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령군파 4세 약사에는 총 1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후령군(厚寧君) 1404∼1455 파명:후령군(厚寧君)
  휘는 간(?), 시호는 희도(僖悼). 천성이 조신하고 신의가 두터워 어려서부터 의리를 중히 여겼다. 1455년 단종대왕이 선위할 때 신병을 이유로 군정에 나아가지 않았을 뿐 아니라 관을 쓰지도 않고 버선도 신지 않는 등 일부러 비정상적인 행위를 했다. 10월 6일에 조용히 자진하였다. 그래서 설해(雪海) 이의만(李義萬)은 공의 절의를 장려하여 말하기를 `사육신과 같다\'하였다.
1872년(고종 9)에 소덕대부(昭德大夫) 영종정경(領宗正卿)으로 추봉되었다.
배위는 무안군부인 평산신씨로 좌찬성 경종(敬宗)의 딸과 동양군부인 한양조씨로 2남을 낳았다.
공의 묘소는 처음에 연서(延曙 : 지금의 서울시 은평구 내)에 예장했었는데, 창릉(昌陵 : 예종의 능)의 내맥에 위치해 있다하여 1470년(성종 1) 경기도 시흥군 서면 박달리 유좌로 옮겼다. 그러나 그 근처 땅이 일제 때 모두 군용지로 수용되어 부득이 1941년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이목동 산19-1번지에 이장했다. 자손들은 충남 천안시 북면 명덕리 142번지에 사우를 짓고 매년 음력 10월 5일에 기신제를 봉행하고 있다.
1872년(고종 9)에 소덕대부(昭德大夫) 영종정경(領宗正卿)으로 추봉되었다.
배위는 무안군부인 평산신씨로 좌찬성 경종(敬宗)의 딸과 동양군부인 한양조씨로 2남을 낳았다.
공의 묘소는 처음에 연서(延曙 : 지금의 서울시 은평구 내)에 예장했었는데, 창릉(昌陵 : 예종의 능)의 내맥에 위치해 있다하여 1470년(성종 1) 경기도 시흥군 서면 박달리 유좌로 옮겼다. 그러나 그 근처 땅이 일제 때 모두 군용지로 수용되어 부득이 1941년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이목동 산19-1번지에 이장했다. 자손들은 충남 천안시 북면 명덕리 142번지에 사우를 짓고 매년 음력 10월 5일에 기신제를 봉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