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창군파 4세 약사에는 총 1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경창군(慶昌君) 1596∼1644 파명:경창군(慶昌君)
  휘는 주(?), 시호는 효헌(孝獻)이다. 선조대왕의 9남으로 1596년(선조 29) 9월 23일에 태어나 1644년(인조 22) 정월 17일에 별세했다. 어머니는 인동현감 증 이조참판 여겸(汝謙)의 딸인 정빈(貞嬪) 남양홍씨이다. 선조대왕은 사랑하고 기특히 여겨 8세에 경창군에 봉하였다. 선조대왕이 일찍이 환후가 있을 때 경창군의 나이 13세였지만 밤낮으로 옆에서 모시고 약시중을 들었으며 밤에도 옷과 띠를 풀지 않고 휴식을 취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선조대왕이 승하한 후 애훼골립으로 위태로운 지경에 이른 적이 몇 번 있었다. 3년 복기가 지난 뒤 궐밖 사제에서 거처할 적에 10여 년 간 친척들의 헐뜯음을 당할 때도 날마다 진국술만 먹고 스스로 근신하며 시사에 대한 말은 일체 하지 않았다. 거리에서 간혹 사람들이 조정범사를 물으면 “왕자가 어찌 알리요” 하면서 절대로 외인과 더불어 사교치 않고, 친척중에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사람과 근신하지 않는 사람과는 절대로 통하지 않았다. 이러한 근신함으로 광해군 때에 화를 입지 않았다.
또한 모친에 대하여도 효성이 극진하여 정빈 남양홍씨가 병환이 위독할 때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기도하였으며 그러한 가운데서 병환의 경중과 시사의 대변을 감지하기도 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종부시 도제조와 종친부 유사당상에 있으면서 근면하고 태만하지 않았으며, 1662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눈물을 흘리면서 왕을 모셔 상의 은총이 융숭하였다.
갑작스런 두 아들의 상을 당하자 세상사에 뜻을 잃고 술만 마시다가 별세하니 향년 49세였다. 이에 인조대왕이 3일간 조정일을 그치고 중관을 보내어 호상하였다. 3월에 아차산 아래 권조(權?)하였다가 5월 16일에 통진 치북 가좌동(현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 가좌동) 병좌 진향지원에 예장하였다.
배위는 군부인 창녕조씨로 이천부사 증 좌의정 명욱(明홸)의 딸로서 경창군에 이어 5년 후에 별세하여 부장(쯊葬)하였다.
또한 모친에 대하여도 효성이 극진하여 정빈 남양홍씨가 병환이 위독할 때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기도하였으며 그러한 가운데서 병환의 경중과 시사의 대변을 감지하기도 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종부시 도제조와 종친부 유사당상에 있으면서 근면하고 태만하지 않았으며, 1662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눈물을 흘리면서 왕을 모셔 상의 은총이 융숭하였다.
갑작스런 두 아들의 상을 당하자 세상사에 뜻을 잃고 술만 마시다가 별세하니 향년 49세였다. 이에 인조대왕이 3일간 조정일을 그치고 중관을 보내어 호상하였다. 3월에 아차산 아래 권조(權?)하였다가 5월 16일에 통진 치북 가좌동(현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 가좌동) 병좌 진향지원에 예장하였다.
배위는 군부인 창녕조씨로 이천부사 증 좌의정 명욱(明홸)의 딸로서 경창군에 이어 5년 후에 별세하여 부장(쯊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