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양군파 4세 약사에는 총 32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덕양군(德陽君) 1524∼1581 파명:덕양군(德陽君)
  휘는 기(岐), 자는 백고(伯高), 시호는 정희(靖僖). 중종대왕의 5남으로 덕흥대원군의 형이다.
어머니는 숙의(淑儀) 경주이씨로 사섬시 첨정 형신(亨臣)의 딸이다.
1524년(중종 19) 9월 25일에 태어나 아홉살 때인 1532년(중종 27)에 덕양군에 봉군되었다.
배위는 안동권씨로 호조판서 찬(纉)의 딸로,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 : 1521∼1593)에 봉해졌다.
어머니를 일찍 사별하여 중종대왕의 사랑을 받았고 형제인 인종대왕 · 명종대왕과도 우애가 돈독하였다.
덕양군은 종친부 · 종부시 · 사옹원 및 문소전 · 연은전의 일을 겸하여 보았다.
선조대왕이 즉위하여서는 친척의 덕망있는 연장자로서 더욱 극진히 예우하는 은혜가 전보다 더하였다.
덕양군도 또한 조심하며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공경하며 받들었기에 임금의 사랑함이 두터우며 처음과 끝이 변함이 없었다.
60세가 가까운 나이에도 일찍이 질병이 없었고 복록과 번창함이, 형제인 다른 왕자들이 따라 오지 못하였다.
1581년(선조 14) 6월 22일에 큰 병환 없이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58세였다.
공은 평생을 귀한 신분임을 믿고 기세를 부리지 않았으며, 총애받는 것을 빙자하여, 남에게 교만하지 않았고, 검소하고, 절약하고, 두려워하며 삼가하여 임금의 친척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한 때 심일휴(沈日休)가 소요정(消遙亭)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덕양군이 술을 싣고 배를 띄워 내려오다가 정자 아래에 닿으니, 날이 이미 저물어서, 어두웠으므로 묵어 가고자, 먼저 말씨를 낮추어 심일휴에게 청하고, 그 허락을 기다린 뒤에 집안으로 들어갔다.
하인들에게 타이르며 조금도 더럽힘이 없도록 하였으니 심일휴가 처음에는 아랫 사람들이 결례를 범하지 않을까 하여 염려하였으나 뒤에 사실을 알고서 탄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었다.
묘지명(墓誌銘)이 있다.
어머니는 숙의(淑儀) 경주이씨로 사섬시 첨정 형신(亨臣)의 딸이다.
1524년(중종 19) 9월 25일에 태어나 아홉살 때인 1532년(중종 27)에 덕양군에 봉군되었다.
배위는 안동권씨로 호조판서 찬(纉)의 딸로,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 : 1521∼1593)에 봉해졌다.
어머니를 일찍 사별하여 중종대왕의 사랑을 받았고 형제인 인종대왕 · 명종대왕과도 우애가 돈독하였다.
덕양군은 종친부 · 종부시 · 사옹원 및 문소전 · 연은전의 일을 겸하여 보았다.
선조대왕이 즉위하여서는 친척의 덕망있는 연장자로서 더욱 극진히 예우하는 은혜가 전보다 더하였다.
덕양군도 또한 조심하며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공경하며 받들었기에 임금의 사랑함이 두터우며 처음과 끝이 변함이 없었다.
60세가 가까운 나이에도 일찍이 질병이 없었고 복록과 번창함이, 형제인 다른 왕자들이 따라 오지 못하였다.
1581년(선조 14) 6월 22일에 큰 병환 없이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58세였다.
공은 평생을 귀한 신분임을 믿고 기세를 부리지 않았으며, 총애받는 것을 빙자하여, 남에게 교만하지 않았고, 검소하고, 절약하고, 두려워하며 삼가하여 임금의 친척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한 때 심일휴(沈日休)가 소요정(消遙亭)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덕양군이 술을 싣고 배를 띄워 내려오다가 정자 아래에 닿으니, 날이 이미 저물어서, 어두웠으므로 묵어 가고자, 먼저 말씨를 낮추어 심일휴에게 청하고, 그 허락을 기다린 뒤에 집안으로 들어갔다.
하인들에게 타이르며 조금도 더럽힘이 없도록 하였으니 심일휴가 처음에는 아랫 사람들이 결례를 범하지 않을까 하여 염려하였으나 뒤에 사실을 알고서 탄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었다.
묘지명(墓誌銘)이 있다.
*풍산군(豊山君) 1538∼1611 파명:덕양군(德陽君)
  휘는 종린(宗麟), 자는 경인(景仁).
덕양군의 장남으로 13세에 관례에 따라 풍산정(豊山正)에 제수되고, 16세에 순회세자(順懷世子)의 상을 당하여 집사자(執事者)로 뽑히어 도정(都正)에 오르는 은전을 입었고 또 문정왕후(文定王后) 혼전(魂殿)의 윤직(輪直)에 함께 뽑혔다가 군(君)에 봉해졌다.
1581년(선조 14)에 덕양군이 세상을 떠나자, 3년상을 마침에 관례에 따라 정경(正卿)의 품계로 뛰어 올랐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어가를 호종하다가 중도에 이르러 어머니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이 늙고 달리 부양할 아들이 없는 것을 생각하고 잠시 동안 산골로 들어가 있다가 다시 행재소로 갔다.
1593년(선조 26) 여름에 임금의 명을 받들어 정릉(靖陵)을 봉심하였다.
그 해 가을에 영가군부인의 상을 당하여 양성(陽城) 안성군에 있는 시골집에서 3년상을 마쳤다.
외직에서 조정으로 돌아오니, 1605년(선조 38)에 선조대왕이 1품계 올려주는 은전을 베풀었다.
1607년(선조 40)에 공이 고희에 이르자 임금이 하교하기를 “풍산군은 나의 존속인데 나이가 70에 차니 극히 가상하도다.”라고 하며, 계급을 더 높이어 가덕대부(嘉德大夫)로 종1품이 되었다.
1610년(광해군 2) 선조대왕의 3년상을 마치고 부태묘(附太廟)하는 예를 이룸에 공이 종친 중에 가장 연세가 많은 덕이 있는 노인으로, 또 한 계급이 올라 소덕대부(昭德大夫)로 종1품의 품계에 올라 종친부의 일을 관장하였다. 사옹원 제조와 오위도총부 도총관도 겸임하였다.
공의 차남 귀천군(龜川君)이 이괄의 난 때 호종한 공훈으로 현록대부 정1품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추증되었다.
배위 금원현부인(錦原縣夫人) 증 군부인 박씨(1542∼1594)는 광주목사 간(諫)의 딸이다.
명문에서 자라나 본래 궁중 법도를 익혔고 귀한 집안으로 시집와서 훌륭하다는 칭찬이 더욱 드러났고 규문(閨門)이 화평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하산운동 산41번지에 있다.
묘지명과 <풍산군 유사(遺事)>가 있다. 1998년 4월 덕양군 신도비 뒤쪽에 신도비를 세웠다. 한학자인 13대손 화제(華齊) 우섭(雨燮)이 찬하고 두전(頭篆)은 서예가인 13대손 운정(雲汀) 윤섭(允燮)이 썼다.
덕양군의 장남으로 13세에 관례에 따라 풍산정(豊山正)에 제수되고, 16세에 순회세자(順懷世子)의 상을 당하여 집사자(執事者)로 뽑히어 도정(都正)에 오르는 은전을 입었고 또 문정왕후(文定王后) 혼전(魂殿)의 윤직(輪直)에 함께 뽑혔다가 군(君)에 봉해졌다.
1581년(선조 14)에 덕양군이 세상을 떠나자, 3년상을 마침에 관례에 따라 정경(正卿)의 품계로 뛰어 올랐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어가를 호종하다가 중도에 이르러 어머니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이 늙고 달리 부양할 아들이 없는 것을 생각하고 잠시 동안 산골로 들어가 있다가 다시 행재소로 갔다.
1593년(선조 26) 여름에 임금의 명을 받들어 정릉(靖陵)을 봉심하였다.
그 해 가을에 영가군부인의 상을 당하여 양성(陽城) 안성군에 있는 시골집에서 3년상을 마쳤다.
외직에서 조정으로 돌아오니, 1605년(선조 38)에 선조대왕이 1품계 올려주는 은전을 베풀었다.
1607년(선조 40)에 공이 고희에 이르자 임금이 하교하기를 “풍산군은 나의 존속인데 나이가 70에 차니 극히 가상하도다.”라고 하며, 계급을 더 높이어 가덕대부(嘉德大夫)로 종1품이 되었다.
1610년(광해군 2) 선조대왕의 3년상을 마치고 부태묘(附太廟)하는 예를 이룸에 공이 종친 중에 가장 연세가 많은 덕이 있는 노인으로, 또 한 계급이 올라 소덕대부(昭德大夫)로 종1품의 품계에 올라 종친부의 일을 관장하였다. 사옹원 제조와 오위도총부 도총관도 겸임하였다.
공의 차남 귀천군(龜川君)이 이괄의 난 때 호종한 공훈으로 현록대부 정1품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추증되었다.
배위 금원현부인(錦原縣夫人) 증 군부인 박씨(1542∼1594)는 광주목사 간(諫)의 딸이다.
명문에서 자라나 본래 궁중 법도를 익혔고 귀한 집안으로 시집와서 훌륭하다는 칭찬이 더욱 드러났고 규문(閨門)이 화평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하산운동 산41번지에 있다.
묘지명과 <풍산군 유사(遺事)>가 있다. 1998년 4월 덕양군 신도비 뒤쪽에 신도비를 세웠다. 한학자인 13대손 화제(華齊) 우섭(雨燮)이 찬하고 두전(頭篆)은 서예가인 13대손 운정(雲汀) 윤섭(允燮)이 썼다.
계림군(鷄林君) 1617∼ ? 파명:덕양군(德陽君)
  휘는 형원(烱遠), 풍산군의 4남인 귀봉군의 아들이다.
처음에 계림령(鷄林令)로 제수되었고, 중의대부 계림군에 올랐다.
배위 현부인 안동김씨(1617∼1678)는 태형(兌亨)의 딸이다.
처음에 계림령(鷄林令)로 제수되었고, 중의대부 계림군에 올랐다.
배위 현부인 안동김씨(1617∼1678)는 태형(兌亨)의 딸이다.
귀봉군(龜峯君) 1596~1657 파명:덕양군(德陽君)
  휘는 현(睍).
풍산군의 4남으로 처음에 귀봉부수(龜峯副守)로 제수되었고, 아들 계림군(鷄林君) 경원(烱遠)의 추은(追恩)으로 중의대부 귀봉군에 추증되었다.
배위 증 현부인 경주최씨(1597∼1656)는 진국(晋國)의 딸이다.
풍산군의 4남으로 처음에 귀봉부수(龜峯副守)로 제수되었고, 아들 계림군(鷄林君) 경원(烱遠)의 추은(追恩)으로 중의대부 귀봉군에 추증되었다.
배위 증 현부인 경주최씨(1597∼1656)는 진국(晋國)의 딸이다.
귀산군(龜山君) 1599∼1654 파명:덕양군(德陽君)
  휘는 권(睠), 자는 중원(仲遠).
풍성군의 계자로 생부는 풍산군이다. 품계가 창선대부에 이르고 아들 형유(烱愉)의 추은으로 명선대부 귀산군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증직되었다.
배위 증 현부인 여흥민씨는 덕룡(德龍)의 딸이다.
풍성군의 계자로 생부는 풍산군이다. 품계가 창선대부에 이르고 아들 형유(烱愉)의 추은으로 명선대부 귀산군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증직되었다.
배위 증 현부인 여흥민씨는 덕룡(德龍)의 딸이다.
귀성군(龜城君) 1554∼1599 파명:덕양군(德陽君)
  휘는 첨(瞻), 자는 사원(思遠).
풍산군의 장남이다. 천품이 준수하고 뛰어나 의기(義氣)를 주장하니 온 집안이 중하게 여기어 장자(長者)라 일컬었다.
공은 처음에 귀성부정(龜城副正)을 제수받았다가 도정(都正)에 올랐다.
1599년(선조 32) 6월 7일에 별세하니 향년 46세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에 세자 광해군을 모신 공로로 귀성군에 증직되었다.
배위는 증 현부인 창녕성씨(1553∼1590)로 판서 세장(世章)의 딸과 현부인 파평윤씨로 희천(希天)의 딸이다.
묘갈명(墓竭銘)이 있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궁내동 청계산 와동이다.
풍산군의 장남이다. 천품이 준수하고 뛰어나 의기(義氣)를 주장하니 온 집안이 중하게 여기어 장자(長者)라 일컬었다.
공은 처음에 귀성부정(龜城副正)을 제수받았다가 도정(都正)에 올랐다.
1599년(선조 32) 6월 7일에 별세하니 향년 46세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에 세자 광해군을 모신 공로로 귀성군에 증직되었다.
배위는 증 현부인 창녕성씨(1553∼1590)로 판서 세장(世章)의 딸과 현부인 파평윤씨로 희천(希天)의 딸이다.
묘갈명(墓竭銘)이 있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궁내동 청계산 와동이다.
귀원군(龜原君) 1580∼1645 파명:덕양군(德陽君)
  휘는 조(眺), 자는 원이(遠而).
풍산군의 3남으로 처음에 귀원부수(龜原副守)로 제수되고, 정의대부 귀원군에 올랐다.
광해군 때에 이이첨을 소척하다가 유배되었다. 귀양에서 풀려 돌아온 후에 임진강 상류 침류정(枕流亭) 옛터에서 여생을 보냈는데, 곧은 절개와 청렴하다는 명망이 한 세대의 으뜸이었다.
하재(霞齋) 조적명(趙迪命) 판서가 찬송하기를 “멀리 오직 충숙공이 아우와 함께 임금님 갈 길을 바로잡았네(遠惟忠肅弟同建日星標).”하였다. 배위 현부인 청주한씨(1582∼1649)는 청원위(淸原尉) 경록(景祿)의 딸이다.
풍산군의 3남으로 처음에 귀원부수(龜原副守)로 제수되고, 정의대부 귀원군에 올랐다.
광해군 때에 이이첨을 소척하다가 유배되었다. 귀양에서 풀려 돌아온 후에 임진강 상류 침류정(枕流亭) 옛터에서 여생을 보냈는데, 곧은 절개와 청렴하다는 명망이 한 세대의 으뜸이었다.
하재(霞齋) 조적명(趙迪命) 판서가 찬송하기를 “멀리 오직 충숙공이 아우와 함께 임금님 갈 길을 바로잡았네(遠惟忠肅弟同建日星標).”하였다. 배위 현부인 청주한씨(1582∼1649)는 청원위(淸原尉) 경록(景祿)의 딸이다.
귀천군(龜川君) 1569∼1645 파명:덕양군(德陽君)
  휘는 수(睟), 자는 명원(明遠), 시호는 충숙(忠肅).
덕양군의 손자이고 풍산군의 차남이다. 1583년(선조 16) 15세 때 귀천부정(龜川副正)이 되었다. 24세 되던 1592년 임진왜란 때 파천하는 어가를 뒤쫓아 서도(西道) 행재소에 나아가 선전관에 제수되고 명을 받들어 함경 분조(咸鏡分朝)로 나아가 이듬해 환도할 때까지 배위(陪衛)의 임무를 다하니 공의 충근(忠勤)을 모두가 우러렀다.
왜란 중 <선원록>이 흩어져 학식깊은 종영(宗英)으로 하여금 다시 편찬하게 할 때 공이 뽑히어 이를 주관하여 1604년(선조 37)에 완성하여 그 공으로 명선대부에 올랐다.
1611년(광해군 3)에 부친 풍산군이 별세하자 3년 시묘하고 탈상함에 귀천군에 봉해지니, 그 때 춘추 46세였다.
1608년 선조대왕이 재위 41년에 승하하자 세자 광해군이 보위를 이었다.
그 후 적신(賊臣) 이이첨(1560∼1623) 무리들의 간계로 모역(謀逆)의 죄목을 씌워 임해군 · 영창대군을 죽이고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을 사사하고 끝내는 인목대비를 폐하고자 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옥사(獄事) 뒤에서 간적(奸賊)들은 사당(私黨)을 조직하여 조정에서 외면하는 충량(忠良)의 선비들과 성균관과 삼사(三司)에서 그에게 아첨하는 동류(同類)로 채워 스스로 토역(討逆)의 충신이라며 나라 일을 함부로 하여 종사(宗社)의 위태로움이 극에 달았다.
이에 공은 1617년(광해군 9) 정월 초4일 분연히 “우리들의 종척(宗戚)으로서 의리상 나라와 함께 망할 참인 즉 말은 않고 죽기보다는, 차라리 말을 하다가 죽으리라.”하고 금산군(錦山君) 성윤(誠胤) 등 19인을 거느리고 앞장 서 소를 올리어 간적 이이첨을 논척(論斥)하니 신명을 돌아보지 않고 간적의 권세에 맞서 종사를 구하려 한 대절(大節)이었다.
충신 · 의사 등이 직언하고자 하여도 화가 당장에 미쳐, 부자형제라도 말이 이이첨에게 이르면 입 가리고 손 내저어 멸족됨을 경계하기까지 된 이 때, 종척은 국정에 간여하지 않는 법이라 해서 종사의 위망(危亡)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 하며 “오늘날의 삼사가 전하의 삼사입니까. 이이첨의 삼사입니까. 간적을 내치시어 종사를 안정케 하시고 다음으로 국가의 기강인 삼사의 악당을 다스리소서.”라고 한 이 정사소(丁巳疏)는 우국 충정의 극간(極諫)이었다.
이 소에 당황한 간적의 삼사가 벌떼같이 일어나 공을 국문(鞫問)할 것을 여러차례 계청(啓請)하였으나 광해군은 순천(順天)에 정배(定配)할 것을 허락하니 공은 그날로 출성시(出城詩)를 읊고 떠났다.
순천 배소에서 1년 쯤 후에 성 북쪽 대래곡(大來谷)으로 옮기어 손수 초가 한 칸을 얽어서 망북정(望北亭)이라 하고 아침 저녁으로 향북망배(向北望拜)하다가 5년 후인 1621년(광해군 13) 6월 귀양에서 풀려났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에 먼저 관작을 회복하고 두 품계를 올려서 사옹원 제조와 종친부 유사(有司)로 중용되었다.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 국왕이 공주로 피난할 때 호종하였으며, 정묘호란 때 강화도로 또한 어가를 호종하여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올랐다.
1645년(인조 23) 11월 21일 별세하니 인조대왕은 놀라 슬퍼하며 조제(弔祭)를 하사하고 현록대부로 증직하고, 1665년 (현종 6) 12월 27일 충숙(忠肅)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배위 군부인 동래정씨(1568∼1635)는 사도(司導) 첨정 증 승지 인수(麟壽)의 딸이다.
묘갈명과 유고집 <망북정 유사> · 신도비명 · 추모비가 있다. 전남 순천시 용당동 33번지에는 충숙공 망북정 유지비(遺址碑)가 있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궁내동이다.
덕양군의 손자이고 풍산군의 차남이다. 1583년(선조 16) 15세 때 귀천부정(龜川副正)이 되었다. 24세 되던 1592년 임진왜란 때 파천하는 어가를 뒤쫓아 서도(西道) 행재소에 나아가 선전관에 제수되고 명을 받들어 함경 분조(咸鏡分朝)로 나아가 이듬해 환도할 때까지 배위(陪衛)의 임무를 다하니 공의 충근(忠勤)을 모두가 우러렀다.
왜란 중 <선원록>이 흩어져 학식깊은 종영(宗英)으로 하여금 다시 편찬하게 할 때 공이 뽑히어 이를 주관하여 1604년(선조 37)에 완성하여 그 공으로 명선대부에 올랐다.
1611년(광해군 3)에 부친 풍산군이 별세하자 3년 시묘하고 탈상함에 귀천군에 봉해지니, 그 때 춘추 46세였다.
1608년 선조대왕이 재위 41년에 승하하자 세자 광해군이 보위를 이었다.
그 후 적신(賊臣) 이이첨(1560∼1623) 무리들의 간계로 모역(謀逆)의 죄목을 씌워 임해군 · 영창대군을 죽이고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을 사사하고 끝내는 인목대비를 폐하고자 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옥사(獄事) 뒤에서 간적(奸賊)들은 사당(私黨)을 조직하여 조정에서 외면하는 충량(忠良)의 선비들과 성균관과 삼사(三司)에서 그에게 아첨하는 동류(同類)로 채워 스스로 토역(討逆)의 충신이라며 나라 일을 함부로 하여 종사(宗社)의 위태로움이 극에 달았다.
이에 공은 1617년(광해군 9) 정월 초4일 분연히 “우리들의 종척(宗戚)으로서 의리상 나라와 함께 망할 참인 즉 말은 않고 죽기보다는, 차라리 말을 하다가 죽으리라.”하고 금산군(錦山君) 성윤(誠胤) 등 19인을 거느리고 앞장 서 소를 올리어 간적 이이첨을 논척(論斥)하니 신명을 돌아보지 않고 간적의 권세에 맞서 종사를 구하려 한 대절(大節)이었다.
충신 · 의사 등이 직언하고자 하여도 화가 당장에 미쳐, 부자형제라도 말이 이이첨에게 이르면 입 가리고 손 내저어 멸족됨을 경계하기까지 된 이 때, 종척은 국정에 간여하지 않는 법이라 해서 종사의 위망(危亡)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 하며 “오늘날의 삼사가 전하의 삼사입니까. 이이첨의 삼사입니까. 간적을 내치시어 종사를 안정케 하시고 다음으로 국가의 기강인 삼사의 악당을 다스리소서.”라고 한 이 정사소(丁巳疏)는 우국 충정의 극간(極諫)이었다.
이 소에 당황한 간적의 삼사가 벌떼같이 일어나 공을 국문(鞫問)할 것을 여러차례 계청(啓請)하였으나 광해군은 순천(順天)에 정배(定配)할 것을 허락하니 공은 그날로 출성시(出城詩)를 읊고 떠났다.
순천 배소에서 1년 쯤 후에 성 북쪽 대래곡(大來谷)으로 옮기어 손수 초가 한 칸을 얽어서 망북정(望北亭)이라 하고 아침 저녁으로 향북망배(向北望拜)하다가 5년 후인 1621년(광해군 13) 6월 귀양에서 풀려났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에 먼저 관작을 회복하고 두 품계를 올려서 사옹원 제조와 종친부 유사(有司)로 중용되었다.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 국왕이 공주로 피난할 때 호종하였으며, 정묘호란 때 강화도로 또한 어가를 호종하여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올랐다.
1645년(인조 23) 11월 21일 별세하니 인조대왕은 놀라 슬퍼하며 조제(弔祭)를 하사하고 현록대부로 증직하고, 1665년 (현종 6) 12월 27일 충숙(忠肅)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배위 군부인 동래정씨(1568∼1635)는 사도(司導) 첨정 증 승지 인수(麟壽)의 딸이다.
묘갈명과 유고집 <망북정 유사> · 신도비명 · 추모비가 있다. 전남 순천시 용당동 33번지에는 충숙공 망북정 유지비(遺址碑)가 있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궁내동이다.
귀흥군(龜興君) 1602∼ 1682 파명:덕양군(德陽君)
  휘는 섬(睒), 자는 정원(靜遠).
풍산군의 6남으로 처음에 귀흥부수(龜興副守)로 제수되었고, 승헌대부 귀흥군에 올랐다.
배위 현부인 예산박씨는 절충장군 예검(禮儉)의 딸이다.
풍산군의 6남으로 처음에 귀흥부수(龜興副守)로 제수되었고, 승헌대부 귀흥군에 올랐다.
배위 현부인 예산박씨는 절충장군 예검(禮儉)의 딸이다.
금릉정(金陵正) 1598∼1660 파명:덕양군(德陽君)
 휘는 요(矅).
풍천도정의 장남으로 처음에 금릉령(金陵令)으로 제수되고, 창선대부 금릉정에 이르렀다.
배위 신인 상주김씨는 춘수(春粹)의 딸이다.
풍천도정의 장남으로 처음에 금릉령(金陵令)으로 제수되고, 창선대부 금릉정에 이르렀다.
배위 신인 상주김씨는 춘수(春粹)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