 리양(李樑)의 관작을 삭탈하라고 주장하였고 또 삼윤(尹斗壽 · 尹根壽 · 尹睍)의 발령을 환수하라고 청하였다.
1579년(선조 12)에 예조좌랑이 되었다가 이듬해에 이조좌랑이 되었다. 이 때 율곡이 상소를 올리자 삼사에서 논박이 대단하였다. 서애가 공을 보고 말하기를 “공은 삼사를 떠나 이조로 갔으니 젖은 옷을 벗은 것 같겠다.”고 하였다. 1581년(선조 14) 정여립이 이조좌랑으로 천거되자 공이 반대하자 사간원에서 마침내 공에게 죄를 주어 체직시켰다.
1584년(선조 17) 교리로 임명되었다가 다시 응교로 옮겼고, 얼마 후에 집의(執義)로 있다가 사직하고 그 해 8월에 경상도 추쇄어사가 되었다. 그 때 공은 이미 신병을 얻었지만 명을 받고 민원(民怨)을 수습하고자 출발, 영남 밀양에서 별세하니 43세였다.
그 해 파평으로 귀장하였는데 충문공 류서애가 공을 위해 제문을 지었다.
“밝은 마음씨 어두울 수 없고 정성스런 충성은 속일 수 없으며 화기(和氣)한 정의는 흔들릴 수 없다. 공은 평생에 희롱과 아부가 없이 결백하여 벼슬이 높았어도 처자는 항상 빈고를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논의가 정직하여 집권자들이 사사로운 뜻을 품었어도 감히 방자하지 못하였다. 그대의 지기(知己)를 찾는다면 나 아니고 또 누가 있으랴. 그대의 착한 행실 찾으려면 좌우에 모두 마땅하였네. 돈독한 효우(孝友)는 붕우간에 믿음을 받았고 일을 당하면 심력을 다하여 비뚤게 남을 따르지 아니하니 실로 옛사람들도 그렇게 하기는 어려웠던 바라, 그대는 모두를 갖추어 결함이 없다.”
또한 공은 백씨인 파곡 성중, 계씨인 승지 양중과 함께 옥당에 들어갔으니 온 세상이 부러워하였다. 또 이소재(履素齋) 리중호와 더불어 김척암(金쾩菴)의 문하에 들어 류서애(柳西厓) · 우추연(禹秋淵) · 김동강(金東岡) 등과 도의(道義)의 친교를 맺었다. 또한 성암(省菴) 김효원(金孝元), 첨정(僉正) 조린(趙폸)과는 동갑이며 한 마을에 살아 서로 우정이 두터웠다. 당시 사람들이 그들에 관하여 말하기를 “리경중은 설월같이 빛나고 김효원은 백옥같이 티가 없으며, 조린은 봄바람처럼 얼음을 녹였다.”라고 하였다. 기축사화가 일어나서 정여립이 패사(敗死)하니 임금이 연신(筵臣)들에게 묻기를 “정여립의 흉모를 알아챈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으니 사람 안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냐?” 그러자 류성룡이 대답하기를 “신의 망우(亡友) 중에 리경중이라는 사람이 일찍이 정여립을 등용하면 안된다고 말하였다가 도리어 배척을 받아 고생만 하다가 죽었나이다.”하였다. 임금이 “리경중을 배척한 사람은 누구인고?”라고 물었다. 류성룡이 대답하되 “세월이 오래 되어 신은 잊었습니다. 사관에게 물으시면 알 겁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은 사관을 통해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과 지평(持平) 박광옥(朴光玉)임을 알게 되고 즉석에서 이들의 관작을 삭탈하라 명하고 공에게는 특별히 이조참판의 증직을 내렸다. 공이 평소에 삼정(三鄭)과 사귀지 못한다는 비평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 그들을 용납치 못하였음이라, 그 때 정(鄭)이 보기 싫어 한쪽 눈은 감은 채 한눈만 뜨고 보았다는 말이 있다.
배위 정부인(貞夫人) 배천조씨는 충청도 병마우후(兵馬虞候) 언공(彦公)의 딸로 지성스러운 덕행이 있었다. 공이 별세하자 3년 동안 한결같이 초상 때와 같이 곡을 하였고 6년간이나 머리를 빗질하지 않았다. 1589년(선조 22)이 지나서 벼슬을 추봉하고 제사를 지낼 때에야 비로소 머리 감고 재계를 올렸다 한다.
두 아들의 교육은 반드시 의로운 방도로 가르쳐 두 아들이 모두 행실을 닦고 이름을 세웠으니, 모두가 다 부인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정부인 배천조씨는 1608년(선조 41) 12월 22일, 향년 64세로 별세했다. 공과 동원(同原)에 부장하였다. 아들 유혼(幼渾)은 순창군수(淳昌郡守)를 역임하였고, 유순(幼淳)은 의금부도사를 지냈다.
자는 공직(公直), 호는 단애(丹崖). 1568년(선조 1) 사마에 합격하고 1570년(선조 3)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혀 들어갔다. 1574년(선조 7) 홍문관 정자(正字)가 되었는데, 이 때에 미암(眉岩) 류희춘(柳希春)은 부제학으로 있었고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직제학, 회계(懷溪) 오건(吳健)은 전한(典翰), 동강(東岡) 김우현(金宇顯)은 수찬(修撰), 홍적(洪迪)은 저작(著作)으로 있었으니 홍문관에 현인들이 다 모였다고 사람들이 말하였다. 1576년(선조 9)에 수찬을 지내고 이듬해에 교리(校理)로, 또 다음 해 전적(典籍)이 되었다가 병조좌랑 · 정언(正言)이 되었다. 이 때 리양(李樑)의 관작을 삭탈하라고 주장하였고 또 삼윤(尹斗壽 · 尹根壽 · 尹睍)의 발령을 환수하라고 청하였다.
1579년(선조 12)에 예조좌랑이 되었다가 이듬해에 이조좌랑이 되었다. 이 때 율곡이 상소를 올리자 삼사에서 논박이 대단하였다. 서애가 공을 보고 말하기를 “공은 삼사를 떠나 이조로 갔으니 젖은 옷을 벗은 것 같겠다.”고 하였다. 1581년(선조 14) 정여립이 이조좌랑으로 천거되자 공이 반대하자 사간원에서 마침내 공에게 죄를 주어 체직시켰다.
1584년(선조 17) 교리로 임명되었다가 다시 응교로 옮겼고, 얼마 후에 집의(執義)로 있다가 사직하고 그 해 8월에 경상도 추쇄어사가 되었다. 그 때 공은 이미 신병을 얻었지만 명을 받고 민원(民怨)을 수습하고자 출발, 영남 밀양에서 별세하니 43세였다.
그 해 파평으로 귀장하였는데 충문공 류서애가 공을 위해 제문을 지었다.
“밝은 마음씨 어두울 수 없고 정성스런 충성은 속일 수 없으며 화기(和氣)한 정의는 흔들릴 수 없다. 공은 평생에 희롱과 아부가 없이 결백하여 벼슬이 높았어도 처자는 항상 빈고를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논의가 정직하여 집권자들이 사사로운 뜻을 품었어도 감히 방자하지 못하였다. 그대의 지기(知己)를 찾는다면 나 아니고 또 누가 있으랴. 그대의 착한 행실 찾으려면 좌우에 모두 마땅하였네. 돈독한 효우(孝友)는 붕우간에 믿음을 받았고 일을 당하면 심력을 다하여 비뚤게 남을 따르지 아니하니 실로 옛사람들도 그렇게 하기는 어려웠던 바라, 그대는 모두를 갖추어 결함이 없다.”
또한 공은 백씨인 파곡 성중, 계씨인 승지 양중과 함께 옥당에 들어갔으니 온 세상이 부러워하였다. 또 이소재(履素齋) 리중호와 더불어 김척암(金쾩菴)의 문하에 들어 류서애(柳西厓) · 우추연(禹秋淵) · 김동강(金東岡) 등과 도의(道義)의 친교를 맺었다. 또한 성암(省菴) 김효원(金孝元), 첨정(僉正) 조린(趙폸)과는 동갑이며 한 마을에 살아 서로 우정이 두터웠다. 당시 사람들이 그들에 관하여 말하기를 “리경중은 설월같이 빛나고 김효원은 백옥같이 티가 없으며, 조린은 봄바람처럼 얼음을 녹였다.”라고 하였다. 기축사화가 일어나서 정여립이 패사(敗死)하니 임금이 연신(筵臣)들에게 묻기를 “정여립의 흉모를 알아챈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으니 사람 안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냐?” 그러자 류성룡이 대답하기를 “신의 망우(亡友) 중에 리경중이라는 사람이 일찍이 정여립을 등용하면 안된다고 말하였다가 도리어 배척을 받아 고생만 하다가 죽었나이다.”하였다. 임금이 “리경중을 배척한 사람은 누구인고?”라고 물었다. 류성룡이 대답하되 “세월이 오래 되어 신은 잊었습니다. 사관에게 물으시면 알 겁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은 사관을 통해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과 지평(持平) 박광옥(朴光玉)임을 알게 되고 즉석에서 이들의 관작을 삭탈하라 명하고 공에게는 특별히 이조참판의 증직을 내렸다. 공이 평소에 삼정(三鄭)과 사귀지 못한다는 비평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 그들을 용납치 못하였음이라, 그 때 정(鄭)이 보기 싫어 한쪽 눈은 감은 채 한눈만 뜨고 보았다는 말이 있다.
배위 정부인(貞夫人) 배천조씨는 충청도 병마우후(兵馬虞候) 언공(彦公)의 딸로 지성스러운 덕행이 있었다. 공이 별세하자 3년 동안 한결같이 초상 때와 같이 곡을 하였고 6년간이나 머리를 빗질하지 않았다. 1589년(선조 22)이 지나서 벼슬을 추봉하고 제사를 지낼 때에야 비로소 머리 감고 재계를 올렸다 한다.
두 아들의 교육은 반드시 의로운 방도로 가르쳐 두 아들이 모두 행실을 닦고 이름을 세웠으니, 모두가 다 부인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정부인 배천조씨는 1608년(선조 41) 12월 22일, 향년 64세로 별세했다. 공과 동원(同原)에 부장하였다. 아들 유혼(幼渾)은 순창군수(淳昌郡守)를 역임하였고, 유순(幼淳)은 의금부도사를 지냈다.
명웅(命雄) 1590∼1642 파명:담양군(潭陽君)
명필(命弼) 1601∼1627 파명:담양군(潭陽君)
성중(誠中) 1539∼1593 파명:담양군(潭陽君)
시중(時中) 1553∼1631 파명:담양군(潭陽君)
유수(幼洙) 1591∼1656 파명:담양군(潭陽君)
유징(幼澄) 1562∼1593 파명:담양군(潭陽君)
헌경(獻慶) 1719∼1791 파명:담양군(潭陽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