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흥군파 4세 약사에는 총 21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경흥군(慶興君) 1708∼1771 파명:인흥군(仁興君)
  휘는 전(캴), 자는 문원(聞遠).
인흥군의 증손이며 성창군의 장남이다.
현록대부 겸 도총관을 지냈다.
묘소는 성창군 묘하에 있다.
배위는 군부인 선산김씨와, 군부인 동래정씨로 묘는 3합폄이다.
인흥군의 증손이며 성창군의 장남이다.
현록대부 겸 도총관을 지냈다.
묘소는 성창군 묘하에 있다.
배위는 군부인 선산김씨와, 군부인 동래정씨로 묘는 3합폄이다.
낙산도정(洛山都正) 1688∼1717 파명:인흥군(仁興君)
  휘는 경(툑), 전계군의 장남으로 명선대부에 올랐다.
묘소는 전계군 묘하에 있다.
배위는 신부인 청송심씨로 노(櫓)의 딸이다.
묘소는 전계군 묘하에 있다.
배위는 신부인 청송심씨로 노(櫓)의 딸이다.
낙풍군(洛豊君) 1698∼1754 파명:인흥군(仁興君)
  휘는 무(楙), 자는 덕보(德甫).
전계군의 차남으로 현록대부 겸 도총관을 지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회천읍 덕계리 자좌이다.
배위는 군부인 달성서씨로 참봉 종기(宗沂)의 딸이며 묘는 합폄이다.
전산군(全山君) [1666(현종 7)∼1715(숙종 41)]
휘는 심(深), 자는 자연(子淵), 호는 효우당(孝友堂).
낭원군의 4남으로 초수는 부정, 소의대부 겸 도총관을 지냈으며 가덕대부에 승계됐다.
공은 남달리 효행이 지극하였으며 친구간 우애도 깊어 칭찬이 자자했다.
묘소는 낭원군 묘하에 있다.
배위는 증 군부인 달성서씨로 사평 증 영의정 문도(文道)의 딸이며 묘는 합폄이다.
전계군의 차남으로 현록대부 겸 도총관을 지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회천읍 덕계리 자좌이다.
배위는 군부인 달성서씨로 참봉 종기(宗沂)의 딸이며 묘는 합폄이다.
전산군(全山君) [1666(현종 7)∼1715(숙종 41)]
휘는 심(深), 자는 자연(子淵), 호는 효우당(孝友堂).
낭원군의 4남으로 초수는 부정, 소의대부 겸 도총관을 지냈으며 가덕대부에 승계됐다.
공은 남달리 효행이 지극하였으며 친구간 우애도 깊어 칭찬이 자자했다.
묘소는 낭원군 묘하에 있다.
배위는 증 군부인 달성서씨로 사평 증 영의정 문도(文道)의 딸이며 묘는 합폄이다.
낭선군(朗善君) 1637∼1693 파명:인흥군(仁興君)
  휘는 우(췓), 자는 석경(碩卿), 호는 관란정(觀?亭), 시호는 효민(孝敏)이다.
인흥군의 장남으로 15세에 낭선정(郎善正)에 봉해졌다가 나중에 군으로 승습되었고, 오위도총부 도총관 · 사옹원 제조 · 종친부 유사(有司) 당상관으로 임명되었다. 1662년(현종 3) 칠조(七朝)의 어필을 모사하여 간행하였고, 그 공으로 숭헌대부(崇憲大夫)가 되었다. 1663년(현종 4) 진위무진향정사(陳慰撫進香正使)로서 청나라에 갔다가 미문(薇文)사건으로 귀국한 뒤 삭직당했다가 복권되었다. 1671년(현종 12)과 1686년(숙종 12)에도 문안사(問安使)와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74년 인선대비(仁宣大妃 : 孝宗妃 張氏)가 승하하자 수릉관(守陵官)을 지내기도 했다.
공은 7, 8세 때부터 한묵(翰墨)에 뜻을 두었고, 장성하여 왕희지의 필체를 익혀 전서(篆書) · 주서(?書) · 초서 · 예서 등의 서체에서 심오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래서 궁중의 온갖 필체를 다 썼고, 숙종 때 <선원록>을 만들 때 총책이 되어 내용을 교정했다. 공은 묵란과 묵죽에도 능했다고 하는데, 오늘날 남아있는 작품이 없다. 다만 유작으로 백련사사적비(白蓮寺事蹟碑) 등의 비액(碑額)이 전한다. 또 8권의 문집과 <임지설림(臨池說林)><대동금석첩(大東金石帖)> 등의 편저도 있다.
배위는 창녕군부인 창녕성씨로 증 판서 운한(雲翰)의 딸과 성산군부인 성산이씨로 증판서 세미(世美)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영중면 양문리 탑동 인흥군묘 좌강에 있고, 배위묘는 낭선군 묘하에 있다.
인흥군의 장남으로 15세에 낭선정(郎善正)에 봉해졌다가 나중에 군으로 승습되었고, 오위도총부 도총관 · 사옹원 제조 · 종친부 유사(有司) 당상관으로 임명되었다. 1662년(현종 3) 칠조(七朝)의 어필을 모사하여 간행하였고, 그 공으로 숭헌대부(崇憲大夫)가 되었다. 1663년(현종 4) 진위무진향정사(陳慰撫進香正使)로서 청나라에 갔다가 미문(薇文)사건으로 귀국한 뒤 삭직당했다가 복권되었다. 1671년(현종 12)과 1686년(숙종 12)에도 문안사(問安使)와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74년 인선대비(仁宣大妃 : 孝宗妃 張氏)가 승하하자 수릉관(守陵官)을 지내기도 했다.
공은 7, 8세 때부터 한묵(翰墨)에 뜻을 두었고, 장성하여 왕희지의 필체를 익혀 전서(篆書) · 주서(?書) · 초서 · 예서 등의 서체에서 심오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래서 궁중의 온갖 필체를 다 썼고, 숙종 때 <선원록>을 만들 때 총책이 되어 내용을 교정했다. 공은 묵란과 묵죽에도 능했다고 하는데, 오늘날 남아있는 작품이 없다. 다만 유작으로 백련사사적비(白蓮寺事蹟碑) 등의 비액(碑額)이 전한다. 또 8권의 문집과 <임지설림(臨池說林)><대동금석첩(大東金石帖)> 등의 편저도 있다.
배위는 창녕군부인 창녕성씨로 증 판서 운한(雲翰)의 딸과 성산군부인 성산이씨로 증판서 세미(世美)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영중면 양문리 탑동 인흥군묘 좌강에 있고, 배위묘는 낭선군 묘하에 있다.
낭원군(朗原君) 1640∼1699 파명:인흥군(仁興君)
  휘는 간(?), 자는 화숙(和叔), 호는 최락당(最樂堂). 인흥군의 차남이다.
1654년(효종 5) 낭원정(郎原正)을 받고 10년이 되어 도정(都正)을 거쳐 군에 봉해졌다.
1679년(숙종 5) <선원보략>을 편찬하였고 1688년(숙종 14) 장렬대비(莊烈大妃 : 仁祖 繼妃 趙氏)의 수릉관(守陵官)이 되었으며, 도총부 도총관 · 사옹원과 종부시의 제조도 겸했다. 1698년(숙종 24) 단종대왕의 복위를 건의하여 실천케 했다. 1699년(숙종 25)에 9조(九條)의 상소문을 올리고 자제들에게 시호를 청하지 말라 하고 별세했다. 공은 종실인데도 매우 겸손하게 살면서 문학과 풍류를 즐겨 현재 시조도 9수가 남아 전해진다.
공은 형인 낭선군과 함께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를 잘 썼다. 편서(編書)로 <인흥군연보(仁興君年譜)>가 있고, 글씨로는 <보월사중수비(寶月寺重修碑)>(평강) · <송광사사원사적비(松廣寺嗣院事蹟碑)>(승주) · <백련암사적비(白蓮庵事蹟碑)>(강진) · <보현사풍담대사비(普賢寺楓潭大師碑)>(영변) 등이 있다.
배위는 전의군부인 전의이씨로 우의정 효정공(孝靖公) 행원(行遠)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자일동 금곡 자좌에 합폄이다.
1654년(효종 5) 낭원정(郎原正)을 받고 10년이 되어 도정(都正)을 거쳐 군에 봉해졌다.
1679년(숙종 5) <선원보략>을 편찬하였고 1688년(숙종 14) 장렬대비(莊烈大妃 : 仁祖 繼妃 趙氏)의 수릉관(守陵官)이 되었으며, 도총부 도총관 · 사옹원과 종부시의 제조도 겸했다. 1698년(숙종 24) 단종대왕의 복위를 건의하여 실천케 했다. 1699년(숙종 25)에 9조(九條)의 상소문을 올리고 자제들에게 시호를 청하지 말라 하고 별세했다. 공은 종실인데도 매우 겸손하게 살면서 문학과 풍류를 즐겨 현재 시조도 9수가 남아 전해진다.
공은 형인 낭선군과 함께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를 잘 썼다. 편서(編書)로 <인흥군연보(仁興君年譜)>가 있고, 글씨로는 <보월사중수비(寶月寺重修碑)>(평강) · <송광사사원사적비(松廣寺嗣院事蹟碑)>(승주) · <백련암사적비(白蓮庵事蹟碑)>(강진) · <보현사풍담대사비(普賢寺楓潭大師碑)>(영변) 등이 있다.
배위는 전의군부인 전의이씨로 우의정 효정공(孝靖公) 행원(行遠)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자일동 금곡 자좌에 합폄이다.
동은군(東恩君) 1700∼1755 파명:인흥군(仁興君)
  휘는 전(?), 자는 군양(君暘).
성평군의 아들로 초수는 부수였으나 승헌대부 겸 부총관을 지냈다.
묘소는 성평군 묘하에 있다.
배위는 현부인 여흥민씨로 절충장군 익양(翊亮)의 딸과, 현부인 낙안오씨로 광주(光周)의 딸이며 묘는 3합폄이다.
성평군의 아들로 초수는 부수였으나 승헌대부 겸 부총관을 지냈다.
묘소는 성평군 묘하에 있다.
배위는 현부인 여흥민씨로 절충장군 익양(翊亮)의 딸과, 현부인 낙안오씨로 광주(光周)의 딸이며 묘는 3합폄이다.
밀양군(密陽君) 1686∼1748 파명:인흥군(仁興君)
  휘는 완(梡), 자는 여고(汝固), 호는 성재(惺齋). 인흥군의 증손으로 생부는 전산군이다. 초수는 정이었으나 수덕대부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지냈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영중면 양문리 전가리산 자좌이다.
배위는 증 군부인 청송심씨로 현감 증 대사헌 약황(若潢)이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영중면 양문리 전가리산 자좌이다.
배위는 증 군부인 청송심씨로 현감 증 대사헌 약황(若潢)이다.
성창군(星昌君) 1688∼1745 파명:인흥군(仁興君)
  휘는 유(濡), 자는 사우(士雨).
낭선군의 3남으로 소의대부 도총관을 지냈으며 현록대부로 승계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창수면 가양리 신좌이다.
배위는 증 군부인 경주이씨로 생원 광(?)의 딸이며 묘는 합폄이다.
낭선군의 3남으로 소의대부 도총관을 지냈으며 현록대부로 승계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창수면 가양리 신좌이다.
배위는 증 군부인 경주이씨로 생원 광(?)의 딸이며 묘는 합폄이다.
성평군(星坪君) 1663∼1713 파명:인흥군(仁興君)
  휘는 탁(濯), 자는 사결(仕潔), 호는 지족당(知足堂). 인흥군의 손자이며, 낭선군의 차남이다.
초수는 수(守)였으나 소의대부 겸 부총관을 지냈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영중면 거사리 임좌이다.
배위는 현부인 평산신씨로 통덕랑 정(鼎)의 딸이며, 묘는 합폄이다.
초수는 수(守)였으나 소의대부 겸 부총관을 지냈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영중면 거사리 임좌이다.
배위는 현부인 평산신씨로 통덕랑 정(鼎)의 딸이며, 묘는 합폄이다.
영천군(靈川君) 1706∼1772 파명:인흥군(仁興君)
  휘는 야(?), 자는 군화(君?).
청양군 계자로 생부는 동지중추부사 동번(東蕃)이다.
초수는 부수로 숭헌대부 겸 도총관을 지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둔야면 세곡리 해좌이다.
배위는 현부인 수원최씨로 후창(後昌)의 딸과 현부인 문화류씨로 천응(天應)의 딸이며 묘는 3합폄이다.
청양군 계자로 생부는 동지중추부사 동번(東蕃)이다.
초수는 부수로 숭헌대부 겸 도총관을 지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둔야면 세곡리 해좌이다.
배위는 현부인 수원최씨로 후창(後昌)의 딸과 현부인 문화류씨로 천응(天應)의 딸이며 묘는 3합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