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군파 4세 약사에는 총 3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간성수(杆城守) 1546∼1593 파명:한남군(漢南君)
  간성수(杆城守) [1546(명종 1)∼1593(선조 26)]
휘는 격(格), 한남군의 증손자이다. 천성이 온화하고 순수하여 영민하고 민첩하여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고 남과 시비와 이해관계를 따져서 다투지 않았다.
공의 모친이 병이 들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드렸어도 돌아가시자 여묘살이 3년 동안 한 번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으며 상사를 당하여 장사지내는 사람을 도와주고 재앙과 악운을 당한 사람을 구제하여 급한 병에 기꺼이 양여하는 마음을 다하였다.
아들 넷을 두었는데 장남은 정시 을과(1576)에 올라 홍문관에 들어갔고 4남은 인제현감이 되었고 나머지는 선비로 자립하여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었다. 공은 임진왜란 때에 강서로 호가하다가 1593년(선조 26)에 삼화현에서 병으로 별세했다.
정승 오리(梧里) 리원익(李元翼 : 1547∼1634)이 지은 묘갈문과 가승보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휘는 격(格), 한남군의 증손자이다. 천성이 온화하고 순수하여 영민하고 민첩하여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고 남과 시비와 이해관계를 따져서 다투지 않았다.
공의 모친이 병이 들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드렸어도 돌아가시자 여묘살이 3년 동안 한 번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으며 상사를 당하여 장사지내는 사람을 도와주고 재앙과 악운을 당한 사람을 구제하여 급한 병에 기꺼이 양여하는 마음을 다하였다.
아들 넷을 두었는데 장남은 정시 을과(1576)에 올라 홍문관에 들어갔고 4남은 인제현감이 되었고 나머지는 선비로 자립하여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었다. 공은 임진왜란 때에 강서로 호가하다가 1593년(선조 26)에 삼화현에서 병으로 별세했다.
정승 오리(梧里) 리원익(李元翼 : 1547∼1634)이 지은 묘갈문과 가승보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공성군(功城君) 1537∼? 파명:한남군(漢南君)
  공성군(功城君) [1537(중종 32)∼ ? ]
휘는 식(植), 한남군의 증손이며, 호천군의 장남이다. 1618년(광해군 10) 무오사화에 대한 정청(庭請)에 불참으로 몰락당하여 호서와 경기지방을 피해 돌아다닌 것이 6년이었다. 한편 네살 아래인 동생 의성군(義城君)도 불의에 수난을 당했다. 의성군의 휘는 적(캞)으로 효행이 탁이하여 도정으로 승진하고 호는 낙초공(駱椒公) 삼양헌(三陽軒)이다. 처음에 유가 경서에 관한 학문으로 시예(試藝)에 뽑혔고 또 효행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어 영특한 종친으로 인망이 높았다. 1615년(광해군 7)에 아들이 동네사람들 모임에서 술주정으로 좌중의 사람을 꾸짖고 세상에 대한 말을 성내어 한 까닭에 흉악한 무리가 임금에게 급변이라고 무고하여 극형을 당할 처지였으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마침 백공(白公)의 `원굴(寃屈)하다\'는 글과 진공(陳公)이 `연로하며 효행이 있다\' 하여 드디어 죽음을 면하였다. 함경도 경흥으로 유배된 지 수년만에 또 전라도 곡성으로 이사하였다. 그 때 이미 춘추가 80세로 부인과 동갑이었다. 노인들이 서로 의지하여 생명을 같이하고 서울에서 북쪽으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다시 서울로 돌아온 노정이 무릇 7천여 리나 되었다. 게다가 길이 험난하여 걷기가 어려운 상태이고 태산준령과 망망대해에 또 서리와 이슬 속에 뒹굴고 엎어지고 하였으나 건강하고 무양하였다. 공성군 · 의성군 형제가 처음으로 인조대왕의 부름을 입어 포상을 받고 승진하였다.
휘는 식(植), 한남군의 증손이며, 호천군의 장남이다. 1618년(광해군 10) 무오사화에 대한 정청(庭請)에 불참으로 몰락당하여 호서와 경기지방을 피해 돌아다닌 것이 6년이었다. 한편 네살 아래인 동생 의성군(義城君)도 불의에 수난을 당했다. 의성군의 휘는 적(캞)으로 효행이 탁이하여 도정으로 승진하고 호는 낙초공(駱椒公) 삼양헌(三陽軒)이다. 처음에 유가 경서에 관한 학문으로 시예(試藝)에 뽑혔고 또 효행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어 영특한 종친으로 인망이 높았다. 1615년(광해군 7)에 아들이 동네사람들 모임에서 술주정으로 좌중의 사람을 꾸짖고 세상에 대한 말을 성내어 한 까닭에 흉악한 무리가 임금에게 급변이라고 무고하여 극형을 당할 처지였으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마침 백공(白公)의 `원굴(寃屈)하다\'는 글과 진공(陳公)이 `연로하며 효행이 있다\' 하여 드디어 죽음을 면하였다. 함경도 경흥으로 유배된 지 수년만에 또 전라도 곡성으로 이사하였다. 그 때 이미 춘추가 80세로 부인과 동갑이었다. 노인들이 서로 의지하여 생명을 같이하고 서울에서 북쪽으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다시 서울로 돌아온 노정이 무릇 7천여 리나 되었다. 게다가 길이 험난하여 걷기가 어려운 상태이고 태산준령과 망망대해에 또 서리와 이슬 속에 뒹굴고 엎어지고 하였으나 건강하고 무양하였다. 공성군 · 의성군 형제가 처음으로 인조대왕의 부름을 입어 포상을 받고 승진하였다.
한남군(漢南君) 1429∼1459 파명:한남군(漢南君)
  한남군(漢南君) [1429(세종 11)∼1459(세조 5)]
휘는 어(王於), 자는 군옥(群玉), 시호는 정도(貞悼). 세종대왕의 4남이며 혜빈 양씨의 3남 중 장남이다.
한남군은 성품이 순수하고 효도와 우애가 출천하며 그 처신이 단정하고 무거우며 검약하고 온공(溫恭)하며 바르게 경계하여 세상사람들은 추앙하였다.
1455년 음 6월 11일 단종대왕이 왕위를 물려줄 때에 어머니와 두 동생과 함께 화를 입었다.
혜빈 양씨는 참화를 당하고 장남 한남군은 귀양을 갔다. 금산으로부터 아산 · 양지 · 함양에 이르렀다. 1457년(세조 3)에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더불어 영 · 호남 선비들과 단종대왕 복위를 도모코자 비밀리에 결탁하였다. 한남군이 금성대군의 모사에 참여하였는데 일이 발각되어 금성대군은 처형되었고 한남군은 함양 안치소에 방금(防禁)조건을 강화하였다.
1)난간과 담장 밖에 녹각성(鹿角城 : 사슴의 뿔과 같이 대나무를 짜서 세워 적의 침입을 막는 성)을 설치하고
2)바깥문은 상시 자물쇠로 잠그고 조석의 음식은 10일에 한 번 급여하고 안에다 우물을 파서 용수를 급여하고 외인으로 하여금 상통하지 못하게 한다.
3)외인이 교통왕래하여 혹 물건을 주는 자는 도당으로 논죄하고
4)수령이 불시에 점검하여 문지기가 비위사실이 있으면 법에 의하여 처벌한다.
1459년(세조 5) 5월 29일에 함양에 안치된 한남군은 향년 31세로 순절하였다.
1457년(세조 3) 11월에 종부시에서 임금께 아뢰기를 “노산군(단종대왕)과 금성대군 · 화의군 · 한남군 · 영풍군은 죄가 종사에 관련되어 종적(宗籍)에서 마땅히 끊어내고 그 자손들은 <종친록>과 <유부록>에서 삭제하자”고 하여 이에 쫓았다. 이 일의 시말이 동토(童土) 윤순거(尹舜擧 : 1596∼1668)가 편저한 <장릉지(莊陵誌)>와 옛 재상인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 1564∼1635)가 지은 <호천군(湖川君) 묘비문>에 실려 있다.
휘는 어(王於), 자는 군옥(群玉), 시호는 정도(貞悼). 세종대왕의 4남이며 혜빈 양씨의 3남 중 장남이다.
한남군은 성품이 순수하고 효도와 우애가 출천하며 그 처신이 단정하고 무거우며 검약하고 온공(溫恭)하며 바르게 경계하여 세상사람들은 추앙하였다.
1455년 음 6월 11일 단종대왕이 왕위를 물려줄 때에 어머니와 두 동생과 함께 화를 입었다.
혜빈 양씨는 참화를 당하고 장남 한남군은 귀양을 갔다. 금산으로부터 아산 · 양지 · 함양에 이르렀다. 1457년(세조 3)에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더불어 영 · 호남 선비들과 단종대왕 복위를 도모코자 비밀리에 결탁하였다. 한남군이 금성대군의 모사에 참여하였는데 일이 발각되어 금성대군은 처형되었고 한남군은 함양 안치소에 방금(防禁)조건을 강화하였다.
1)난간과 담장 밖에 녹각성(鹿角城 : 사슴의 뿔과 같이 대나무를 짜서 세워 적의 침입을 막는 성)을 설치하고
2)바깥문은 상시 자물쇠로 잠그고 조석의 음식은 10일에 한 번 급여하고 안에다 우물을 파서 용수를 급여하고 외인으로 하여금 상통하지 못하게 한다.
3)외인이 교통왕래하여 혹 물건을 주는 자는 도당으로 논죄하고
4)수령이 불시에 점검하여 문지기가 비위사실이 있으면 법에 의하여 처벌한다.
1459년(세조 5) 5월 29일에 함양에 안치된 한남군은 향년 31세로 순절하였다.
1457년(세조 3) 11월에 종부시에서 임금께 아뢰기를 “노산군(단종대왕)과 금성대군 · 화의군 · 한남군 · 영풍군은 죄가 종사에 관련되어 종적(宗籍)에서 마땅히 끊어내고 그 자손들은 <종친록>과 <유부록>에서 삭제하자”고 하여 이에 쫓았다. 이 일의 시말이 동토(童土) 윤순거(尹舜擧 : 1596∼1668)가 편저한 <장릉지(莊陵誌)>와 옛 재상인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 1564∼1635)가 지은 <호천군(湖川君) 묘비문>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