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보군파 4세 약사에는 총 5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금주군(金州君) ? ∼ ? 파명:석보군(石保君)
  휘는 수견(壽堅), 석보군의 차남인 인양부정 정(整)의 4남이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김종서(金宗瑞)를 주살하고 이어 영의정 황보인(皇甫仁)과 이조판서 조극관(趙克寬) 등을 주살한 후에 친동생인 안평대군 부자를 강화도에 안치한 후 사사케 한 소위 계유정란이 발생했다. 이때 금주군은 이에 찬동 협력하여 훗날 세조대왕 등극에 공이 있어 봉군되었으나 정사에 마음이 없어 현 충북 충주시 소태면 양촌에 낙향하여 수려한 산수를 벗삼고 후손 훈육에 몰두하였다.
오늘날도 이 고장 사람들은 양촌마을 앞들을 `사갑들\'이라 하는데 이는 금주군 낙향 때에 하사받은 땅, 곧 사급(賜給)한 들이라 한 데서 전해졌다. 양촌마을에는 99칸의 금주군 저택인 고가가 6 · 25전쟁 전까지 잘 보존되어 오다 전쟁 당시 완전히 소실되었다. 묘소는 충북 중원군 소태면 중청용사 적곡 자좌향이다. 비석과 상석이 있다.
오늘날도 이 고장 사람들은 양촌마을 앞들을 `사갑들\'이라 하는데 이는 금주군 낙향 때에 하사받은 땅, 곧 사급(賜給)한 들이라 한 데서 전해졌다. 양촌마을에는 99칸의 금주군 저택인 고가가 6 · 25전쟁 전까지 잘 보존되어 오다 전쟁 당시 완전히 소실되었다. 묘소는 충북 중원군 소태면 중청용사 적곡 자좌향이다. 비석과 상석이 있다.
석양부령(石陽副令) ? ∼ ? 파명:석보군(石保君)
  휘는 계동(繼仝), 정혜공 석보군의 증손이며 수산수(守山守) 기(驥)의 장남이다. 대대로 경기도 파주에 살아 오다가 권신배들의 모함으로 그의 동생 거령부령(居寧副令) 계옹(繼翁)과 함께 진도로 귀양을 갔다. 1484년(성종 15) 귀양이 풀리어 동생인 거령부령은 진도에 그대로 머물고 공은 고향인 파주로 돌아올 때 전라도 태인을 지나다 보니 과연 그곳 산천과 광활한 농경지를 보고 이곳은 가히 머물 만하다고 생각하고 명금산(鳴琴山) 아래 초동(草洞)에 안주하고 농사를 지으며 학문을 닦았다. 65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성종대왕은 후한 예장을 명하고 사패지로 사방 7리를 하사하였다. 공의 묘는 전북 정읍시 태인면 정자리 초동에 있다. 품계는 창선대부에 이르렀다.
안읍부수(安邑副守) ? ∼ ? 파명:석보군(石保君)
  휘는 수리(壽利), 인양부정 정(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장형 괴산부수 수형(壽亨)은 송도에 살고 첫째 동생 보령부수 수정(壽貞)은 조졸했다. 세상사의 어수선함을 피하고 관직에도 뜻이 없어 서울을 떠나 충청도 지역으로 낙향하던 중 경기도 과천에서 산천이 수려하고 인심도 후한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공은 원래 재질이 총명하고 근면하여 대유(大儒)를 이루었다. 이를 전해 들은 임금이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아니하고 여생을 과천에서 마쳤다. 품계는 창선대부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성천령 승효(承孝)는 효성이 지극하였고, 손자 요(曜)는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통정대부까지 이르고 예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또 그 후손들은 대대로 그곳의 명문으로 문장이 계승되어 왔다.
귀중한 문집이 많이 보존되어 오다가 6 · 25 전쟁으로 모두 소실되거나 분실되었으니 참으로 선조에 대하여 민망할 따름이다. 다만 구전에 의해 기록하게 되니 그 유명한 시첩 한 권 소개하지 못하니 못내 아쉽기만 하다.
묘소는 경기도 안양시 호계동 산53번지 자좌 오향이다. 상석과 비석, 문관석이 있다.
그의 아들 성천령 승효(承孝)는 효성이 지극하였고, 손자 요(曜)는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통정대부까지 이르고 예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또 그 후손들은 대대로 그곳의 명문으로 문장이 계승되어 왔다.
귀중한 문집이 많이 보존되어 오다가 6 · 25 전쟁으로 모두 소실되거나 분실되었으니 참으로 선조에 대하여 민망할 따름이다. 다만 구전에 의해 기록하게 되니 그 유명한 시첩 한 권 소개하지 못하니 못내 아쉽기만 하다.
묘소는 경기도 안양시 호계동 산53번지 자좌 오향이다. 상석과 비석, 문관석이 있다.
영천군(鈴川君) ? ∼ ? 파명:석보군(石保君)
  휘는 원량(元良), 석보군의 증손이며 수산수의 3남이다. 천성이 따뜻하고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어릴 적부터 서예에 출중하여 세상 사람들이 신동이라 불렀다. 차츰 성장하면서부터 주자학에 능통하여 수신제가와 검소한 생활을 했다. 또 형제간에도 우애가 돈독하여 `사마지공(司馬之公) 형제\'라고 칭송을 들었다. 1462년(세조 8) 여름에 부친이 작고하니 효성이 지극한지라 삼복 중에도 질대를 풀지 않고, 풍우가 있어도 매일 묘소에 성곡하며 3년을 마쳤다. 그 후 내우거상(內憂居喪)에도 예절을 다하니 지금까지도 이 지방에서는 그의 법도와 예절이 전해져 내려 오고 있다.
공은 그 후 연산군의 폭정을 피하여 장연(長淵)으로 이주하여 여생을 보냈다. 작고한 지 10년 후에 묘지를 과천 한천동 자좌원으로 이장했다. 영천부령이었으나 1557년(명종 12)에 영천군 문혜공(文惠公)으로 봉군되었다.
공은 그 후 연산군의 폭정을 피하여 장연(長淵)으로 이주하여 여생을 보냈다. 작고한 지 10년 후에 묘지를 과천 한천동 자좌원으로 이장했다. 영천부령이었으나 1557년(명종 12)에 영천군 문혜공(文惠公)으로 봉군되었다.
영천군(靈川君) 1482∼ ? 파명:석보군(石保君)
  휘는 철수(哲壽), 석보군의 증손이며 사천령 연동(燕仝)의 차남으로 1482년(성종 13) 11월 25일에 태어났다. 공은 어릴 때부터 학업에만 정진하던 중 연산군의 폭정이 날로 심해짐에 따라 경기도 강화도로 들어가 주야로 주역을 읽어서 성리학에 능통하였다. 공은 관직에 뜻이 없었으며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 1493∼1564), 휴암(休菴) 백인걸(白仁傑 : 1497∼1579)과 교우하며 시를 짓고 풍월을 읊으며 세월을 보냈다.
명종대왕은 공의 학덕을 전해 듣고 가상히 여기어 누차 교지를 내려 불렀으나 공은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명종대왕은 애석하게 생각한 나머지 영천군 숭헌대부(崇憲大夫)를 내려 매년 녹미와 3백냥의 지세를 하사하였다. 초수(初授)는 감(監)이었다.
명종대왕은 공의 학덕을 전해 듣고 가상히 여기어 누차 교지를 내려 불렀으나 공은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명종대왕은 애석하게 생각한 나머지 영천군 숭헌대부(崇憲大夫)를 내려 매년 녹미와 3백냥의 지세를 하사하였다. 초수(初授)는 감(監)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