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천군파 약사
덕천군 후생(厚生 : 1397∼1465)은
정종대왕의 10남으로 어머니는 성빈(誠嬪) 지씨(池氏)이며, 배위는 고택군부인(高澤郡夫人) 장수이씨이다. 슬하에 4남 6녀를 두었으니 장남 신종군(新宗君), 차남이 부윤도정(富潤都正), 3남 운수군(雲水君), 4남 송림군(松林君)이다. 장녀는 창녕성씨 찬(瓚)에게 출가하니, 그의 차남 성희안(成希顔 : 1461∼1513)이 중종반정의 주역이 되어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될 때 외숙인 운수군과 외사촌인 안현군(安賢君 : 松林君의 차남)을 반정에 참여케 하여 다같이 공신이 되었다.
신종군 효백(孝伯 : 1416∼1487)은 덕천군의 장남으로 9남을 두었다. 장남 완성군(莞城君)도 9남을 두니 제4남 함풍군(咸豊君)의 후손들이 덕천군파의 명예를 드날렸다.
완성군의 차남 상산군(商山君) 후손 중에서 억손(億孫 : 1497∼1538) · 응(凝 : 1535∼?) · 준(準 : 1545∼1624) · 명윤(命允 : 1804∼1863) · 익년(翼年 : 1652∼1706) · 규년(奎年 : 1655∼1719) · 기임(基任 : 1713∼?) · 덕주(德周 : 1617∼1682) · 명은(命殷 : 1627∼1685)의 9명이 문과급제를 했는데 전성부원군(全城府院君) 준(準)이 공신으로서 유명하고, 교리(校理) 명윤(命允)은 진주민란의 정신적 지도자로 유명하다. 그밖에 응(凝)의 손자 성부(聖符 : 1583∼1624)는 무과출신으로 수원부사로 있을 때 이괄(李适 : ?∼1624)의 난을 당하자 출전하여 황해도 금천(金川) 저탄(渚灘)에서 반란군과 싸우다 순직하여 충신이 되었고, 익년(翼年)의 증손 헌길(獻吉 : 1738∼1784)은 영조 때 명의(名醫)로서 천연두와 홍역 치료의 공로가 있어 의학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완성군의 4남 함풍군은 외아들 수광(秀光 : 1507∼1561)을 두고 수광은 유신(惟信 : 1534∼1614) · 유서(惟恕 : 1545∼1627) · 유간(惟侃 : 1550∼1634)의 3남을 두었는데, 큰집인 유신 후손 중에서는 문과급제자 성해(聖海 : 1699∼1741) · 시항(時沆 : 1678∼1739)과 운해(運海 : 1710∼1769) · 중해(重海 : 1717∼1774) 형제와 현옥(鉉玉 : 1696∼1770)의 5명을 배출했고, 둘째 유서의 후손에서는 상우(象祐 : 1824∼?) 1명뿐이며, 우곡(愚谷) 유간의 후손 중에서는 경직(景稷 : 1577∼1640)·경석(景奭 : 1595∼1671) 형제와 그 후손들이 자그만치 도합 34명이나 배출하여 우리 전주리씨 문중에서 소파로서는 단연 제일의 문과급제 집안의 영광을 차지하고 있다.
함풍군파의 두드러진 인물로는 호조판서를 지낸 석문(石門) 경직과 영의정을 지낸 백헌(白軒) 경석이 자연히 태두(泰斗)를 이루지만 정영(正英)·덕성(德成)·대성(大成)·진유(眞儒)·시원(是遠)·건창(建昌)은 석문의 직손이요, 진망(眞望)·광덕(匡德) 부자 문형(文衡)은 백헌의 직손으로 함께 관계(官界)에서 이름을 날렸다.
그래서 함풍군 후손들은 관계에서만 유명했을 뿐 아니라 문학·예술·사상·철학에서도 두드러져 명필(名筆)·명저(名著)와 타성들이 가학(家學)이라고 부르는 강화학파(江華學派)까지 형성하여 다른 파종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종파를 이루어냈다.
함풍군파는 사상적으로 소론파(少論派)다. 일찍이 석문공의 증손 진유(眞儒 : 1669∼1730)가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노론(老論) 4대신( 김창집(金昌集), 이건명(李健命), 이이명,사 조태채(趙泰采) )을 죽이라는 상소문의 소두(疏頭)가 되었기 때문에 영조대왕이 집권하여 1730년(영조 6) 장살(杖殺)되자, 아우 진검(眞儉 : 1671∼1727) · 진휴(眞休 : 1674∼1707) · 진급(眞伋 : 1675∼1747)·진위(眞偉 : 1681∼1770)도 일제히 벼슬을 버리고 강화도로 들어가 살아갈 터를 잡았다.
그래서 그 후손들은 출사(出仕)를 단념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힘써, 세상에서 말하는 육진팔광(六眞八匡)을 배출하게 되었다.
육진은 석문공 손 중에서 진순(眞淳 : 1678∼1738)·진수(眞洙 : 1684∼1732)·진유(眞儒)·진검(眞儉) · 진급(眞伋)과 백헌공 손 중에서 진망(眞望 : 1672∼1737)을 합쳐 말하며 팔광이란 석문공 손에서 광세(匡世 : 1679∼1756) · 광보(匡輔 : 1687∼1745) · 광려(匡呂 : 1720∼1783) · 광사(匡師 : 1705∼1777) · 광찬(匡贊: 1702∼1766)과 백헌공 손 중에서 광덕(匡德)·광의(匡誼 : 1697∼1746)·광도(匡度 : 1717∼1746)를 합쳐 칭한다.
이 육진팔광은 벼슬보다는 학문·예술로 더 유명하다. 원교(圓嶠) 광사의 글씨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와 쌍벽이요, 그의 아들 긍익(肯翊 : 1736∼1806)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은 <조선왕조실록>의 부족 분을 채워 주는 보서(寶書)이다.
또 북곡(北谷) 진유(眞儒)의 막내아우 진위(眞偉 : 1681∼1770)의 아들 광명(匡明 : 1701∼1778)은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 1649∼1736)의 손서(孫챢)가 되어 양명학을 배워 계자 충익(忠翊 : 1744∼1816), 손자 면백(勉伯 : 1767∼1830), 증손 시원(是遠), 현손 상학(象學 : 1829∼1889), 5대손 건창(建昌 : 1852∼1898) · 건승(建昇 : 1858∼1924) · 건방(建芳 : 1861∼1939) 등에게로 이어지며 강화학파(江華學派)를 형성했다. 특히 건창은 여한십가(麗韓十家) 중의 한 사람인 대문장가이며 청백리로서 나라가 망하자 종제 건방만을 남겨 놓고, 아우 건승과 함께 조국 광복을 위하여 북간도로 떠났다. 양명학의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실천한 것이다. 다만 종제 난곡(蘭谷) 건방은 장차 강화학을 이어갈 담원(쩚園) 정인보(鄭寅普 : 1892∼?)를 위해서 국내에 남아 강화학을 전승했다.
신종군의 차남은 신곡수(薪谷守)인데, 5남을 두었다. 장남 영창군(永昌君)의 아들 억상(億祥)이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판을 지냈고, 신곡수의 차남 심주군(沁洲君)의 3남 억기(億祺 : 1561∼1597) 장군은 전라우도 수군절도사로서 임진왜란 때 이순신을 도와 혁혁한 공로를 세워 덕천군파의 명예를 청사에 길이 빛내고 있다.
신종군의 4남 학성군(鶴城君)은 6남을 두었는데 문과급제자 5명을 배출했다. 형조참판 원(瑗 : 1543∼1628), 승지 척연(惕然 : 1591∼1663), 감찰 경윤(卿尹 : 1751∼1803), 현감 연정(演툘 : 1791∼1850), 이조참의 기헌(箕獻 : 1673∼1750). 그 중에서 척연은 학자로 저술을 남기기도 했다.
신종군의 6남은 장연령(長淵令)인데, 그의 손자 빈(贇 : 1532∼1592)과 빈의 아들 지강(之綱 : 1553∼1604)이 부자 문과급제자이다. 부자가 모두 군수밖에 지내지 않았지만 지강의 손자 상경(尙敬 : 1615∼1674)이 삼도통제사를 지냈고 상경의 현손 주국(柱國 : 1721∼1798)은 정조 때 형조판서까지 지냈다. 한편 장연령 후손들은 미술에 천재적인 자질이 있어 현재 미술에 종사하는 종원이 많고, 특히 지강의 아우 지기(之紀)의 후손들 중에서 청전(靑田) 상범 (象範) 화백을 배출했다.
신종군의 9남은 회진군(會津君)이다. 회진군의 손자 충원(忠元 : 1537∼1605)은 문과에 장원하여 호조판서까지 지냈는데, 임진왜란 때 조복(朝服)을 입고 걸어서 선조대왕을 모셨으므로 호성공신(毫聖功臣)에 책록되어 완양부원군(完陽府院君)에 봉해졌다. 또 완성군의 3남 변성군 후손 중길(重吉 : 1578∼1637)과 신종군의 8남 상산군(常山君) 후손 복경(復慶 : 1549∼?)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부윤도정 효숙(孝叔 : 1440∼1487)은 덕천군의 차남으로 동성수(童城守)를 비롯한 아들 6형제를 두었고 손자가 도합 16명이나 되었지만 오늘날 덕천군의 4남 중에서 종원수가 제일 적은 편이다. 문과 대과 급제자는 없지만 진사는 5명, 무과급제는 10명이나 된다. 참봉 3명, 도사 2명, 참의·부사 각 1명을 배출했는데, 통정대부·가선대부도 각각 1명씩이다.
운수군 효성(孝誠 : 1455∼1518)은 덕천군의 3남으로 중종반정의 2등공신이 되어 청사에 그 이름이 빛나고 있다.
배위는 상호군 천안전씨 염(念)의 딸이다.
운수군은 배위 전씨와의 사이에서 비성수 · 익화수 · 삼산수 · 영산수 · 청산령의 5남과 두 딸을 두었다.
장남 비성수는 2남을 두었는데 차남 영안부수의 후손만이 대를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운수군의 차남 익화수 철(轍 : 1479∼1543)은 청천부수 · 화림부수 · 구례부수 · 해양부수 · 양천부수 · 강진부수 · 청양부수 · 은진부수 · 강릉부수의 9남을 두었다. 그 중 5남 양천부수와 7남 청양부수가 후손이 없고 나머지 아들들은 후손이 성하여 오늘날 운수군 후손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
운수군의 3남 삼산수는 금산부수·순화부수 2남을 두어 후손들이 이어가고 있고, 4남 영산수는 화전부수 · 화성부수 · 화암부수 · 화양부령의 4남을 두었으나 장남 화전부수의 자손이 손자대에서 끊겼다. 운수군 5남 청산령의 후손은 화원수 · 화천감 · 화봉감의 3남을 두었는데 3형제의 자손들이 번성하고 있다.
이렇게 운수군은 아들 5명, 손자 20명인데, 4손자의 후손이 끊기고 나머지의 후손들이 오늘날의 운수군파를 이루고 있다.
운수군 후손 중에는 문과급제자로 대과에 3명, 소과 곧 생원시와 진사시에 도합 34명, 무과급제자 34명, 음관(蔭官) 27명, 효행(孝行) 15명이 있어 운수군파의 파세를 나타내고 있다.
오늘날 운수군 후손은 약 4,000세대 25,000명으로 사회 각 방면에서 활약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운수군이 공신인 핏줄을 받아 그 후손 중에는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친 충신이 많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혁혁한 공을 세운 종복(從福), 근매( 梅) · 정립(廷立) 형제, 형길(亨吉), 희룡(希龍) 등이 있고, 인조반정 때 운수군을 비롯하여 이인좌의 난 때 공신 휘진(彙晋) 등도 있어 절의(節義)를 중시한 종파라 할 수 있다.
송림군 효창(孝昌 : 1450∼1478)은 덕천군의 4남으로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다. 장남 동음수(洞陰守) 성손(盛孫)을 비롯한 아들 4형제와 손자 19명을 두었다. 송림군의 막내사위는 학자 김안국(金安國 : 1478∼1543)이다. 동음수(洞陰守)의 종손 흥종(興宗)은 임란(壬亂)에 의병장으로 서주대첩에 공을 세우고 관군의 장수가 되어 우림위장(羽林衛將)으로 또 대구부사를 거쳐 정유재란까지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송림군의 3남 처인도정(處仁都正)의 5남 함흥부수(咸興副守)의 손자인 창정(昌廷 : 1572∼?)이 문과에 급제하여 헌납·지평을 지낸 외에 무과 출신이 매우 많다. 송림군의 차남 안현군(安賢君) 성동(盛仝 : 1471∼?)이 중부 운수군과 고종사촌인 성희안을 따라 중종반정에 참가, 공신이 된 뒤 후손 중에서 충신이 많이 나왔다. 또 송림군의 3남 처인도정의 손자인 빈(빈 : 1537∼1603)과 그의 아들 광영(光英 : 1568∼1626) 부자의 충성은 역사에 길이 빛을 발휘하고 있다. 또 안현군의 5남 단천부령(端川副令) 주경 (周卿)은 피리의 명수로 청석골(靑石嶺)을 지나다가 임꺽정에게 붙들렸었는데 피리 소리에 감탄해 임꺽정이 살려 보내 주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이렇게 송림군 후손들은 학문·예술 등에서 두드러진 분들이 나타났지만 대체로 무관 출신이 많고 특히 공신의 후예로서 충절을 지킨 조상이 많은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이렇게 덕천군 후손이 발전해 내려온 결과를 통계해 보면 다음과 같다.영상(領相) 1명, 봉군(封君) 12명, 증군(贈君) 20명, 공신(功臣) 6명, 원종공신(原從功臣) 19명, 문형(文衡) 3명, 충신(忠臣) 9명, 판서(判書) 4명, 판윤(判尹) 8명, 도헌(都憲) 9명, 참판(參判) 18명, 유수(留守) 7명, 도총관(都總管) 6명, 감사(監司) 15명, 부윤(府尹) 4명, 지신(知申) 8명, 은대(銀臺) 22명, 전랑(詮郞) 8명, 대사간(大司諫) 7명, 좌우빈객(左右賓客) 각 3명, 한림(翰林) 9명, 남대(南臺) 2명, 은일(隱逸) 5명, 옥당(玉堂) 22명, 제학(提學) 6명, 어사(御史) 18명, 등단(登壇) 4명, 병사(兵使) 15명, 보양(輔養) 2명, 부원수(副元帥) 1명, 효자효부(孝子孝婦) 48명, 문과장원(文科壯元) 15명, 무과장원(武科壯元) 3명, 문과급제(文科及第) 57 명, 사마장원(司馬壯元) 11명, 의사(義士) 14명, 충신정려(忠臣旌閭) 2명, 열녀정려(烈女旌閭) 2명, 순절(殉節) 2명, 수직(壽職) 147명, 사시(賜諡) 17명이다.
이외에 문집이 많기로 유명하고 강화학파란 학맥을 형성한 파종이요, 특히 예술이나 저서의 한우충동(汗牛充棟)은 타성들도 추종을 불허한다고 자부한다.
종원 분포 상황
덕천군은 슬하에 4남 5녀를 두었으며 1983년도 족보상에 등재된 후손의 숫자는 다음과 같다.
- 1남 신종군의 자손 122,624명,
- 2남 부윤도정의 자손 2,693명,
- 3남 운수군의 자손 24,288명,
- 4남 송림군의 자손 17,450명 으로,
- 계 167,055명인 바 그 후에 탄생한 후손을 합하면 총 20만명에 육박할 것으로 추정된다.
파종회 연락처
대 표 | 병하 |
파 종 회 주 소 | 서울 금천구 벚꽃로 130 덕천회관 601호 |
연 락 처 | 02-808-44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