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대군파 4세 약사에는 총 1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홍양정(洪陽正) ? ∼ ? 파명:금성대군(錦城大君)
  홍양정(洪陽正) [ ? ∼ ? ]
휘는 의(義), 자호는 망월정(望越亭). 대군의 증손이며 동평군의 아들이다. 청주 상당산(上黨山) 아래 내수(內秀) 건너편 모당(暮塘)이란 곳에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은경당(隱耕堂)\'이라 하였다. 또 격양산 아래 방곡천 위에 바위가 있어 그 위에다 정자를 짓고 `망월정(望越亭)\'이라 이름하고, 자호(自號) 또한 `망월정\'이라 하였다. 그리고 공은 망월정기(望越亭記)를 지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대군의 원통함을 풀지 못하여 아침 저녁으로 이 정자에 올라가서 동쪽을 바라보며 단종대왕의 옛일과, 증조부의 외로운 충성을 어찌 말하리오. 영월의 낙화암에 떨어진 궁녀의 넋, 밤마다 우는 소쩍새의 슬픈 울음, 봄 풀은 돋아 푸르른데 가신 왕손은 돌아오지 않고 그 유적만 남아 있으며, 왕조의 변천으로 흘렸던 피눈물이 마르지 않고, 신선으로 돌아간 후산 산호(쭖侯山 珊瑚) 갓끈의 그림자, 순(舜)임금이 간 창오(蒼梧)의 저녁 구름을 쫓지 못하고, 구의산(九疑山:순임금 산소가 있다는 산) 비슷한 수양산(首陽山)의 백이(伯夷) · 숙제(叔齊) 두 현자는 어디로 갔느뇨.
초(楚)나라 산과 진(秦)나라 산은 내가 생각할 바 아니요. 오직 우러러봄은 영월의 산일 뿐, 신운(神雲)과 백마(白馬)가 완연한 영월산의 곁이요, 무늬 아름다운 곤룡포가 오르내리는 장릉(莊陵) 숲 위요, 아아 증조 금성대군께서는 좌우로 호시(扈侍)하시고, 용사들이 칼 차고 준마로 전후를 호위하고, 산호 갓끈이 표표히 날으는 모습이 방불하게 보이니, 내 어찌 통곡하고 망배하지 않으리요.\'라고 적혀 있다.
1519년(중종 14)에 홍양정이 대궐 문앞에 짚자리를 깔고 엎드려, 대군의 억울함을 큰소리로 부르짖기를 석달 동안 계속하였다. 이 때에 임금에게 경전을 강의하던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1478∼1543)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금성대군은 왕조의 종실지친이요. 3대를 사죄(赦罪)하지 않아서, 그 자손들이 아직도 그 죄목에 묶여 있으니 불가하다고 사료되나이다. 너그럽게 용서하소서.”라고 하니 임금의 마음이 움직여 노적(奴籍)을 풀어 함종군 · 동평군 · 덕천군 · 홍양정 · 청리부정 3세 5작(三世五爵)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대군의 원통함은 풀지 못하여 공은 그 억울한 마음을 씻을 길 없어 망월정을 오르내리었다. 또 종신토록 서향하지 않고, 오직 동향하여 앉았다고 한다.
천지신명이 감응하여 그 후 219년이 지난 1738년(영조 14)에 복작되었다. 당시에 진사(進士) 한 분이, 홍양정의 평소 생활을 보고 동조해서 망미가(望美歌)를 지었으니, 망미의 `미(美)\'는 곧 임금을 뜻하였다.
“우리 임금님 바라보며, 노래 첫 곡조 길게 읊나니
시경(詩經) 간혜(簡兮)장의 진펄에는 감초, 산에는 개암 나무란 시귀(詩句).
우리 임금님 바라보며, 노래 둘째 곡조,
이소경(離騷經)의 황혼 무렵 만나자 기약한 것을.
우리 임금님 바라보며, 노래 셋째 곡조,
멀리서 화답하노니, 전적벽부(前赤壁賦)의 배바닥 두드리며 하는 가사(歌詞)를.
우리 임금님 바라보며, 노래 넷째 곡조.
푸른 깃으로 장식한 기(旗)와 더불어 황홀하게 임어(臨御)하는 영월의 하늘 가이로다.”
望美人兮歌一曲, 長吟쳚芩山榛詩.
望美人兮歌二曲, 又쵢黃昏遲暮期.
望美人兮歌三曲, 遙和赤壁叩舷詞.
望美人兮歌四曲, 翠華턫臨越天涯.
휘는 의(義), 자호는 망월정(望越亭). 대군의 증손이며 동평군의 아들이다. 청주 상당산(上黨山) 아래 내수(內秀) 건너편 모당(暮塘)이란 곳에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은경당(隱耕堂)\'이라 하였다. 또 격양산 아래 방곡천 위에 바위가 있어 그 위에다 정자를 짓고 `망월정(望越亭)\'이라 이름하고, 자호(自號) 또한 `망월정\'이라 하였다. 그리고 공은 망월정기(望越亭記)를 지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대군의 원통함을 풀지 못하여 아침 저녁으로 이 정자에 올라가서 동쪽을 바라보며 단종대왕의 옛일과, 증조부의 외로운 충성을 어찌 말하리오. 영월의 낙화암에 떨어진 궁녀의 넋, 밤마다 우는 소쩍새의 슬픈 울음, 봄 풀은 돋아 푸르른데 가신 왕손은 돌아오지 않고 그 유적만 남아 있으며, 왕조의 변천으로 흘렸던 피눈물이 마르지 않고, 신선으로 돌아간 후산 산호(쭖侯山 珊瑚) 갓끈의 그림자, 순(舜)임금이 간 창오(蒼梧)의 저녁 구름을 쫓지 못하고, 구의산(九疑山:순임금 산소가 있다는 산) 비슷한 수양산(首陽山)의 백이(伯夷) · 숙제(叔齊) 두 현자는 어디로 갔느뇨.
초(楚)나라 산과 진(秦)나라 산은 내가 생각할 바 아니요. 오직 우러러봄은 영월의 산일 뿐, 신운(神雲)과 백마(白馬)가 완연한 영월산의 곁이요, 무늬 아름다운 곤룡포가 오르내리는 장릉(莊陵) 숲 위요, 아아 증조 금성대군께서는 좌우로 호시(扈侍)하시고, 용사들이 칼 차고 준마로 전후를 호위하고, 산호 갓끈이 표표히 날으는 모습이 방불하게 보이니, 내 어찌 통곡하고 망배하지 않으리요.\'라고 적혀 있다.
1519년(중종 14)에 홍양정이 대궐 문앞에 짚자리를 깔고 엎드려, 대군의 억울함을 큰소리로 부르짖기를 석달 동안 계속하였다. 이 때에 임금에게 경전을 강의하던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1478∼1543)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금성대군은 왕조의 종실지친이요. 3대를 사죄(赦罪)하지 않아서, 그 자손들이 아직도 그 죄목에 묶여 있으니 불가하다고 사료되나이다. 너그럽게 용서하소서.”라고 하니 임금의 마음이 움직여 노적(奴籍)을 풀어 함종군 · 동평군 · 덕천군 · 홍양정 · 청리부정 3세 5작(三世五爵)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대군의 원통함은 풀지 못하여 공은 그 억울한 마음을 씻을 길 없어 망월정을 오르내리었다. 또 종신토록 서향하지 않고, 오직 동향하여 앉았다고 한다.
천지신명이 감응하여 그 후 219년이 지난 1738년(영조 14)에 복작되었다. 당시에 진사(進士) 한 분이, 홍양정의 평소 생활을 보고 동조해서 망미가(望美歌)를 지었으니, 망미의 `미(美)\'는 곧 임금을 뜻하였다.
“우리 임금님 바라보며, 노래 첫 곡조 길게 읊나니
시경(詩經) 간혜(簡兮)장의 진펄에는 감초, 산에는 개암 나무란 시귀(詩句).
우리 임금님 바라보며, 노래 둘째 곡조,
이소경(離騷經)의 황혼 무렵 만나자 기약한 것을.
우리 임금님 바라보며, 노래 셋째 곡조,
멀리서 화답하노니, 전적벽부(前赤壁賦)의 배바닥 두드리며 하는 가사(歌詞)를.
우리 임금님 바라보며, 노래 넷째 곡조.
푸른 깃으로 장식한 기(旗)와 더불어 황홀하게 임어(臨御)하는 영월의 하늘 가이로다.”
望美人兮歌一曲, 長吟쳚芩山榛詩.
望美人兮歌二曲, 又쵢黃昏遲暮期.
望美人兮歌三曲, 遙和赤壁叩舷詞.
望美人兮歌四曲, 翠華턫臨越天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