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군파 4세 약사에는 총 3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상산군(商山君) 1572∼1651 파명:영산군(寧山君)
  휘는 준(濬), 자는 청원(淸源). 성종대왕의 현손이며 영산군의 증손이다. 1572년(선조 5) 3월에 출생하였고 1584년(선조 17) 창선대부 상산부령에 제수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 임금이 강화도로 옮기자 공은 솔선하여 전장에 나갔으며, 집의 재물을 내어 군사를 먹이고, 북을 쳐서 용기를 북돋아 대군(大軍)을 나아가게 하는 등 종친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였다. 이 공으로 1627년(인조 5)에 명선대부에 올랐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는데 공은 이미 늙었으나 임금을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가 함께 난을 겪으며 도왔다. 1651년(효종 2) 봄에 정의대부에 오르고 상산군에 봉해졌다. 그 해 5월 27일 상산(商山)에서 별세하니 향년 80세였다. 부음을 들은 임금은 특별히 예관에 명하여 제를 지내게 하였다.
영산군(寧山君) 1490∼1538 파명:영산군(寧山君)
  휘는 전(힜). 자는 공근(公謹), 시호는 충희(忠僖). 성종대왕의 13남이며 배위는 찬성(贊成) 심순로(沈順路)의 딸과 찬성 정홍선(鄭弘先)의 딸 및 주부(主簿) 황징(黃徵)의 딸이다.
진성대군(후의 중종대왕)이 잠저에 있을 때 연산군이 사냥을 핑계삼아 가해하고자 할 때 공은 충성과 기지와 용기로써 화를 면하였다. 그 때의 일로 `사람과 말이 때에 응했다\'라는 노래가 있었다 한다.
1506년(중종 1) 가을 중형인 회산군(檜山君)과 종사의 위급함을 걱정하고 창읍고사(昌邑故事)를 논하고 몇몇 중신들과 종사 회복을 위한 은밀한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연산군이 성 밖으로 사냥갔다 환궁할 때, 공은 백관을 거느리고 화혜왕후(성종대왕 계비)의 명임을 일컬어 성문을 가로막고 연산군을 들이지 않았다. 결국 연산군은 교동으로 물러나게 되었고 이어 중종대왕이 보위에 오르니 곧 중종반정이라 부르는 사실(史實)이다.
연산군 부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공은 회산군과 함께 임금께 아뢰고 교동으로 내려가 예를 갖추어 장사지내고 제사를 지내며 고유(告由)하는 말에서 “두 아우 염(恬), 전(힜)은 감히 백형 모관 부군께 말씀드립니다. 그 전날 울면서 간하였을 때에는 어찌 듣지를 않으시고 스스로 허물을 지으셨습니까. 비통함이 그지없습니다. 지극한 정은 살을 찢는 듯하고 옛 일을 돌이키며 지금을 생각하니 참으로 눈물 떨어짐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성문을 가로막고 죄를 따지며, 형을 놓아 보내고 아우를 세웠음은 마음이 어질지 않아서가 아니요 종사를 위함에서였으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존령은 노여움과 원망함을 지니지 마시옵소서.”
1523년(중종 18) 의정부의 관노가 “박영문(朴永文) 등이 영산군을 추대하여 반란을 꾀한다.”는 밀고를 하여 조의가 분분했는데 이에 연루되어 결국 공은 그 해 9월에 황해도 배천 땅으로 귀양갔다. 귀양지에 있을 때에는 자전(慈殿)이 누차 다시 기용하라는 분부가 있었고 임금도 양의(良醫)를 보내주라는 하교가 있었다.
1527년(중종 22) 정언(正言) 이홍간(李弘幹)은 세종대왕이 양녕대군을 방면한 고사를 진언하자, 중종대왕은 “영산군의 해를 꿰뚫는 충성은 내가 익히 아는 바이니라.” 하고 방환케 하니 그 해 11월이다.
그 후 공은 북한산록 진관벽촌의 경치좋은 곳에서 지내다가 1538년(중종 33)에 세상을 마치니 향년 49세였다.
진성대군(후의 중종대왕)이 잠저에 있을 때 연산군이 사냥을 핑계삼아 가해하고자 할 때 공은 충성과 기지와 용기로써 화를 면하였다. 그 때의 일로 `사람과 말이 때에 응했다\'라는 노래가 있었다 한다.
1506년(중종 1) 가을 중형인 회산군(檜山君)과 종사의 위급함을 걱정하고 창읍고사(昌邑故事)를 논하고 몇몇 중신들과 종사 회복을 위한 은밀한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연산군이 성 밖으로 사냥갔다 환궁할 때, 공은 백관을 거느리고 화혜왕후(성종대왕 계비)의 명임을 일컬어 성문을 가로막고 연산군을 들이지 않았다. 결국 연산군은 교동으로 물러나게 되었고 이어 중종대왕이 보위에 오르니 곧 중종반정이라 부르는 사실(史實)이다.
연산군 부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공은 회산군과 함께 임금께 아뢰고 교동으로 내려가 예를 갖추어 장사지내고 제사를 지내며 고유(告由)하는 말에서 “두 아우 염(恬), 전(힜)은 감히 백형 모관 부군께 말씀드립니다. 그 전날 울면서 간하였을 때에는 어찌 듣지를 않으시고 스스로 허물을 지으셨습니까. 비통함이 그지없습니다. 지극한 정은 살을 찢는 듯하고 옛 일을 돌이키며 지금을 생각하니 참으로 눈물 떨어짐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성문을 가로막고 죄를 따지며, 형을 놓아 보내고 아우를 세웠음은 마음이 어질지 않아서가 아니요 종사를 위함에서였으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존령은 노여움과 원망함을 지니지 마시옵소서.”
1523년(중종 18) 의정부의 관노가 “박영문(朴永文) 등이 영산군을 추대하여 반란을 꾀한다.”는 밀고를 하여 조의가 분분했는데 이에 연루되어 결국 공은 그 해 9월에 황해도 배천 땅으로 귀양갔다. 귀양지에 있을 때에는 자전(慈殿)이 누차 다시 기용하라는 분부가 있었고 임금도 양의(良醫)를 보내주라는 하교가 있었다.
1527년(중종 22) 정언(正言) 이홍간(李弘幹)은 세종대왕이 양녕대군을 방면한 고사를 진언하자, 중종대왕은 “영산군의 해를 꿰뚫는 충성은 내가 익히 아는 바이니라.” 하고 방환케 하니 그 해 11월이다.
그 후 공은 북한산록 진관벽촌의 경치좋은 곳에서 지내다가 1538년(중종 33)에 세상을 마치니 향년 49세였다.
중산군(中山君) 1587∼1661 파명:영산군(寧山君)
  휘는 연(演), 자는 형원(泂源). 영산군의 증손이다.
1604년(선조 37)에 창선대부 중산부령에 제수되었다. 1624년(인조 2)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하여 공주로 갔다. 이로 인해 부수에 올랐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 임금이 강화로 피난할 때 호종한 공으로 궁중에서 기르는 말을 하사받았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왕가를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굳게 지킬 계책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임금은 감탄하고 더욱 귀히 여기며, 정의대부 중산군을 제수하였다. 난 후 공신들의 훈공을 기록할 때, 공은 “국치를 당하여 종친으로서 나라 일에 죽지 못하였음을 한탄하고 있는데, 무슨 공적이 있어 오래도록 높고 귀한 자리에 있어야 하겠는가.”하고 굳이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1661년(현종 2) 중의대부에 제수되었으며, 그 해 11월에 상주에서 별세하니 향년 75세였다. 부음을 들은 임금은 부의를 내리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1663년(현종 4) 다시 승헌대부로 추증되었다.
1604년(선조 37)에 창선대부 중산부령에 제수되었다. 1624년(인조 2)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하여 공주로 갔다. 이로 인해 부수에 올랐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 임금이 강화로 피난할 때 호종한 공으로 궁중에서 기르는 말을 하사받았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왕가를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굳게 지킬 계책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임금은 감탄하고 더욱 귀히 여기며, 정의대부 중산군을 제수하였다. 난 후 공신들의 훈공을 기록할 때, 공은 “국치를 당하여 종친으로서 나라 일에 죽지 못하였음을 한탄하고 있는데, 무슨 공적이 있어 오래도록 높고 귀한 자리에 있어야 하겠는가.”하고 굳이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1661년(현종 2) 중의대부에 제수되었으며, 그 해 11월에 상주에서 별세하니 향년 75세였다. 부음을 들은 임금은 부의를 내리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1663년(현종 4) 다시 승헌대부로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