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녕군파 4세 약사에는 총 5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근녕군(謹寧君) 1411∼1461 파명:근녕군(謹寧君)
  휘는 농(?), 시호는 희의(僖懿). 태종대왕의 4남으로 신빈 영월신씨 소생이다. 배위는 태안군부인(泰安郡夫人) 하양허씨로 황해도 관찰사 증 찬성(贊成) 지혜(之惠)의 딸이다. 3남 6녀를 낳으니 장남은 옥산군(玉山君), 차남은 우산군(牛山君)이다. 우산군은 온녕군(溫寧君)의 후로 출계했다. 3남 달천정(達川正)은 후사가 없다. 장녀는 직장 신상하(辛尙夏)에게, 차녀는 감찰 김현뢰(金賢賚)에게, 3녀는 부정 정석년(鄭錫年)에게, 4녀는 군수 증 참의 정수(鄭穗)에게, 5녀는 부사 증 도승지 김희(金僖)에게, 6녀는 판관 정윤공(鄭允功)에게 출가했다.
처음 정윤(正尹)에 봉해졌다가 1424년(세종 6) 10월 근녕군에 봉해지고, 세종대왕을 도운 공으로 익사공신(翊社功臣)으로 녹훈되었다. 1426년(세종 8)에 가정대부로, 1428년(세종 10) 7월에 종1품 군으로, 1430년(세종 12) 12월에 정1품 군으로 승계되었다.
어려서부터 시예(詩禮)를 좋아하고, 덕행이 있어 영예가 일찍부터 나타났으며 겸손하여 양녕·효령 두 대군의 지덕에 난형난제라 일컬었다.
단종대왕이 손위할 때 종실백관이 모여 동맹하는데, 혼자 정난공신(靖難功臣)에 맹훈하는 책에 서명하지 않고 관악산 연주대에 올라 14일간 절식하며 통곡하였다. 1461년(세조 7) 11월 15일에 “예장(禮葬)을 받지 말라”고 유언하고 향년 61세로 별세하였다. 세상에서 6종영(안평대군 · 금성대군 · 화의군 · 한남군 · 영풍군 · 하령군)에 들만하다고 하였다. 현손인 원굉(元紘)의 상소로 그 충성과 큰 공업이 종친 중에서 으뜸이었다는 비답(批答)이 내렸다. 1872년(고종 9)에 영종정경(領宗正卿)에 추봉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17번지 갑좌에 있다.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덕지리에 조부묘인 의덕사(懿德祠)에서 봉사하며, 공주시 계룡산 동학사 숙모전(肅慕殿)에 배향되고 영광 덕림사(德林祠)에 모셨다.
배위의 묘소는 서울시 관악구 신림6동 산156의 1호 건좌에 있다.
처음 정윤(正尹)에 봉해졌다가 1424년(세종 6) 10월 근녕군에 봉해지고, 세종대왕을 도운 공으로 익사공신(翊社功臣)으로 녹훈되었다. 1426년(세종 8)에 가정대부로, 1428년(세종 10) 7월에 종1품 군으로, 1430년(세종 12) 12월에 정1품 군으로 승계되었다.
어려서부터 시예(詩禮)를 좋아하고, 덕행이 있어 영예가 일찍부터 나타났으며 겸손하여 양녕·효령 두 대군의 지덕에 난형난제라 일컬었다.
단종대왕이 손위할 때 종실백관이 모여 동맹하는데, 혼자 정난공신(靖難功臣)에 맹훈하는 책에 서명하지 않고 관악산 연주대에 올라 14일간 절식하며 통곡하였다. 1461년(세조 7) 11월 15일에 “예장(禮葬)을 받지 말라”고 유언하고 향년 61세로 별세하였다. 세상에서 6종영(안평대군 · 금성대군 · 화의군 · 한남군 · 영풍군 · 하령군)에 들만하다고 하였다. 현손인 원굉(元紘)의 상소로 그 충성과 큰 공업이 종친 중에서 으뜸이었다는 비답(批答)이 내렸다. 1872년(고종 9)에 영종정경(領宗正卿)에 추봉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17번지 갑좌에 있다.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덕지리에 조부묘인 의덕사(懿德祠)에서 봉사하며, 공주시 계룡산 동학사 숙모전(肅慕殿)에 배향되고 영광 덕림사(德林祠)에 모셨다.
배위의 묘소는 서울시 관악구 신림6동 산156의 1호 건좌에 있다.
순안군(順安君) 1476∼1536 파명:근녕군(謹寧君)
  휘는 희(). 근녕군의 일곱 번째 손자이며 흥록대부 옥산군의 아들이다. 배위는 증 현부인 고령박씨이다. 공은 8남 4녀를 두었다. 아버지 옥산군이 1490년(성종 21)에 별세하자 15세 된 몸으로 자식된 도리를 다하여 효자로 이름이 났었다. 3년상을 마치자 정의대부 종2품에 올랐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내유동 분곡 후록 묘좌원에 배위와 합폄했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내유동 분곡 후록 묘좌원에 배위와 합폄했다.
시안군(始安君) 1446∼1509 파명:근녕군(謹寧君)
  시안군(始安君) [1446(세종 28)∼1509(중종 4)]
휘는 탁(擢), 자는 수정(秀精). 근녕군의 종손이며 옥산군의 장남이다. 어머니는 함안군부인 윤씨이고 배위는 선성현부인 파평윤씨이며 증 이조판서 지강(之崗)의 딸이다. 5남 1녀를 두었다.
공은 15세에 종실의 관례로써 3품 정(正)에 봉해졌고 세조 때에 선전관을 겸하였으며, 성종 때 특별히 종2품 군으로 봉해졌다. 33세에 사서삼경을 회강하여 입격되고 후에 정2품 중의대부에 올랐다. 1466년(세조 12)에 시안군(始安君)이 되어 종친의 강사(講射) 때 각궁(角弓)을 하사받았다. 50년간 벼슬을 했어도 청렴 · 강직했으며 효심이 깊었다. 또한 평생에 시와 술과 활쏘기, 말타기를 즐겼으며 일가친척을 후의로써 대하였다. 또한 친구를 공경으로서 사귀었으며 자식들을 훈계하되 옳은 도리로써 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 소재 아버지 묘의 백호등 기슭 유좌에 배위와 쌍봉했다.
휘는 탁(擢), 자는 수정(秀精). 근녕군의 종손이며 옥산군의 장남이다. 어머니는 함안군부인 윤씨이고 배위는 선성현부인 파평윤씨이며 증 이조판서 지강(之崗)의 딸이다. 5남 1녀를 두었다.
공은 15세에 종실의 관례로써 3품 정(正)에 봉해졌고 세조 때에 선전관을 겸하였으며, 성종 때 특별히 종2품 군으로 봉해졌다. 33세에 사서삼경을 회강하여 입격되고 후에 정2품 중의대부에 올랐다. 1466년(세조 12)에 시안군(始安君)이 되어 종친의 강사(講射) 때 각궁(角弓)을 하사받았다. 50년간 벼슬을 했어도 청렴 · 강직했으며 효심이 깊었다. 또한 평생에 시와 술과 활쏘기, 말타기를 즐겼으며 일가친척을 후의로써 대하였다. 또한 친구를 공경으로서 사귀었으며 자식들을 훈계하되 옳은 도리로써 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 소재 아버지 묘의 백호등 기슭 유좌에 배위와 쌍봉했다.
영인군(寧仁君) 1448∼1505 파명:근녕군(謹寧君)
  영인군(寧仁君) [1448(세종 30)∼1505(연산군 11)]
휘는 순(?), 자는 예옹(禮翁). 근녕군의 둘째 손자이다. 배위는 현부인(縣夫人) 하동정씨로 첨지중추부사 증 한성좌윤 육을(六乙)의 딸이다. 처음 부정(副正)을 제수받았으며, 세조대왕이 특별히 선전관 벼슬을 주었다. 예종대왕은 안핵사(按탢使)를 명하여 영남으로 파견해서 도적을 살피고 병사를 풀어 조사하게 하였다. 성종대왕이 즉위하여 종실의 학문을 시험할 때 공의 강론이 정통함을 알고 명선대부로 승진시켰고, 후에 종2품 정의대부(正義大夫)가 되었다. 함녕군(탂寧君)의 아들 덕성군(德城君) 민(敏)의 계자였다가 파양(破養)되었다.
묘소는 옥산군 묘 좌록 자좌에 배위의 묘와 쌍봉했다.
휘는 순(?), 자는 예옹(禮翁). 근녕군의 둘째 손자이다. 배위는 현부인(縣夫人) 하동정씨로 첨지중추부사 증 한성좌윤 육을(六乙)의 딸이다. 처음 부정(副正)을 제수받았으며, 세조대왕이 특별히 선전관 벼슬을 주었다. 예종대왕은 안핵사(按탢使)를 명하여 영남으로 파견해서 도적을 살피고 병사를 풀어 조사하게 하였다. 성종대왕이 즉위하여 종실의 학문을 시험할 때 공의 강론이 정통함을 알고 명선대부로 승진시켰고, 후에 종2품 정의대부(正義大夫)가 되었다. 함녕군(탂寧君)의 아들 덕성군(德城君) 민(敏)의 계자였다가 파양(破養)되었다.
묘소는 옥산군 묘 좌록 자좌에 배위의 묘와 쌍봉했다.
옥산군(玉山君) 1429∼1490 파명:근녕군(謹寧君)
  휘는 제(?), 자는 경보(敬甫), 시호는 공간(恭簡). 근녕군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태안군부인 하양허씨이다. 배위는 함안군부인 (咸安郡夫人) 함안윤씨로 첨지중추부사 증 찬성 함안군 공신(恭信)의 딸이다. 불연(佛緣)이 깊어 주야신도(主夜神圖)를 제작, 시주한 사례가 전하고 있다. 슬하에 8남 3녀를 두었다.
공은 나면서부터 체격이 크고 준수했다. 5조(문종 · 단종 · 세조 · 예종 · 성종)에 역사(歷事)하여 정1품 흥록대부에 이르렀다. 1442년(세종 24)에 통정대부 원윤(元尹)에 오르고, 1444년(세종 26) 관제(官制)가 이루어지자 명선대부 저천정(紵川正)에 올랐으며 옥산군에 봉해졌다. 1461년(세조 7) 근녕군이 돌아가자 3년을 시묘하였고, 복의기간이 다하자 정2품 군을 승습하고 승헌대부에 제수되었다. 그때 세조대왕이 원각사(圓覺寺)를 짓고자 하여 공을 대원각사(大圓覺寺) 영건도감(營建都監) 제조(提調)로 삼았다. 1469년(예종 1)에 종1품 가덕대부에 오르고 정1품 군으로 진봉되었다. 광릉(光陵)을 영장할 때 산릉사(山陵使)가 되었다. 1477년(성종 8) 사옹원 제조, 1481년(성종 12)에 행향사(行香使)로 흥천사에서 기우(祈雨)하고 1484년(성종 15) 소덕대부(昭德大夫)에 이어 이듬해 4월 광릉 종친으로 흥록대부에 이르렀다. 1489년(성종 20) 다시 문소전 도제조가 되었다. 1490년(성종 21) 7월 8일에 준수방, 지금의 누하동의 공저(公邸)에서 향년 62세로 별세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 선영의 서쪽 기슭 자좌에 있으며, 석물이 있다. 배위는 1496년(연산군 2)에 별세하여 쌍봉으로 예장되었다.
공은 나면서부터 체격이 크고 준수했다. 5조(문종 · 단종 · 세조 · 예종 · 성종)에 역사(歷事)하여 정1품 흥록대부에 이르렀다. 1442년(세종 24)에 통정대부 원윤(元尹)에 오르고, 1444년(세종 26) 관제(官制)가 이루어지자 명선대부 저천정(紵川正)에 올랐으며 옥산군에 봉해졌다. 1461년(세조 7) 근녕군이 돌아가자 3년을 시묘하였고, 복의기간이 다하자 정2품 군을 승습하고 승헌대부에 제수되었다. 그때 세조대왕이 원각사(圓覺寺)를 짓고자 하여 공을 대원각사(大圓覺寺) 영건도감(營建都監) 제조(提調)로 삼았다. 1469년(예종 1)에 종1품 가덕대부에 오르고 정1품 군으로 진봉되었다. 광릉(光陵)을 영장할 때 산릉사(山陵使)가 되었다. 1477년(성종 8) 사옹원 제조, 1481년(성종 12)에 행향사(行香使)로 흥천사에서 기우(祈雨)하고 1484년(성종 15) 소덕대부(昭德大夫)에 이어 이듬해 4월 광릉 종친으로 흥록대부에 이르렀다. 1489년(성종 20) 다시 문소전 도제조가 되었다. 1490년(성종 21) 7월 8일에 준수방, 지금의 누하동의 공저(公邸)에서 향년 62세로 별세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 선영의 서쪽 기슭 자좌에 있으며, 석물이 있다. 배위는 1496년(연산군 2)에 별세하여 쌍봉으로 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