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군파 4세 약사에는 총 8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견성군(甄城君) 1569∼1635    파명:전성군(全城君)
  휘는 현윤(賢胤), 자는 사학(士學). 전성군의 증손이며 낭성군의 아우이다.
 광해군이 모후를 폐위할 때 구천군을 주축으로 종친 19명이 단합하여 이이첨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릴 때 참여했다가 평산으로 귀양갔다.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신곡동 선영하에 있다.
 능성군(綾城君) [1574(선조 7)∼1660 현종 1)]
 휘는 명윤(明胤), 자는 사숙(士淑). 전성군의 증손이며 평양군의 아들이고 견성군의 아우이다.
 처음에는 능성부령이었고, 후에 군이 되었다. 광해군때 상소사건에 가담했다가 평강으로 유배되었다.
 배위는 현부인 파평윤씨와 전의이씨이다. 묘소는 실전되었다.
광천군(廣川君) 1510∼1588    파명:전성군(全城君)
  휘는 수기(壽麒), 자는 중서(仲瑞), 시호는 정헌(定憲). 전성군의 계자로 생부는 익양군(益陽君)이다.
 공은 1522년(중종 17) 전성군의 계자가 되어 숭헌대부로 군(君)에 올랐다. 1567년(명종 22) 명종대왕이 승하하자 제관에 복무했으므로 소덕대부 광천군으로 승급했다. 1569년(선조 2) 모친상을 당하여 상례를 정성껏 치렀다. 1588년(선조 21) 12월 7일에 별세하니 향년 79세였다. 조정에서는 2일간 조회를 폐하고 부의를 하사하여 이듬해 2월 13일 금천 고사리 선영하 경좌에 장례지냈다. 후에 정헌(定憲)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일패동 봉사골 선영 하 자좌이다.
 배위는 파평군부인 파평윤씨와 선성군부인 함창길씨이다. 광천군과 배위 두분이 합폄되어 있다.
낭성군(琅城君) 1561∼1623    파명:전성군(全城君)
  휘는 성윤(聖胤), 자는 사현(士賢). 전성군의 증손이며 평양군의 장남이다.
 처음에는 낭성부령에 제수되었다. 임진왜란 때 임금을 호종한 공으로 창선대부 낭성정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되고 난이 끝난 뒤에는 호성공신이 되어 정의대부 낭성군이 되었다. 광해군이 모후를 폐위시킬 때 구천군 등 종친 19명이 이이첨의 처벌을 상소했는데 이 일에 참여하여 정선으로 귀양갔다.
 배위는 현부인 계림이씨와 진주류씨와 연안차씨이다.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신곡동 산76번지이다.
선성군(宣城君) 1585∼1644    파명:전성군(全城君)
  휘는 신윤(愼胤), 자는 근부(謹夫). 전성군의 증손이자 광천군의 장손이다.
 처음에는 선성부령을 제수받았다. 광해군이 어머니를 폐위할 때 구천군(龜川君) 등 19명의 종친 중 1인으로 이이첨의 처벌을 상소했다가 평창으로 유배되었다. 나중에 정의대부 선성군이 되었는데 1644년 60세로 생을 마쳤다. 배위는 현부인 파평윤씨로 별좌 상은(相殷)의 딸이다. 묘소는 일패동 선영 하 자좌이다.
성산군(星山君) 1573∼1613    파명:전성군(全城君)
  휘는 의윤(義胤), 자는 자선(子善). 전성군의 증손이자 평릉군의 차남이며 의산군의 아우이다.
 광해군 때 상소 사건에 가담했다가 옥천으로 귀양갔다.
 배위는 현부인 연안이씨이다. 묘소는 옥천군 수일리에 있었으나 나중에 충남 연기군 남면 고정리로 이장했다.
 
영산군(寧山君) 1568∼1625    파명:전성군(全城君)
  휘는 예윤(禮胤), 자는 원효(源孝). 전성군의 증손이다.
 처음에는 영산부령을 받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대왕이 서울을 떠나 몽진할 때 개성까지 모시고 따라갔다. 개성에 도착하여 예관이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목청전 뜰에 묻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달려가다 적과 부딪쳐 오른쪽 귀를 다쳤으나 기어이 종묘의 신주를 짊어지고 행재소(行在所)까지 따라간 일이 있었다. 그 공으로 호성공신이 되고 정의대부 영산군으로 봉해졌다. 그리고 또 단서(丹書)와 철권(鐵券)을 하사받고 노비 등도 하사받았다. 그러나 오늘날 호성공신의 명단 속에 들어있지 않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배위는 화평군부인 광산김씨이다. 묘소는 미금시 양정동 봉사곡 자좌에 있다.
의산군(宜山君) 1570∼1622    파명:전성군(全城君)
  휘는 인윤(仁胤), 자는 자화(子火). 전성군의 증손이며 평릉군의 장남이자 낭성군의 종제이다.
 처음에는 의산부령을 받았으나 나중에 의산군이 되었다. 광해군 때의 상소 사건에 참여했다가 회인으로 유배되었다.
 배위는 현부인 무송윤씨이고 2남 1녀를 두었다. 묘소는 지금의 경기도 성남시 단대동에 있었는데 나중에 경기도 의왕시 고천동으로 이장했다.
전성군(全城君) 1490∼1505    파명:전성군(全城君)
  휘는 변(쮶), 자는 언보(彦甫), 시호는 숙민(肅愍). 성종대왕의 11남이다.
 어머니는 귀인 안동권씨(1471∼1500)로서 1남 1녀를 두었는데 1남은 전성군이고, 1녀는 경휘옹주로 영원위(鈴原尉) 윤내(尹쨸)와 혼인했다.
 전성군은 5세 때 부왕인 성종대왕이 승하하고 9세 때 군에 봉해졌고 11세 때 어머니상을 당하였다. 14세에 안동권씨를 배위로 맞이했다.
 전성군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천성이 온후하며 효행과 학문이 남달리 뛰어나 세인이 추앙하였는데 16세에 후사도 보지 못하고 1505년(연산군 11)에 별세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금천 고사리에 장례지냈다가 현 경기도 남양주시 일패동 봉사골 자좌로 이장했다.
 전성군은 후사가 없어 익양군의 차남 광천군으로 전성군의 대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