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령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49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우준(遇駿) 1801∼1867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초휘는 유준(有駿), 호는 몽유자(夢遊子). 대군의 12대손으로 한종(漢宗)의 아들이다.
품성이 온화하고 총명하였으며 학자의 가풍을 이어 받아 학문이 깊었다. 아버지의 권유로 서울에 유예(遊藝)하면서 1843년(헌종 9) 43세 때 성균관 생원에 올랐다. 시속(時俗)을 멀리 한 채 남을 원망하거나 세상을 탓하지 않고 한가로이 집필에만 전념하였다.
저술에는 인물 · 예술 · 기담(奇談) · 지리 등 71개 항목에 걸쳐 광범위하게 분류하여 편집한 야담집인 <몽유야담(夢遊野談)> 3권 3책을 비롯하여 시천(詩千) · 표천(表千) · 논백(論百) · 책백(策百) · 부5천(賦五千) · 의3천(義三千) 등 합하여 1만여 수에 이르고 만년에는 청나라 사신을 수행하여 다녀온 뒤 <연행록(燕行錄)>을 저술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교현리 이목동에 있다.
품성이 온화하고 총명하였으며 학자의 가풍을 이어 받아 학문이 깊었다. 아버지의 권유로 서울에 유예(遊藝)하면서 1843년(헌종 9) 43세 때 성균관 생원에 올랐다. 시속(時俗)을 멀리 한 채 남을 원망하거나 세상을 탓하지 않고 한가로이 집필에만 전념하였다.
저술에는 인물 · 예술 · 기담(奇談) · 지리 등 71개 항목에 걸쳐 광범위하게 분류하여 편집한 야담집인 <몽유야담(夢遊野談)> 3권 3책을 비롯하여 시천(詩千) · 표천(表千) · 논백(論百) · 책백(策百) · 부5천(賦五千) · 의3천(義三千) 등 합하여 1만여 수에 이르고 만년에는 청나라 사신을 수행하여 다녀온 뒤 <연행록(燕行錄)>을 저술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교현리 이목동에 있다.
원구(元龜) 1626∼1693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여서(汝瑞), 호는 관물재(觀物齋). 대군의 9대손이며 장제부정의 6대손으로 증 이조판서 지항(之恒)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평산신씨로 유수 감(鑑)의 딸이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 성주이씨로 참판 준구(俊耉)의 딸이다.
1650년(효종 1)에 진사를 하고 1662년(현종 3)에 전설사(典設司) 별검(別檢)을 제수받아 귀후서(歸厚署) 별제(別提)에 오르고 장례원 사평 · 의금부 도사 · 사복시 주부 · 호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667년(현종 8) 경산현감을 제수받아 치적을 남겨 1672년(현종 13) 통정대부에 승자되었으며 1677년(숙종 3) 연안부사에 영전되었다. 다음 해 해주목사를 거쳐 1680년(숙종 6)에는 안동부사를 지냈으며 다음해에는 양주목사를 맡았다. 그 후 파주 · 성천 · 평산 등지의 수령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묘소는 처음 지평현 용문산 아래에 장사했다가 수원 고동면(현 광주군 도척면) 추곡 술좌에 이장됐다. 영의정 간재(艮齋) 최규서(崔奎瑞)가 지은 신도비가 있다.
1650년(효종 1)에 진사를 하고 1662년(현종 3)에 전설사(典設司) 별검(別檢)을 제수받아 귀후서(歸厚署) 별제(別提)에 오르고 장례원 사평 · 의금부 도사 · 사복시 주부 · 호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667년(현종 8) 경산현감을 제수받아 치적을 남겨 1672년(현종 13) 통정대부에 승자되었으며 1677년(숙종 3) 연안부사에 영전되었다. 다음 해 해주목사를 거쳐 1680년(숙종 6)에는 안동부사를 지냈으며 다음해에는 양주목사를 맡았다. 그 후 파주 · 성천 · 평산 등지의 수령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묘소는 처음 지평현 용문산 아래에 장사했다가 수원 고동면(현 광주군 도척면) 추곡 술좌에 이장됐다. 영의정 간재(艮齋) 최규서(崔奎瑞)가 지은 신도비가 있다.
원달(源達) 1783∼1857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백심(伯深), 대군의 14대손이며 여양군의 아들인 전성군의 10대손으로 증 이조참판 현묵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청풍김씨로 판서 익휴의 딸이다. 배위는 증 정부인 풍천임씨로 판서 희존(希存)의 딸이다.
1835년(헌종 1) 증광시 을과에 급제하여 다음 해 도당록 회권에서 4점을 얻어 입록되었으며 1842년(헌종 8) 12월에는 사간원 대사간이 됐다. 1846년(헌종 12) 태천현감 재직시 평안도 청북 암행어사 박영보(朴永輔)의 서계(書啓)에 의거 근무태만으로 징계를 받았으며 다음 해 5월에는 흠차대신위문사로서 어첩(御帖)을 받들고 갔다가 돌아 왔다. 동 10월에 사간원 대사간에 기용되어 1852년 2월까지 근무하다가 가선으로 승계와 동시에 강화유수로 나갔다가 1852년(철종 3) 개성부유수로 전보되고 다음 해 10월 다시 대사간이 됐으며 1857년 4월 이조판서로 증직됐다.
묘소는 장단군 판부리 경좌에 있다.
자는 백심(伯深), 대군의 14대손이며 여양군의 아들인 전성군의 10대손으로 증 이조참판 현묵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청풍김씨로 판서 익휴의 딸이다. 배위는 증 정부인 풍천임씨로 판서 희존(希存)의 딸이다.
1835년(헌종 1) 증광시 을과에 급제하여 다음 해 도당록 회권에서 4점을 얻어 입록되었으며 1842년(헌종 8) 12월에는 사간원 대사간이 됐다. 1846년(헌종 12) 태천현감 재직시 평안도 청북 암행어사 박영보(朴永輔)의 서계(書啓)에 의거 근무태만으로 징계를 받았으며 다음 해 5월에는 흠차대신위문사로서 어첩(御帖)을 받들고 갔다가 돌아 왔다. 동 10월에 사간원 대사간에 기용되어 1852년 2월까지 근무하다가 가선으로 승계와 동시에 강화유수로 나갔다가 1852년(철종 3) 개성부유수로 전보되고 다음 해 10월 다시 대사간이 됐으며 1857년 4월 이조판서로 증직됐다.
묘소는 장단군 판부리 경좌에 있다.
원영(元榮) 1579∼1653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대군의 5대손이며 완림군(完林君) 해수(瀣壽)의 아들이다.
1606년(선조 39) 무과에 올라 총관이 되고 가선대부에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靖社) 3등 공신이 되고 오위도총부 도총관으로서 많은 공적을 남기고 완흥군(完興君)에 봉해졌다. 인조대왕은 정사공신 3등을 내리면서 교서에 “나를 사랑하여 환란을 함께 한 신하이고 너의 충의의 힘을 다함에 의뢰했노라. 이러므로 큰 공신의 칭호를 밝혀 은총의 헌장을 보이노라. 오직 너는 일을 당해서 웅장하게 날았으니 때를 만나 걸출하였도다. 연함호두(?촏虎頭)의 기상으로 빼어났고 용도표략(龍韜豹略)의 기발함도 간직하였네라.”고 하였다.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증직되고 임금은 예관 안명로(安命老)를 보내 치제하고 영정 한 폭을 그려 하사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에 있다.
1606년(선조 39) 무과에 올라 총관이 되고 가선대부에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靖社) 3등 공신이 되고 오위도총부 도총관으로서 많은 공적을 남기고 완흥군(完興君)에 봉해졌다. 인조대왕은 정사공신 3등을 내리면서 교서에 “나를 사랑하여 환란을 함께 한 신하이고 너의 충의의 힘을 다함에 의뢰했노라. 이러므로 큰 공신의 칭호를 밝혀 은총의 헌장을 보이노라. 오직 너는 일을 당해서 웅장하게 날았으니 때를 만나 걸출하였도다. 연함호두(?촏虎頭)의 기상으로 빼어났고 용도표략(龍韜豹略)의 기발함도 간직하였네라.”고 하였다.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증직되고 임금은 예관 안명로(安命老)를 보내 치제하고 영정 한 폭을 그려 하사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에 있다.
원의(瑗儀) 1834∼1896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사익(士益), 대군의 16대손이며 여양군의 아들 전성군의 12대손으로 증 남대지평 이조판서 태순(泰純)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연일정씨이며, 진사 남대지평 예환(禮煥)의 딸이다. 배위는 정부인 장흥고씨로 학진 제봉(學鎭霽峰) 경명(敬命)후인이다.
1856년(철종 7) 무과에 급제하여 비변 선전관을 지내고 1862년(철종 13) 훈련주부와 동년 도총경력(都摠經歷)과 부감파총(部監把總)을 역임하고 1865년(고종 2)에 병영우후(兵營虞侯), 1877년(고종 14)에 충익위장(忠翊衛將)에 올랐고 다음 해에 평안우후(平安虞侯), 1879년(고종 16) 청산첨사(靑山僉使)를 거쳐 1884년(고종 21) 당상 선전관이 되었으며, 1890년(고종 27)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형조판서 경우(景宇)에게 출계한 군부대신 봉의(鳳儀)는 동생이다.
묘소는 전남 영광군 대마면 복평리 사창 촌전 병좌이다.
1856년(철종 7) 무과에 급제하여 비변 선전관을 지내고 1862년(철종 13) 훈련주부와 동년 도총경력(都摠經歷)과 부감파총(部監把總)을 역임하고 1865년(고종 2)에 병영우후(兵營虞侯), 1877년(고종 14)에 충익위장(忠翊衛將)에 올랐고 다음 해에 평안우후(平安虞侯), 1879년(고종 16) 청산첨사(靑山僉使)를 거쳐 1884년(고종 21) 당상 선전관이 되었으며, 1890년(고종 27)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형조판서 경우(景宇)에게 출계한 군부대신 봉의(鳳儀)는 동생이다.
묘소는 전남 영광군 대마면 복평리 사창 촌전 병좌이다.
위달(渭達) 1758∼1833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사강(士剛), 초휘(初諱)는 홍달(弘達), 대군의 14대손이며 여양군의 아들 전성군의 10대손으로 증 규장각 직각 현경(顯經)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전주류씨 덕진(德鎭)의 딸이다. 배위는 숙부인 동래정씨로 순문(淳文)의 딸이다.
생원을 하여 1792년(정조 16) 식년 전시 을과에 급제하고, 1803년(순조 3) 홍문록 회권에서 3점을 얻어 입록되었으며 다음 해 2차 선발인 도당록 회권에서도 입격됐다. 1805년(순조 5) 검토관 재직시 순조대왕이 소대(召對)하여 강(講)을 마치고 “군자와 소인은 참으로 분별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충언은 귀에 거슬린다는 말로써 미루어 본다면 귀에 거슬리는 말은 충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인에 이르러서는 참소하고 아첨하는 작태를 쉽사리 분별할 수 있을 것 같은데도 실제 상황에 이르러서는 분간이 어려워지는 것을 면치 못하니 어떻게 하면 분명히 분별할 수 있겠는가?”하고 임금이 묻자 “충성된 곧은 말과 알랑거리며 아첨하는 말로써 분별할 수 있습니다.”하였다. 1809년(순조 9) 장령 당시 우의정 서용보(徐龍輔)의 상소를 가지고 논척하다 남해현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1826년(순조 26) 문관 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지에 올랐으며 그 후 규장각 부제학에 증직됐다.
묘소는 선산하에 있다.
생원을 하여 1792년(정조 16) 식년 전시 을과에 급제하고, 1803년(순조 3) 홍문록 회권에서 3점을 얻어 입록되었으며 다음 해 2차 선발인 도당록 회권에서도 입격됐다. 1805년(순조 5) 검토관 재직시 순조대왕이 소대(召對)하여 강(講)을 마치고 “군자와 소인은 참으로 분별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충언은 귀에 거슬린다는 말로써 미루어 본다면 귀에 거슬리는 말은 충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인에 이르러서는 참소하고 아첨하는 작태를 쉽사리 분별할 수 있을 것 같은데도 실제 상황에 이르러서는 분간이 어려워지는 것을 면치 못하니 어떻게 하면 분명히 분별할 수 있겠는가?”하고 임금이 묻자 “충성된 곧은 말과 알랑거리며 아첨하는 말로써 분별할 수 있습니다.”하였다. 1809년(순조 9) 장령 당시 우의정 서용보(徐龍輔)의 상소를 가지고 논척하다 남해현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1826년(순조 26) 문관 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지에 올랐으며 그 후 규장각 부제학에 증직됐다.
묘소는 선산하에 있다.
유령(幼寧) 1472∼1504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영지(寧之), 대군의 4대손이며 주계군(朱溪君) 심원(深源)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군부인 탐진안씨로 현령 근(瑾)의 딸이며, 배위는 증 정부인 하동정씨로 군수 여유(汝裕)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며 1495년(연산군 1)에 진사를 하고 다음해 별시 문과에서 을과로 급제했다. 예문관 검열을 거쳐 1498년(연산군 4) 홍문관 박사가 되고 이어 부수찬을 지냈다. 1501년(연산군 7) 홍문관 부교리에 이어 지평(持平) · 이조좌랑 · 이조정랑을 차례로 지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모함을 받아 아버지와 아우 유반(幼槃)과 함께 참혹한 화를 입었고, 작은 아우 유정(幼靖)과 아들 돈복(敦復)은 나이가 어려 죽음은 면했으나 종이 되는 등 온 집안이 화를 당하였다. 중종반정 이후 신원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신으로 정려됐다.
묘소는 충남 연산군 금암리에 단이 있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며 1495년(연산군 1)에 진사를 하고 다음해 별시 문과에서 을과로 급제했다. 예문관 검열을 거쳐 1498년(연산군 4) 홍문관 박사가 되고 이어 부수찬을 지냈다. 1501년(연산군 7) 홍문관 부교리에 이어 지평(持平) · 이조좌랑 · 이조정랑을 차례로 지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모함을 받아 아버지와 아우 유반(幼槃)과 함께 참혹한 화를 입었고, 작은 아우 유정(幼靖)과 아들 돈복(敦復)은 나이가 어려 죽음은 면했으나 종이 되는 등 온 집안이 화를 당하였다. 중종반정 이후 신원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신으로 정려됐다.
묘소는 충남 연산군 금암리에 단이 있다.
육(堉) 1572∼1637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사후(士厚), 호는 심원당(心遠堂), 대군의 7대손으로 청휘당 승(承)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고성이씨로 승지 경명(景明)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관후하여 도학군자의 기풍이 있었다. 일찍이 한강(寒岡) 정구(鄭逑) · 동강(東岡) 김우옹(金宇춳)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그 학행이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1608년(선조 41) 퇴계 · 율곡 · 회재 등 5현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사림들과 함께 올렸다. 1610년(광해군 2) 박이립(朴而立)이 정인홍의 사주를 받아 한강 등 사림들을 모함하여 해치려 한 일을 인조반정 후 조정에 고하여 중벌에 처하게 하였다. 1623년(인조 1) 한강의 언행록을 찬술하고 후배를 양성하며 유고 집필 등 저술에 힘썼다. <심원당집>이 전한다. 1794년(정조 18) 신계서원에 공의 4형제가 모두 배향되었다.
묘소는 경북 상주시 수륜면 신파리 뒷동산 축좌에 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관후하여 도학군자의 기풍이 있었다. 일찍이 한강(寒岡) 정구(鄭逑) · 동강(東岡) 김우옹(金宇춳)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그 학행이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1608년(선조 41) 퇴계 · 율곡 · 회재 등 5현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사림들과 함께 올렸다. 1610년(광해군 2) 박이립(朴而立)이 정인홍의 사주를 받아 한강 등 사림들을 모함하여 해치려 한 일을 인조반정 후 조정에 고하여 중벌에 처하게 하였다. 1623년(인조 1) 한강의 언행록을 찬술하고 후배를 양성하며 유고 집필 등 저술에 힘썼다. <심원당집>이 전한다. 1794년(정조 18) 신계서원에 공의 4형제가 모두 배향되었다.
묘소는 경북 상주시 수륜면 신파리 뒷동산 축좌에 있다.
윤(綸) 1619∼1686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여언(汝言), 대군의 9대손으로 증 대사헌 유양(有養)의 아들이다.
1673년(현종 14) 문과에 급제, 가주서가 되어 영부사 송시열(宋時烈)에게 입궐하라는 임금의 유시를 전하기도 했다. 1679년(숙종 5) 장령이 되고 이어서 헌납으로 체직되었다. 그 후 예조정랑이 되고 이어서 병조 · 호조 · 이조 정랑을 역임하고 광주목사가 되었다. 1685년(숙종 11) 9월 우부승지로 제수되었다.
묘는 홍주 명천리에 있다.
1673년(현종 14) 문과에 급제, 가주서가 되어 영부사 송시열(宋時烈)에게 입궐하라는 임금의 유시를 전하기도 했다. 1679년(숙종 5) 장령이 되고 이어서 헌납으로 체직되었다. 그 후 예조정랑이 되고 이어서 병조 · 호조 · 이조 정랑을 역임하고 광주목사가 되었다. 1685년(숙종 11) 9월 우부승지로 제수되었다.
묘는 홍주 명천리에 있다.
응우(膺宇) 1790∼1876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초명은 응소(膺紹), 자는 맹인(孟仁), 호는 석거(石渠). 대군의 15대손이며 밀산부수의 12대손으로 증 호조참판 정해(廷楷)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영일정씨로 하식(夏湜)의 딸이다. 배위는 정부인 벽진이씨로 정언 현(턁)의 딸이다.
문장과 덕행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경상도 관찰사는 효우(孝友)와 문학이 뛰어남을 조정에 품계하고, 암행어사는 시(詩) · 예(禮) 돈행(敦行)을 들어 임금에게 천거하여 능참봉으로 기용케 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후 벼슬이 높아져 돈녕부 도정에 이르렀고, 1874년(고종 11)에는 가선대부로 가자되어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묘소는 경북 영천군 금호읍 죽림사 우록 연화등 축좌이다. 묘지는 류석우(柳奭佑)가 지었다.
초명은 응소(膺紹), 자는 맹인(孟仁), 호는 석거(石渠). 대군의 15대손이며 밀산부수의 12대손으로 증 호조참판 정해(廷楷)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영일정씨로 하식(夏湜)의 딸이다. 배위는 정부인 벽진이씨로 정언 현(턁)의 딸이다.
문장과 덕행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경상도 관찰사는 효우(孝友)와 문학이 뛰어남을 조정에 품계하고, 암행어사는 시(詩) · 예(禮) 돈행(敦行)을 들어 임금에게 천거하여 능참봉으로 기용케 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후 벼슬이 높아져 돈녕부 도정에 이르렀고, 1874년(고종 11)에는 가선대부로 가자되어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묘소는 경북 영천군 금호읍 죽림사 우록 연화등 축좌이다. 묘지는 류석우(柳奭佑)가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