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화군파 4세 약사에는 총 2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순화군(順和君) 1580∼1607 파명:순화군(順和君)
  휘는 보(숪), 시호는 희민(僖敏). 선조대왕의 6남으로 순빈(順嬪) 김씨(金氏)의 소생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파죽지세로 북상하자 선조대왕은 파천을 작정하고 동년 4월 29일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각 도에 근왕병을 모집할 때 순화군은 강원도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 때 순화군은 13세였다. 황정욱(黃廷彧 : 1532∼1607) · 황혁(黃赫 : 1551∼1612) 부자의 보호를 받으며 강원도로 가 근왕병을 모집하던 중 철원에 도착하자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 군이 강원도를 점령하고 함경도로 향한다는 소문에 안변을 거쳐 회령에 당도해 감영에 머물 때 아전 국경인(鞠景仁 : ?∼1592)이 왜군에 밀고하여 임해군과 함께 체포되어 함흥 · 안변 · 대구 등지를 거쳐 부산 왜관에 구금되어 있었다. 그러나 화의(和議)가 논의되어 명나라 유격장 심유경(沈惟敬)이 일본 나고야(名古屋)로 가서 풍신수길(豊臣秀吉)을 만나고 돌아올 때 부산 왜관에 들러 두 왕자를 데리고 오니 1593년(선조 26) 9월 29일이었다.
궁으로 돌아온 순화군은 우승지 황혁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소생이 없이 28세로 요절했다. 그래서 아우 인성군(仁城君)의 차남 해안군으로 계자를 삼았다.
배위는 장수황씨 증 좌찬성 혁(赫)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 수락산 덕흥대원군 묘역내 계좌에 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파죽지세로 북상하자 선조대왕은 파천을 작정하고 동년 4월 29일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각 도에 근왕병을 모집할 때 순화군은 강원도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 때 순화군은 13세였다. 황정욱(黃廷彧 : 1532∼1607) · 황혁(黃赫 : 1551∼1612) 부자의 보호를 받으며 강원도로 가 근왕병을 모집하던 중 철원에 도착하자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 군이 강원도를 점령하고 함경도로 향한다는 소문에 안변을 거쳐 회령에 당도해 감영에 머물 때 아전 국경인(鞠景仁 : ?∼1592)이 왜군에 밀고하여 임해군과 함께 체포되어 함흥 · 안변 · 대구 등지를 거쳐 부산 왜관에 구금되어 있었다. 그러나 화의(和議)가 논의되어 명나라 유격장 심유경(沈惟敬)이 일본 나고야(名古屋)로 가서 풍신수길(豊臣秀吉)을 만나고 돌아올 때 부산 왜관에 들러 두 왕자를 데리고 오니 1593년(선조 26) 9월 29일이었다.
궁으로 돌아온 순화군은 우승지 황혁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소생이 없이 28세로 요절했다. 그래서 아우 인성군(仁城君)의 차남 해안군으로 계자를 삼았다.
배위는 장수황씨 증 좌찬성 혁(赫)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 수락산 덕흥대원군 묘역내 계좌에 있다.
해안군(海安君) 1613∼1655 파명:순화군(順和君)
  휘는 억(億), 시호는 정의(靖懿). 순화군의 계자로 생부는 인성군이다. 인성군이 역적모의에 연루되어 진도에 유배되었을 때 진도에 함께 있다가 인성군이 사사된 후 생모 군부인 해평윤씨와 여러 아우들과 같이 왕명에 의하여 유배지를 옮겨 제주도 내 정의군(旌義郡)으로 갔으니 1628년(인조 6) 6월의 일이었다.
1635년(인조 13) 8월에 군부인 해평윤씨와 4남 해령군(海寧君)과 5남 해양군(海陽君)은 노약자라 하여 특별히 사면하여 서울로 돌아가게 하고, 형 해평군(海平君)과 바로 밑의 아우 해원군(海原君)과 해안군은 유배지를 강원도 양양으로 옮겼다.
다음 해인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유배에서 풀리고 곧이어 복관되었다. 인조대왕이 서울로 돌아오자 해안군에게 성혼을 권고했으나 이미 제주 정의군에 유배돼 있을 때 경주이씨와 혼인하여 탐계군 · 탐릉군 · 탐산군 3남과 2녀를 둔 처지라 다시 성취할 수 없어 3년을 끌다가 왕명이 지엄하여 8세 연하인 제주고씨와 혼인하여 다시 영창군 · 영래군과 3녀를 두었다.
해안군은 10년 동안의 유배생활 끝에 풀려 돌아와 19년을 더 살다가 1655년(효종 6) 5월 18일에 별세하니 향년 43세였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접동 곤좌에 제주고씨와 합폄되어 있고, 경주이씨는 경기도 용인시 김량장동 별학리에 있다.
1635년(인조 13) 8월에 군부인 해평윤씨와 4남 해령군(海寧君)과 5남 해양군(海陽君)은 노약자라 하여 특별히 사면하여 서울로 돌아가게 하고, 형 해평군(海平君)과 바로 밑의 아우 해원군(海原君)과 해안군은 유배지를 강원도 양양으로 옮겼다.
다음 해인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유배에서 풀리고 곧이어 복관되었다. 인조대왕이 서울로 돌아오자 해안군에게 성혼을 권고했으나 이미 제주 정의군에 유배돼 있을 때 경주이씨와 혼인하여 탐계군 · 탐릉군 · 탐산군 3남과 2녀를 둔 처지라 다시 성취할 수 없어 3년을 끌다가 왕명이 지엄하여 8세 연하인 제주고씨와 혼인하여 다시 영창군 · 영래군과 3녀를 두었다.
해안군은 10년 동안의 유배생활 끝에 풀려 돌아와 19년을 더 살다가 1655년(효종 6) 5월 18일에 별세하니 향년 43세였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접동 곤좌에 제주고씨와 합폄되어 있고, 경주이씨는 경기도 용인시 김량장동 별학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