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안군파 4세 약사에는 총 1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흥안군(興安君) 1598∼1624 파명:흥안군(興安君)
 흥안군은 제 14대 선조대왕의 서10왕자이시고, 제13대 명종대왕과 제11대 중종대왕의 서7왕자 덕흥대원군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제14대 선조대왕이시고, 어머니는 온빈(溫嬪) 청주한씨(淸州韓氏)이시다. 온빈 한씨는 자녀로는 3남 1녀를 두었으니 선조의 10남 흥안군(興安君) 제(瑅) · 11남 경평군(慶平君) 늑(玏)· 13남 영성군(寧城君) 계(王季)이며 딸은 선조의 10녀 정화옹주(貞和翁主)로서 동창위(東昌尉) 권대항(權大恒)에게 하가했다.
흥안군은 무술(戊戌) 1598(선조 31)년에 태어났으며, 공의 11세때 경술(庚戌) 1610(광해 2)년 판서(判書) 청주인(淸州人) 한인급(韓仁及)의 딸과 혼례를 올렸다. 갑자(甲子) 1624(인조 2)년 이괄(李适)의 난 때 이괄의 추대로 3일 천하의 임금이 되었다가 이괄이 패망하자 잡히어 갑자(甲子) 1624(인조 2)년 음 2월 16일 향년 27세로 사사되었다. 그리고 신미(辛未) 1871(고종 8)년 3월 16일에 시호(諡號) 효희공(孝僖公)에 추증(追贈)되었고, 그후에도 시호 효헌공(孝憲公), 양소공(良昭公)에 추증되었다. 임신(壬申) 1872(고종 9)년 12월 2일에 흥안군 계자(繼子)를 신성군(仁城君) 공(珙)의 아들 해양도정(海陽都正) 희(僖)를 계자로 정했으며, 그해 12월 4일에 사손(祀孫)을 유학(幼學) 리휘소(李暉沼)로 받들게 하였고, 계유(癸酉) 1873(고종 10)년 2월 22일에는 흥안군 내외의 사판(祠版)을 하였다. 그후에 경자(庚子) 1900(광무 4)년 5월 10일 종정원 경(宗正院卿) 완순군(完順君) 리재완(李載完)의 상소로 시호 및 계후 세운것을 그만두게 하였다.
배위는 판서(判書) 청주한씨(淸州韓氏) 인급(仁及)의 딸인 청주군부인(淸州郡夫人) 한씨(韓氏) 이시다.
배위 파평윤씨(坡平尹氏) 신(伸)의 딸이시다.
오늘날의 흥안군파는 이괄의 난으로 인하여 집안이 몰살되었지만 그 때 흥안군의 아들 영세(英世 : 1617∼1668)는 7세라 죽이지 않고 경남 남해(南海)로 귀양보내져 거기에서 뿌리가 살아난 것이 오늘날의 흥안군파이다. 이 영세가 진주정씨와 혼인하여 1남을 둠으로써 대를 이어갈 수 있었다.
흥안군 후손 중에는 절충장군 · 통정대부 · 가선대부를 지낸 이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대인물로는 준(俊 : 譜名 正鎔 : 1919∼ )을 들 수 있다. 유명한 서양화가로 이화여대 미술대학장을 두번이나 역임하고 퇴임했으며 현재 예술원 회원이며 종약원 미술분과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의 아들 해성(海星 : 喆壽)은 보람은행 상무로 있다.
현재 흥안군파는 경남 남해군을 중심으로 살고 있는데 전국 인구가 2백여 명에 불과하다.
흥안군은 무술(戊戌) 1598(선조 31)년에 태어났으며, 공의 11세때 경술(庚戌) 1610(광해 2)년 판서(判書) 청주인(淸州人) 한인급(韓仁及)의 딸과 혼례를 올렸다. 갑자(甲子) 1624(인조 2)년 이괄(李适)의 난 때 이괄의 추대로 3일 천하의 임금이 되었다가 이괄이 패망하자 잡히어 갑자(甲子) 1624(인조 2)년 음 2월 16일 향년 27세로 사사되었다. 그리고 신미(辛未) 1871(고종 8)년 3월 16일에 시호(諡號) 효희공(孝僖公)에 추증(追贈)되었고, 그후에도 시호 효헌공(孝憲公), 양소공(良昭公)에 추증되었다. 임신(壬申) 1872(고종 9)년 12월 2일에 흥안군 계자(繼子)를 신성군(仁城君) 공(珙)의 아들 해양도정(海陽都正) 희(僖)를 계자로 정했으며, 그해 12월 4일에 사손(祀孫)을 유학(幼學) 리휘소(李暉沼)로 받들게 하였고, 계유(癸酉) 1873(고종 10)년 2월 22일에는 흥안군 내외의 사판(祠版)을 하였다. 그후에 경자(庚子) 1900(광무 4)년 5월 10일 종정원 경(宗正院卿) 완순군(完順君) 리재완(李載完)의 상소로 시호 및 계후 세운것을 그만두게 하였다.
배위는 판서(判書) 청주한씨(淸州韓氏) 인급(仁及)의 딸인 청주군부인(淸州郡夫人) 한씨(韓氏) 이시다.
배위 파평윤씨(坡平尹氏) 신(伸)의 딸이시다.
오늘날의 흥안군파는 이괄의 난으로 인하여 집안이 몰살되었지만 그 때 흥안군의 아들 영세(英世 : 1617∼1668)는 7세라 죽이지 않고 경남 남해(南海)로 귀양보내져 거기에서 뿌리가 살아난 것이 오늘날의 흥안군파이다. 이 영세가 진주정씨와 혼인하여 1남을 둠으로써 대를 이어갈 수 있었다.
흥안군 후손 중에는 절충장군 · 통정대부 · 가선대부를 지낸 이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대인물로는 준(俊 : 譜名 正鎔 : 1919∼ )을 들 수 있다. 유명한 서양화가로 이화여대 미술대학장을 두번이나 역임하고 퇴임했으며 현재 예술원 회원이며 종약원 미술분과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의 아들 해성(海星 : 喆壽)은 보람은행 상무로 있다.
현재 흥안군파는 경남 남해군을 중심으로 살고 있는데 전국 인구가 2백여 명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