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군파 약사

임성군


정종대왕의 11남이며 휘는 호생(好生), 시호는 정혜(靖惠)이고 영종정경부사(領宗正卿府事)를 겸임하였다. 어머니는 숙의 충주지씨인데 고려 찬성사 윤(奫)의 딸이다.

공은 효성과 우애가 뛰어났으며 성품이 공손하고 온순하며 검소하므로 남을 상대하여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흠앙하고 공경하였다. 또 뜻을 <경서>와 <사기>에 두었고 오로지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오직 나라를 근심하는 성의로 태종대왕은 이를 가상히 여기어 특별히 임성군으로 책봉하였다.

공은 후사가 없어 석보군(石保君)의 3남 곡성군(鵠城君) 금손(金孫)을 계자로 맞았다. 곡성군은 9남을 두었는데 창선대부 함라수(咸羅守) 효원(孝元) · 창선대부 청당수(靑塘守) 효형(孝亨) · 창선대부 부계수 효리(孝利) · 나성령(奈城令) 성손(性孫) · 길창령(吉昌令) 성현(性賢) · 상산령(象山令) 성동(性仝) · 단밀령(丹密令) 성종(性終) · 증산령(甑山令) 효신(孝信) · 양근군(楊根君) 효충(孝忠)이다.

임성군의 5대손인 충이 고성현령(固城縣令)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을 맞아 1593년 1월 2일 용인에서 전몰하니, 전망록 2등공신에 책록되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배위 원주원씨는 부군이 전몰하였다는 부음을 듣고 즉일로 순절하니 아들되는 요신(堯臣)은 당시 7세였다.

고아가 된 요신에게는 충복이 있었으니, 그가 요신을 데리고 금강산 어느 사찰로 들어갔다. 요신은 그곳에 피난함과 동시에 학문을 닦아 일취월장하였으니, 임금은 이 사실을 알고 출사케 하여 승지에 이르 렀다.

임성군의 5대손 풍(馮) · 해(垓)와 6대손인 윤욱(允郁) 등이 임진왜란으로 모두 전몰하니 멸문지화를 당하여 집안이 산지사방으로 흩어져버렸다. 곡성군의 9남 중 후사가 이어진 집안은 첫째인 함라수, 셋째인 부계수, 여섯째인 상산령 이상 세 댁이고 청당수 · 나성령 · 길창령 · 단밀령 · 증산령 ·양근군 이상 6개 파는 후사가 없거나 실종되었다. 임성군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용암리 산68의 1에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5일 종친이 모여 시제를 올리고 동시에 종친회 총회를 연다.

임성군파보는 1792년(정조 6) <임자보>를 시작으로 하여, 1862년(철종 13) <임술보>, 1900년(광무 4) <경자보>, 1981년 <신유보>까지 4회 증보를 하였다. 1985년 11월에 종친회를 발족하여 묘의 수호와 위토 보존 및 종현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기로 결의하고 회장에 양구(養九)를 추대, 현 5대까지 잇고 있다.


종원 분포 상황

지역별
세대수
서울시
350
경기 포천 / 양주 / 의정부 / 가평
262
강원 철원
105
충북 괴산
140
충남 대전 / 논산 / 공주
718
전북 완주
245
합계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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