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천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25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건방(建芳) 1861∼1939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춘세(春世), 호는 난곡(蘭谷). 초원 충익(忠翊)의 현손이고 면백(勉伯)의 증손이다. 사기공 시원(是遠)과 함께 병인양요 때 자결한 지원(止遠)의 손자이며 상기(象夔)의 아들이다. 생부는 상만(象曼)이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서 경전을 비롯한 여러 서적을 배웠는데, 어려서는 특히 <수호전(水滸傳)>을 좋아하였다. 처음에는 주자학을 공부하다가 성장하면서 정명도와 왕양명을 깊이 연구했다. 중부의 후사로 간 지 얼마 안되어 생부 또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어려운 살림으로 양가의 홀어머니를 모시느라 과거를 볼 겨를이 없었으므로 1885년(고종 22)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곧 돌아왔다. 이 때 조정에서 문장으로 이름을 날리던 종형 건창이 자기와 같이 활동할 것을 권하였으나 늙은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1894년 이후에는 가족을 이끌고 서울에 돌아와 <원사(原士)>를 지어 산림에 남아 있는 선비를 기롱하고, 학문을 새롭게 하고자 다짐하였다. 문장에 능하였으며, 제자로 위당 정인보(鄭寅普) 등이 있다. 저서로는 <난곡존고(蘭谷存藁)> 13권이 있다.
배위는 평택임씨 감역 희근(喜根)의 딸이다.
묘소는 서울 동작구 사당동 작현에 있는데 위당 정인보가 비문을 짓고 썼다.
상경(象敬) [1799(정조 23)∼1832(순조 32)]
자는 원직(元直) 또는 직부(直夫), 호는 동애(東崖). 경석(景奭)의 8대손이며 면구(勉求)의 손자이고 준원(駿遠)의 아들이다. 1828년(순조 28) 진사시 3등에 급제하고, 1829년(순조 29) 정시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교리(校理)를 지냈다.
배위는 동래정씨 참봉 동윤(東胤)의 딸이다.
묘소는 양주군 주내면 광양리에 있다.
배위는 평택임씨 감역 희근(喜根)의 딸이다.
묘소는 서울 동작구 사당동 작현에 있는데 위당 정인보가 비문을 짓고 썼다.
상경(象敬) [1799(정조 23)∼1832(순조 32)]
자는 원직(元直) 또는 직부(直夫), 호는 동애(東崖). 경석(景奭)의 8대손이며 면구(勉求)의 손자이고 준원(駿遠)의 아들이다. 1828년(순조 28) 진사시 3등에 급제하고, 1829년(순조 29) 정시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교리(校理)를 지냈다.
배위는 동래정씨 참봉 동윤(東胤)의 딸이다.
묘소는 양주군 주내면 광양리에 있다.
건승(建昇) 1858∼1924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보경(保卿), 호는 경재(耕齋). 시원(是遠)의 손자이며 건창의 아우이다. 진사에 급제하여 주사(主事)를 지냈으며 학행이 뛰어난 의사(義士)이다. 유고로 <경재집(耕齋集)>이 있다.
배위는 동래정씨 도정 만기(晩基)의 딸이다.
묘소는 인천시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에 있다.
배위는 동래정씨 도정 만기(晩基)의 딸이다.
묘소는 인천시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에 있다.
건창(建昌) 1852∼1898 파명:덕천군(德泉君)
  아명은 송열(松悅), 자는 봉조(鳳朝 · 鳳藻), 호는 영재(寧齋) 혹은 명미당(明美堂). 이조판서 시원의 손자이며 증 이조참판 상학(象學)의 아들이다. 강화 출신으로서 조부가 개성유수로 재직할 때 유수 관아에서 태어나 출생지는 개성이나 선대부터 강화에 살았다. 조부로부터 충의와 문학을 바탕으로 한 가학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5세에 문장을 구사할 만큼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장성한 뒤에는 모든 공사(公私) 생활에서 조부의 영향을 받았다. 강위(姜瑋) · 김택영(金澤榮) · 황현(黃玹)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용모가 청수(淸秀)하였으며, 천성이 강직하여 부정불의를 보면 추호도 용납하지 않고 친척 · 지구(知舊) ·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처단하였다. 일반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의례적인 의식이나 양보가 없이 소신대로 피력하는 성격이었으므로 인심 포섭에는 도리어 결점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정사를 처리하는 과정에서의 지나친 충간과 냉철 일변도의 자세가 벼슬길에 많은 지장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1866년(고종 3) 15세의 어린 나이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너무 일찍 등과하였기 때문에 19세에 이르러서야 홍문관직에 벼슬을 받았다. 1874년(고종 11) 23세 때 서장관으로 발탁되어 청나라에 가서 그곳의 문장가 황각(黃珏) · 장가양(張家쵃) · 서부(徐?) 등과 교유, 이름을 떨쳤다. 이듬해 충청우도 암행어사가 되어 충청감사 조병식(趙秉式)의 비행을 낱낱이 들춰내다가 도리어 모함을 받아 벽동(碧潼)으로 유배되었고, 1년이 지나서 풀려났다. 공사(公事)에 성의를 다하다가 도리어 당국자의 미움을 사 귀양까지 갔으며 그 뒤 벼슬에 뜻을 두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임금이 친서로 “내가 그대를 아니 전과 같이 잘하라”는 간곡한 부름에 못이겨 1880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서 관리들의 비행을 파헤치는가 하면, 흉년을 당한 농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식량문제 등 구휼에 힘썼다. 한편 세금을 감면하여 주기도 하여 백성들로부터 환심을 얻어 그의 불망비가 각처에 세워졌다. 그 뒤 부모상을 당하여 6년간 집상을 마치고 1890년 한성부 소윤이 되었다.
당시 나라 안에 거류하는 청국인과 일본인들이 우리 백성들의 가옥이나 토지를 마구 사들여 방관하는 사이에 그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그들이 소유권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온갖 문제를 일으킬 것에 대비, 시급히 국법을 마련하여 국민들이 부동산을 외국인에게 팔아넘기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실시하여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그때 우리 나라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홍장의 부하인 청국공사 당소의(唐紹儀)가 한성소윤의 상소 내용을 알고 화가 나서 공한으로 청국 사람과 가옥이나 토지 매도를 금한다는 조항이 조약상에 없는데 왜 금지조치를 하려는가라고 항의하였다. 이에 공은 “우리가 우리 국민에게 금지시키는 것인데 조약이 무슨 상관인가?”라고 일축하였다. 그러자 당소의는 이홍장의 항의를 빙자하여 우리 정부에 압력을 가함으로써 금지령을 내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공은 단념하지 않고, 외국인에게 부동산을 판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다른 죄목으로써 토죄하고 가중처벌을 하였으므로, 이러한 기미를 알아차린 백성들이 감히 외국과 매매를 못하게 되니, 청국인들도 하는 수 없이 매수계획을 포기하게 되었다.
1891년 승지가 되었고 다음 해 상소사건으로 보성(寶城)에 재차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893년 함흥부의 난민을 다스리기 위하여 안핵사로 파견되어 그곳에서 관찰사의 죄상을 명백하게 가려내어 파면시켰다. 임금도 지방관을 보낼 때에 “그대가 가서 잘못하면 리건창이 가게 될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공사를 집행하는 공의 자세는 완강하고 당당하였다. 갑오개혁 이후로 새로운 관제에 의한 각부의 협판(協辦) · 특진관(特進官)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거절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896년 해주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극구 사양하다가 마침내 고군산도(古群山島)로 세 번째 유배되었다가 특지(特旨)로 2개월이 지난 뒤에 풀려났다. 그 뒤 향리인 강화에 내려가서 서울과는 발길을 끊고 지내다가 2년 뒤에 47세로 세상을 떠났다.
공의 저서 <당의통략(黨議通略)>은 파당을 초월하고 족친을 초월하여 공정한 입장에서 붕당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기술한 명저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원래 그의 문필은 송대의 대가인 증공 왕안석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정제두가 양명학의 지행합일의 학풍을 세운 이른바 강화학파의 학문태도를 교훈받고 실천하였다. 한말의 대문장가요 대시인인 김택영이 우리 나라 역대의 문장가를 추숭할 때에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라 하여 아홉 사람을 선정하면서 그 최후의 사람으로 공을 꼽은 것을 보면, 당대의 문장가라기보다 우리 나라 전대(全代)를 통하여 몇 안되는 대문장가의 한 사람임에 손색이 없을 듯하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성품이 매우 곧아 병인양요 때에 강화에서 자결한 조부의 유지를 받들어 개화를 뿌리치고 철저한 척양척왜주의자로 일관하였다. <명미당집(明美堂集)> 12권, <당의통략> 2권 외에 <유독수기(有讀隨記)> 1권, <미제록(未濟錄)> 1권이 있다. 강화 사기리에 `수의사(繡衣使) 리건창 영세불망비\'가 있다.
배위는 대구서씨 현감 장순(長淳)의 딸과 결성장씨 인근(仁根)의 딸이다.
묘소는 인천시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에 있다.
1866년(고종 3) 15세의 어린 나이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너무 일찍 등과하였기 때문에 19세에 이르러서야 홍문관직에 벼슬을 받았다. 1874년(고종 11) 23세 때 서장관으로 발탁되어 청나라에 가서 그곳의 문장가 황각(黃珏) · 장가양(張家쵃) · 서부(徐?) 등과 교유, 이름을 떨쳤다. 이듬해 충청우도 암행어사가 되어 충청감사 조병식(趙秉式)의 비행을 낱낱이 들춰내다가 도리어 모함을 받아 벽동(碧潼)으로 유배되었고, 1년이 지나서 풀려났다. 공사(公事)에 성의를 다하다가 도리어 당국자의 미움을 사 귀양까지 갔으며 그 뒤 벼슬에 뜻을 두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임금이 친서로 “내가 그대를 아니 전과 같이 잘하라”는 간곡한 부름에 못이겨 1880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서 관리들의 비행을 파헤치는가 하면, 흉년을 당한 농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식량문제 등 구휼에 힘썼다. 한편 세금을 감면하여 주기도 하여 백성들로부터 환심을 얻어 그의 불망비가 각처에 세워졌다. 그 뒤 부모상을 당하여 6년간 집상을 마치고 1890년 한성부 소윤이 되었다.
당시 나라 안에 거류하는 청국인과 일본인들이 우리 백성들의 가옥이나 토지를 마구 사들여 방관하는 사이에 그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그들이 소유권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온갖 문제를 일으킬 것에 대비, 시급히 국법을 마련하여 국민들이 부동산을 외국인에게 팔아넘기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실시하여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그때 우리 나라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홍장의 부하인 청국공사 당소의(唐紹儀)가 한성소윤의 상소 내용을 알고 화가 나서 공한으로 청국 사람과 가옥이나 토지 매도를 금한다는 조항이 조약상에 없는데 왜 금지조치를 하려는가라고 항의하였다. 이에 공은 “우리가 우리 국민에게 금지시키는 것인데 조약이 무슨 상관인가?”라고 일축하였다. 그러자 당소의는 이홍장의 항의를 빙자하여 우리 정부에 압력을 가함으로써 금지령을 내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공은 단념하지 않고, 외국인에게 부동산을 판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다른 죄목으로써 토죄하고 가중처벌을 하였으므로, 이러한 기미를 알아차린 백성들이 감히 외국과 매매를 못하게 되니, 청국인들도 하는 수 없이 매수계획을 포기하게 되었다.
1891년 승지가 되었고 다음 해 상소사건으로 보성(寶城)에 재차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893년 함흥부의 난민을 다스리기 위하여 안핵사로 파견되어 그곳에서 관찰사의 죄상을 명백하게 가려내어 파면시켰다. 임금도 지방관을 보낼 때에 “그대가 가서 잘못하면 리건창이 가게 될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공사를 집행하는 공의 자세는 완강하고 당당하였다. 갑오개혁 이후로 새로운 관제에 의한 각부의 협판(協辦) · 특진관(特進官)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거절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896년 해주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극구 사양하다가 마침내 고군산도(古群山島)로 세 번째 유배되었다가 특지(特旨)로 2개월이 지난 뒤에 풀려났다. 그 뒤 향리인 강화에 내려가서 서울과는 발길을 끊고 지내다가 2년 뒤에 47세로 세상을 떠났다.
공의 저서 <당의통략(黨議通略)>은 파당을 초월하고 족친을 초월하여 공정한 입장에서 붕당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기술한 명저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원래 그의 문필은 송대의 대가인 증공 왕안석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정제두가 양명학의 지행합일의 학풍을 세운 이른바 강화학파의 학문태도를 교훈받고 실천하였다. 한말의 대문장가요 대시인인 김택영이 우리 나라 역대의 문장가를 추숭할 때에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라 하여 아홉 사람을 선정하면서 그 최후의 사람으로 공을 꼽은 것을 보면, 당대의 문장가라기보다 우리 나라 전대(全代)를 통하여 몇 안되는 대문장가의 한 사람임에 손색이 없을 듯하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성품이 매우 곧아 병인양요 때에 강화에서 자결한 조부의 유지를 받들어 개화를 뿌리치고 철저한 척양척왜주의자로 일관하였다. <명미당집(明美堂集)> 12권, <당의통략> 2권 외에 <유독수기(有讀隨記)> 1권, <미제록(未濟錄)> 1권이 있다. 강화 사기리에 `수의사(繡衣使) 리건창 영세불망비\'가 있다.
배위는 대구서씨 현감 장순(長淳)의 딸과 결성장씨 인근(仁根)의 딸이다.
묘소는 인천시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에 있다.
건필(建弼) 1820∼1873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우경(右卿), 호는 석범(石帆). 면수(勉修)의 증손이며 상두(象斗)의 차남이다. 1846년(헌종 12) 진사시에 3등으로 급제하고, 1849년(헌종 15)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858년(철종 9) 평안도 청북 암행어사가 되었고 1863년 제주 안핵사를 거쳐 1865년(고종 2) 의주 부윤에 이르렀다. 글씨가 뛰어났으며, 안변 석왕사와 묘향산 극락전의 향산운사(香山雲舍) · 서래각(西來閣), 청허영각(淸虛影閣) 등의 편액을 썼다. 그림에도 능하여 일찍이 <강자기상(姜慈?像)>을 그렸는데 추사 김정희는 “등불 아래 그린 얼굴 광대뼈 우뚝하고 새파란 눈동자에 눈썹 수염 갖추었네. 비바람 꺼림없이 나고 들기 만족하니 천년 전 소동파의 `입극도(笠짡圖)\'가 생각나네.”라고 하여 공의 초상화가 소동파에 비길 만큼 훌륭하다고 칭찬하고 있다. 공의 유작 중 <화조도(花鳥圖)>는 필치가 우아하면서도 강건하고 새의 모습이 절묘하게 묘사되어 있다. <관마인물도(觀馬人物圖)>는 건국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배위는 평산신씨 현감 명조(命藻)의 딸과 남양홍씨 동돈녕 병윤(秉淵)의 딸이다.
묘소는 광주군 반곡 사좌에 있다.
배위는 평산신씨 현감 명조(命藻)의 딸과 남양홍씨 동돈녕 병윤(秉淵)의 딸이다.
묘소는 광주군 반곡 사좌에 있다.
경민(景閔) 1582∼1623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효원(孝源), 함풍군의 증손이며 유서(惟恕)의 아들이다. 학문과 효행이 뛰어나 왕이 특별히 언관직(言官職)을 주었다. 남대(南臺)라고도 부르고 또는 숨은 학자라 하여 은일(隱逸)이라고도 불렀다. 집의(執義)로 추증되었다.
배위는 양성이씨 지평 인백(仁伯)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광석리 신좌에 있다.
배위는 양성이씨 지평 인백(仁伯)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광석리 신좌에 있다.
경석(景奭) 1595∼1671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상보(尙輔), 호는 백헌(白軒). 덕천군 후생의 6대손이며 함풍군의 증손이고 동지중추부사 유간의 아들이다. 사계(沙溪) 김장생의 문인이다.
1613년(광해군 5)에 진사가 되었고 1623년(인조 1)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이듬해 주서(注書)·대교(待敎)를 지냈다. 1626년(인조 4) 문과 중시에 장원한 후 사가독서하였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는 부제학으로서 삼전도(三田渡)의 비문을 찬진(撰進)하였다. 대제학 ·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1642년(인조 20)에는 세자이사(世子貳師)로서 김상헌과 함께 척화신으로 심양에 잡혀가 1년간 봉황성에 구금되었다. 돌아와서는 대사헌 · 이조판서를 지냈고, 1645년(인조 23)에는 우의정이 되었다. 이듬해에 사은사(謝恩使)로 청에 다녀왔고, 좌의정을 거쳐 1649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효종대왕의 북벌계획이 김자점(金自點)의 밀고로 청에 알려져 추궁을 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공이 책임질 것을 자청, 청(淸)에 의해 백마산성에 감금당했다. 1651년(효종 2) 석방되었으나 청의 압력으로 인하여 등용되지는 못했다.
1659년(효종 10)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현종대왕 즉위 후 송시열 등 서인으로부터 여러 번 배척받았으나 임금의 총애로 유임되었으며, 1668년(현종 9) 궤장(?杖)을 하사받았다. 문장과 글씨가 뛰어났으며 남원의 방산서원(方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효도로 정려가 세워졌다. 문집 53권과 연보 3권을 남겼다. 작품 글씨로는 `좌상 이정구비(左相 李廷龜碑)\' · `이판 이명한비(吏判 李明漢碑)\' · `지돈녕 정광성비(知敦寧 鄭廣城碑)\' 등이 있다.
배위는 정경부인 전주류씨로 색(穡)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 신종군(新宗君) 묘 좌측 산 임좌에 있다.
1613년(광해군 5)에 진사가 되었고 1623년(인조 1)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이듬해 주서(注書)·대교(待敎)를 지냈다. 1626년(인조 4) 문과 중시에 장원한 후 사가독서하였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는 부제학으로서 삼전도(三田渡)의 비문을 찬진(撰進)하였다. 대제학 ·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1642년(인조 20)에는 세자이사(世子貳師)로서 김상헌과 함께 척화신으로 심양에 잡혀가 1년간 봉황성에 구금되었다. 돌아와서는 대사헌 · 이조판서를 지냈고, 1645년(인조 23)에는 우의정이 되었다. 이듬해에 사은사(謝恩使)로 청에 다녀왔고, 좌의정을 거쳐 1649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효종대왕의 북벌계획이 김자점(金自點)의 밀고로 청에 알려져 추궁을 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공이 책임질 것을 자청, 청(淸)에 의해 백마산성에 감금당했다. 1651년(효종 2) 석방되었으나 청의 압력으로 인하여 등용되지는 못했다.
1659년(효종 10)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현종대왕 즉위 후 송시열 등 서인으로부터 여러 번 배척받았으나 임금의 총애로 유임되었으며, 1668년(현종 9) 궤장(?杖)을 하사받았다. 문장과 글씨가 뛰어났으며 남원의 방산서원(方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효도로 정려가 세워졌다. 문집 53권과 연보 3권을 남겼다. 작품 글씨로는 `좌상 이정구비(左相 李廷龜碑)\' · `이판 이명한비(吏判 李明漢碑)\' · `지돈녕 정광성비(知敦寧 鄭廣城碑)\' 등이 있다.
배위는 정경부인 전주류씨로 색(穡)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 신종군(新宗君) 묘 좌측 산 임좌에 있다.
경안(景顔) 1581∼1656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성우(聖愚), 함풍군의 증손이고 유신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남병사(南兵使)에 이르렀고, 1623년(인조 1) 계해의거 때에는 고양군수를 지냈다. 묘는 과천 갈현 해좌에 있고 갈문(碣文)은 병사(兵使) 행성(行成)이 지었으며 도정인 규성(奎成)이 썼다.
경윤(卿尹) 1751∼1803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이칙(彛則), 척연(?然)의 6대손이며 효실(孝實)의 장남이다. 진사로서 1795년(정조 19) 정시 문과 갑과에 장원하여 감찰을 지냈다. 문집이 있다.
배위는 풍천임씨 호(琥)의 딸과 파평윤씨 심대(心大)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법원리 갈두곡 간좌이다.
배위는 풍천임씨 호(琥)의 딸과 파평윤씨 심대(心大)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법원리 갈두곡 간좌이다.
경직(景稷) 1577∼1640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상고(尙古), 호는 석문(石門), 시호는 효민(孝敏). 동지중추부사 유간(惟侃)의 장남이며 정종대왕의 8대손으로서 이항복 ·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01년(선조 34) 사마시를 거쳐 1606년(선조 3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사관(史官)이 되었다가 홍문관 정자(正字)를 거쳐 1613년(광해군 5)에 병조정랑 지제교를 겸하였다. 1617년(광해군 9)에는 행사과(行司果)로 종사관이 되어 회답사 오윤겸(吳允謙)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다음 해에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여 사직하고 낙향했다.
1622년(광해군 14) 명나라의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가도(텸島)에 주둔하였을 때 철산부사(鐵山府使)가 되어 모문룡의 신임을 얻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는 황해도 병마절도사가 되었고 이어서 수원부사가 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병조참판이 되어 강화도로 왕을 호종하였으며, 후금(後金)의 사신을 접대해서 화의를 성취시키고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으로 왕을 호종했다가 청영(淸營)에 가서 청 태종의 칙서를 가져왔으며, 화의를 성립시킨 뒤에는 호조판서를 거쳐 도승지와 강화부 유수(留守)를 지냈다. 글씨에 능했고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보성오씨 호조 경지(景智)의 딸과 고성이씨 참판 성길(成吉)의 딸이다.
묘소는 서울시 관악구 남현동 산57의 10에 있다.
1601년(선조 34) 사마시를 거쳐 1606년(선조 3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사관(史官)이 되었다가 홍문관 정자(正字)를 거쳐 1613년(광해군 5)에 병조정랑 지제교를 겸하였다. 1617년(광해군 9)에는 행사과(行司果)로 종사관이 되어 회답사 오윤겸(吳允謙)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다음 해에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여 사직하고 낙향했다.
1622년(광해군 14) 명나라의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가도(텸島)에 주둔하였을 때 철산부사(鐵山府使)가 되어 모문룡의 신임을 얻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는 황해도 병마절도사가 되었고 이어서 수원부사가 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병조참판이 되어 강화도로 왕을 호종하였으며, 후금(後金)의 사신을 접대해서 화의를 성취시키고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으로 왕을 호종했다가 청영(淸營)에 가서 청 태종의 칙서를 가져왔으며, 화의를 성립시킨 뒤에는 호조판서를 거쳐 도승지와 강화부 유수(留守)를 지냈다. 글씨에 능했고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보성오씨 호조 경지(景智)의 딸과 고성이씨 참판 성길(成吉)의 딸이다.
묘소는 서울시 관악구 남현동 산57의 10에 있다.
경하(景夏) 1574∼1637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문백(文伯), 함풍군의 증손이며 동지중추부사 유신(惟信)의 차남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용강현령(龍江縣令)으로 부임하였고, 병자호란이 일어나 적이 한강 남쪽에 이르렀을 때, 아들 배영(培英)과 함께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다.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제주양씨 천심(千尋)의 딸이다.
묘는 양천 원당리 오좌에 있었으나 경기도 안성시 삼죽면 동평리 오좌에 이장하였다.
배위는 제주양씨 천심(千尋)의 딸이다.
묘는 양천 원당리 오좌에 있었으나 경기도 안성시 삼죽면 동평리 오좌에 이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