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응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5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민곤(敏坤) 1695∼1756 파명:영응대군(永膺大君)
  민곤(敏坤) [1695(숙종 21)∼1756(영조 32)]
자는 후이(厚而), 호는 임은(林隱). 대군의 9대손이며 수성수의 6대손이다.
아버지는 헌기(軒紀)이며, 어머니는 능성구씨로 환(奐)의 딸이다. 1718년 박필주(朴弼周)에게 사사하였고, 그 뒤 김한간(金翰幹) · 이재(李縡)의 문하에도 출입하였으며, <오자근사록변(五子近思錄辨)> 등을 저술하여 학계의 중망(重望)을 받았다. 1727년(영조 3) 사마시에 합격하고, 1735년 문과에 급제한 뒤 승정원의 주서가 되었다. 이어 사헌부의 지평이 되어 경연(經筵)에 나아가 의리를 밝히고 언로를 개척하게 하였다. 그 뒤 시임(時任) 정승을 탄핵하다가 삭직되었다. 1746년 다시 보령현감이 되어서는 <황극연의(皇極衍義)>를 지어 왕에게 바쳐서 왕도정치를 촉구하였다. 1755년 사간이 되었을 때 이천보(李天輔)를 탄핵하다가 귀양가는 조종보(趙宗溥)를 신원하는 상소를 올려, 언로를 막는 것은 망국의 근본이라 직간하다가 거제로 귀양갔다. 그 해 다시 풀려나 시강원의 보덕으로 승진되었고, 다시 사헌부의 집의와 사간에 임명되었다. 이 때 강도유수(江都留守)의 독직사건이 있어 이를 논핵하다가 육진(六鎭)으로 귀양가던 도중 금성(金城) 창도역(昌道驛)의 숙소가 불탈 때 타죽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귀양을 풀고 관직을 회복, 도승지에 추증하였다. 저서로는 <임은집>이 있다.배위는 숙부인 풍양조씨로 양보(良輔)의 딸과 숙부인 청주정씨로 일(鎰)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연천군 관인면 부곡리 자좌이다.
자는 후이(厚而), 호는 임은(林隱). 대군의 9대손이며 수성수의 6대손이다.
아버지는 헌기(軒紀)이며, 어머니는 능성구씨로 환(奐)의 딸이다. 1718년 박필주(朴弼周)에게 사사하였고, 그 뒤 김한간(金翰幹) · 이재(李縡)의 문하에도 출입하였으며, <오자근사록변(五子近思錄辨)> 등을 저술하여 학계의 중망(重望)을 받았다. 1727년(영조 3) 사마시에 합격하고, 1735년 문과에 급제한 뒤 승정원의 주서가 되었다. 이어 사헌부의 지평이 되어 경연(經筵)에 나아가 의리를 밝히고 언로를 개척하게 하였다. 그 뒤 시임(時任) 정승을 탄핵하다가 삭직되었다. 1746년 다시 보령현감이 되어서는 <황극연의(皇極衍義)>를 지어 왕에게 바쳐서 왕도정치를 촉구하였다. 1755년 사간이 되었을 때 이천보(李天輔)를 탄핵하다가 귀양가는 조종보(趙宗溥)를 신원하는 상소를 올려, 언로를 막는 것은 망국의 근본이라 직간하다가 거제로 귀양갔다. 그 해 다시 풀려나 시강원의 보덕으로 승진되었고, 다시 사헌부의 집의와 사간에 임명되었다. 이 때 강도유수(江都留守)의 독직사건이 있어 이를 논핵하다가 육진(六鎭)으로 귀양가던 도중 금성(金城) 창도역(昌道驛)의 숙소가 불탈 때 타죽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귀양을 풀고 관직을 회복, 도승지에 추증하였다. 저서로는 <임은집>이 있다.배위는 숙부인 풍양조씨로 양보(良輔)의 딸과 숙부인 청주정씨로 일(鎰)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연천군 관인면 부곡리 자좌이다.
빈(빈) 1550∼1610 파명:영응대군(永膺大君)
  빈(빈) [1550(명종 5)∼1610(광해군 2)]
자는 방숙(芳叔), 호는 의곡(義谷)으로 대군의 증손이고 흥고부수(興古副守) 경천(敬千)의 둘째 아들로 1579(선조 12)년 사인 동벽(東壁)으로 의주 몽진에 호종을 하였고, 1596(선조 29)년 여산군수로 제수되어 이몽학의 반란 평정에 공헌했으며, 1598(선조 31)년 사복시 첨정 승무원 판교, 1599년 예조좌랑 충청도사(忠淸都事), 1600(선조 33)년 군기시 첨정 행춘추관 편수관이 되었고 1604년(선조 37)년 호성(扈聖), 청난(淸難) 원종공신에 채록되고, 1605(선조 33)년 고양군수가 되어 선치(善治)를 해서, 1608년 합천군수로 택인 차사에 제수되었다가 마침 아버이 춘추가 팔순이 넘은 까닭에 내직으로 들어와서 사성 부교리가 되었다.
1610(광해 2)년 가선대부 행 예조참판 겸 동지경연의금부사 세자좌부빈객이 되어 동년 10월 향년 61세로 졸했다. 그전 1608년 광해군의 세자책봉에 공이 있어 1613(광해 5)년 정운(定運) 원종공신으로 책록되었고 1619(광해 11)년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세자이사(世子貳師)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 대제학에 증직되었다.
배위는 정경부인 충주지씨와 정경부인 회덕황씨이다.
묘소는 광주군 의일면 갈산 건좌에서 1975년 칠곡군 선적면 남율동 선영하에 손좌로 이장하여 양배위와 합펌했다.
자는 방숙(芳叔), 호는 의곡(義谷)으로 대군의 증손이고 흥고부수(興古副守) 경천(敬千)의 둘째 아들로 1579(선조 12)년 사인 동벽(東壁)으로 의주 몽진에 호종을 하였고, 1596(선조 29)년 여산군수로 제수되어 이몽학의 반란 평정에 공헌했으며, 1598(선조 31)년 사복시 첨정 승무원 판교, 1599년 예조좌랑 충청도사(忠淸都事), 1600(선조 33)년 군기시 첨정 행춘추관 편수관이 되었고 1604년(선조 37)년 호성(扈聖), 청난(淸難) 원종공신에 채록되고, 1605(선조 33)년 고양군수가 되어 선치(善治)를 해서, 1608년 합천군수로 택인 차사에 제수되었다가 마침 아버이 춘추가 팔순이 넘은 까닭에 내직으로 들어와서 사성 부교리가 되었다.
1610(광해 2)년 가선대부 행 예조참판 겸 동지경연의금부사 세자좌부빈객이 되어 동년 10월 향년 61세로 졸했다. 그전 1608년 광해군의 세자책봉에 공이 있어 1613(광해 5)년 정운(定運) 원종공신으로 책록되었고 1619(광해 11)년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세자이사(世子貳師)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 대제학에 증직되었다.
배위는 정경부인 충주지씨와 정경부인 회덕황씨이다.
묘소는 광주군 의일면 갈산 건좌에서 1975년 칠곡군 선적면 남율동 선영하에 손좌로 이장하여 양배위와 합펌했다.
사겸(士謙) 1654∼1725 파명:영응대군(永膺大君)
  사겸(士謙) [1654(효종 5)∼1725(영조 1)]
자는 양숙(讓叔), 호는 봉산(鳳山). 대군의 8대손이며 의춘부수의 5대손으로 후익(後益)의 아들이다.
가선대부 이조참의를 지냈다.
배위는 정부인 함안조씨로 사인 유(游)의 딸이다.
묘소는 경남 진주시 미천면 향양리 장죽동 봉황산 유좌이며 정부인 함안조씨의 묘소는 진주시 진성면 대사리 백암 저수지에 있다.
자는 양숙(讓叔), 호는 봉산(鳳山). 대군의 8대손이며 의춘부수의 5대손으로 후익(後益)의 아들이다.
가선대부 이조참의를 지냈다.
배위는 정부인 함안조씨로 사인 유(游)의 딸이다.
묘소는 경남 진주시 미천면 향양리 장죽동 봉황산 유좌이며 정부인 함안조씨의 묘소는 진주시 진성면 대사리 백암 저수지에 있다.
인우(仁祐) 1566∼1627 파명:영응대군(永膺大君)
  인우(仁祐) [1566(명종 21)∼1627(인조 5)]
자는 덕응(德應), 호는 진산(晋山). 의춘부수의 계자이며 생부는 경종(敬終)이다.
가선대부 예조참판을 역임했으며, 1627년(인조 5) 향년 62세로 별세했다. 배위는 정부인 진주정씨로 어모장군 만호 순평(順平)의 딸과 정부인 진주정씨로 순상(順祥)의 딸이다.
묘소는 경남 진주시 진성면 대치리 백암곡내 해좌이며 배위와 합폄이다.
자는 덕응(德應), 호는 진산(晋山). 의춘부수의 계자이며 생부는 경종(敬終)이다.
가선대부 예조참판을 역임했으며, 1627년(인조 5) 향년 62세로 별세했다. 배위는 정부인 진주정씨로 어모장군 만호 순평(順平)의 딸과 정부인 진주정씨로 순상(順祥)의 딸이다.
묘소는 경남 진주시 진성면 대치리 백암곡내 해좌이며 배위와 합폄이다.
정필(廷弼) 1587∼1660 파명:영응대군(永膺大君)
  정필(廷弼) [1587(선조 20)∼1660(현종 1)]
자는 칠흠(七欽), 호는 청천(菁川). 대군의 6대손이며 의춘부수의 3대손이다. 가선대부 경상
우도 병마절도사 진주병사를 역임했다.
묘소는 경남 진주시 진성면 온수동 구산 10번지 신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파평윤씨로 군수 홍명(弘鳴)의 딸이. 슬하에 재(材) 1남을 두었다.
자는 칠흠(七欽), 호는 청천(菁川). 대군의 6대손이며 의춘부수의 3대손이다. 가선대부 경상
우도 병마절도사 진주병사를 역임했다.
묘소는 경남 진주시 진성면 온수동 구산 10번지 신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파평윤씨로 군수 홍명(弘鳴)의 딸이. 슬하에 재(材) 1남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