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산군파 4세 약사에는 총 7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무산군(茂山君) 1490∼1525    파명:무산군(茂山君)
  휘는 종(悰), 자는 낙지(樂之), 시호는 효정(孝貞). 어머니는 명빈 안동김씨로 1남 3녀를 두었다. 배위 군부인 평산신씨는 증 좌찬성 수(銖)의 딸이다. 8남 2녀를 두었다.
 공은 어려서는 학업에 정진하여 학문은 물론 서예에도 뛰어나 당세의 명필로 알려졌다. 또한 왕자로서 효행이 지극하였고 형제간에도 우애와 청렴으로 수신하였다. 공은 연산군 때 무오사화 · 갑자사화로 사림파가 대량으로 숙청당하고 음요학정(淫謠虐政)으로 국사가 날로 어지러워지는 것을 종친들과 탄식하며 대책을 논의하던 중 어머니 안동김씨가 신변의 위험함을 듣고 친정인 안동 춘양으로 피신하도록 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 후 중종반정에 의해 폐정개혁을 일으켜 새로운 기풍의 시대에 장동 옛집(현 서대문 로터리)으로 환가하였다. 그 후 학문과 서예에 전념하던 중 1525년(중종 20)에 36세로 한창 학예를 펴려고 할 때 애석하게 별세하였다. 묘소는 북한산이 시작되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울대리로, 어머니 명빈 김씨 묘하 술좌에 쌍폄장으로 모셔졌다.
 공의 12대손 예조판서 응진(應辰) 때에 이르러 `애친경형왈효(愛親敬兄曰孝), 청백자수왈정(淸白自守曰貞)\'하였던 기풍을 기리고자 홍문제학 김세균(金世均)이 시장(諡狀)을 찬하였고, 응진이 행장을 찬하여 효정(孝貞)의 시호를 받았다.
부안군(扶安君) 1524∼1598    파명:무산군(茂山君)
  휘는 석수(碩壽), 무산군의 6남이다. 처음엔 품계를 부안정을 받고 1554년 중종 승하 시 혼전(魂殿) 입직(入直)의 공으로 부안도정으로 품계가 올랐다가 후에 부안군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젊은 종친들을 지휘하여 선조의 몽진에 호가한 공으로 용만록선무종훈이 되었다. 1593년 10월 선조대왕이 의주 몽진에서 서울로 환도하니 선릉 · 정릉 두 능에 변이 있어 공은 아우 영원군(永原君)과 성혼(成渾)과 더불어 두 능에 봉심(奉審)하였는데 그 때 기록은 <승정원일기>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묘소는 서울 국립묘지 경내 동작동 신수산 신좌에 현부인 평강채씨와 합폄되었다. 배위 현부인 김해허씨와 배위 박씨 등에게서 여러 자손을 두어 무산군 후손 중에서 가장 번창하여 후대에 많은 자손과 공신을 두었다.
순평군(順平君) 1578∼1660    파명:무산군(茂山君)
  휘는 선봉(善鳳), 무산군의 6남인 부안군의 손자이다.
 처음 품계는 순평수로 받았다가 후에 군으로 진봉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대왕이 공주로 피난하는 데 호종하여 공산록진무훈(公山錄振武勳)이 되고 1636년(인조 14) 12월에 병자호란을 당하여 팔도에 교서를 내리고 남한산성을 굳게 방비하는 데 이바지하는 한편 봉림대군과 인평대군 두 왕자를 비롯한 비빈 종실과 남녀귀족들을 우선 강화로 피난하게 하고 임금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입성하였다.
 부인 현부인 영월엄씨는 자부 능성구씨와 어린 손자들과 노비를 거느리고 강화로 배행하던 중 호병을 만나 변을 당하게 되자 말하기를 “내가 오랑캐의 칼에 죽느니 의롭게 죽겠다.” 하고 몸에 지녔던 패도로 자결하였다. 그 때 자부 능성구씨는 두 아들과 같이 옆에 있었다. 자부 능성구씨는 8세 된 큰아들이 호병의 칼에 찔려 죽고 자신도 호병의 칼에 찔리자 옷을 벗어 참변의 상황을 혈서로 써서 가노에게 5살 된 둘째 아들 시번(時蕃)과 함께 집에 보내라 부탁하고 강물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이 때 시번이 할머니 시체 옆에서 통곡을 하니 호병이 창으로 찌르려 했으나 다른 호병이 어린아이를 해치지 못하게 하고 눈 속에 버리고 갔다.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아 지나가던 노파가 들여다보니 어린 소년이 엄씨 시체를 가리키며 “이 분이 저의 할머니”라고 울부짖어 통곡하므로 눈 속을 헤쳐 흙을 덮어 가매장했다가 후에 장사지냈다. 이런 일을 안 인조대왕이 영월엄씨와 능성구씨의 정려문을 세워 기렸다. 그 후 <부평향교지> 열녀편에 기록되었다. 한편 1637년 1월 30일 인조대왕이 삼전도에서 항복하고 난이 평정된 후 공은 승헌대부에 책봉되어 순평군이 되었다.
 묘소는 부평 당산 유좌에 배위 현부인 영월엄씨와 합폄하였으며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영천군(永川君) 1511∼1574    파명:무산군(茂山君)
  휘는 미수(眉壽), 자는 인노(仁老).
 배위 여산송씨가 일찍 별세하여, 명종대왕의 특명으로 무산군의 후사를 이으려 했으며, 문정왕후 승하시에는 직시(直侍 : 직접모심)하였다.
 천성이 온화하고 행적이 반듯했으며 항상 검소하고 사람 대하기를 예를 갖춰 차별하지 않아 종실의 귀공(貴公)으로 모범을 보이다가 병쇠하여 64세에 별세하였으며, 숭헌대부(崇憲大夫)에 책봉되었다.
 묘소는 선영옆에 합장하였으며 신도비가 있다. 후손으로 2녀를 두어 외손봉사 하다가 후사가 끊겼다.
춘계군(春溪君) 1557∼1620    파명:무산군(茂山君)
  휘는 원(췶), 시호는 정헌(靖憲). 무산군의 8남인 영원군의 차남이다.
 처음 품계가 춘계부령에서 춘계도정, 명선대부에 오르고 임진왜란 때 선조의 몽진을 호가하여 <호가용만록(扈駕龍灣錄)>에 원종공신으로 기록되고 그의 공을 높이 여겨 승헌대부 춘계군으로 증직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과천 설초동 청계산 하락교상 해좌에 장례지냈으나 1972년 3월 15일 충남 부여군 외산면 전장리 이정부락 화성군묘의 상편에 설치 봉안하였다.
 배위 현부인 연안이씨는 춘계군과 합폄하였다.
태안군(泰安君) 1520∼1592    파명:무산군(茂山君)
  휘는 팽수(彭壽). 무산군의 5남이다. 배위는 현부인 안산김씨로 나중에 군부인으로 추증되었다.
 오위도총부 부총관직에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상주에서 이일(李鎰) 순찰사의 패전과 충주에서 신립(申砬) 도순변사의 패전으로 난의 위급함을 직감하고, 70대의 노구를 이끌고 호종임무를 맡아 젊은 종친을 지휘하여 선조의 몽진을 임진강까지 호종하던 중 극심한 폭우속에서 호가를 앞세워 도강을 독려하고 순사하였다. 이로 인해 정의대부 태안군에 봉해지고 승헌대부 오위도총관에 추증되었다.
 자녀가 없어 태안군의 조카인 화릉군의 둘째아들 인원수(仁原守)를 갓 태어난 달에 데려와 양손으로 삼았다. 1579년 6월에 공의 부인이 별세하자 토을리(현 경기도 성남시 정자동)에 장례지냈다. 이 때 심한 장마로 3월장을 치른 양손 인원수와 양손의 부인 평산신씨는 3년상을 치르고 연이어 나이 어린 2남 2녀를 두고 사망하였다. 이로 인해 공은 양증손 경인(敬仁)이 11세 때 부모를 잃자 엄한 가훈으로 가르쳐 한강(寒崗)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학문에 전념하도록 보살피다가 임진왜란을 당하여 순사하였다. 그 뒤 양증손 경인이 학문과 덕행을 쌓아 정자동 지명 유래를 낳게 한 유덕으로 경기도 기념물 제118호로 지정되어 분당 신도시 개발에 따라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묘역을 발굴 학술조사하여 1991년 불곡산의 을진좌 신술향에 이전 복원하였다.
화릉군(花陵君) 1530∼?    파명:무산군(茂山君)
  휘는 수혜(秀蕙), 무산군의 3남인 영안정의 독자이다.
 화릉군이 첫아들 태산수(泰山守)를 낳은 후에야 숙부(叔父)인 부안군도 아들을 낳아 6형제를 두었다. 태산수를 낳고 이어서 인원수 · 덕원군 · 형산정 · 숭산수 · 화산군을 낳고, 1565년(명종 20)에 항산군을 낳으니 14년 사이에 7형제를 두었다.
 중종 후기와 인종 1년, 명종 시대를 사는 동안 김안로(金安老)의 전횡무도한 때 경빈 박씨의 폐위와 원사(怨死)사건, 을사사화, 왜구의 행패 등 혼란한 대내외의 정국속에서 신중히 처세하여 명선대부에 이르렀다.
 묘소는 서울시 은평구 진관내동 북한산 서문밖 중흥동 묘좌에 부인 견성이씨와 합폄했다.
 이 묘역은 화릉군의 봉군 명칭과 묘역의 형국이 일치한다는 점에서 명당이라고 하는 일화가 있다. `조산(祖山)은 북한산을 뒤로 하고, 도두(到頭)에서 입수(入首)가 잔잔히 순연(順延)을 이루어 잠잠히 잠기는 듯하다가 내외 득수(得水)를 끼고 좌룡(左龍) 우호(右虎)가 감싸안고 안산(案山)이 포근히 앞을 바쳐 주는 온기 있는 한가운데에 연화형(蓮花形)의 동산이 우뚝 솟아 묘좌유향(卯坐酉向)의 혈처가 있으니 이 어찌 꽃릉(花陵)이라 하지 않을까!\' 라고 할 만큼 감탄스런 묘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