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천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25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이무(爾茂) [1687∼1737    파명:덕천군(德泉君)
 이무(爾茂) [1687(숙종 13)∼1737(영조 13)]
 자는 민보(敏甫), 호는 남촌(南村). 화림부수의 6대손이며 정립(廷立)의 증손이고 만욱(萬郁)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영조 때 오위장을 지냈다.
 배위는 언양김씨 이정(以鼎)의 딸이다.
 묘소는 전남 화순군 북면 서유리 산105 유촌(酉村) 왼쪽기슭 신좌에 있다.
익(익) 1639∼ ?    파명:덕천군(德泉君)
 익(썍) [1639(인조 17)∼ ? ]
 자는 제이(濟而), 운수군의 6대손이며 은진부수의 현손이고 극형(克馨)의 아들이다.
 진사시에 급제하여 현감을 지내다가 1673년(현종 14) 식년시 갑과에 장원급제하여 병조참의를 지냈다.
 배위는 현풍곽씨 천로(天老)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군 성곶 분대동 간좌이다.
익년(翼年) 1652∼1706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수보(壽甫), 덕천군의 10대손이며 증 통정대부 덕함(德咸)의 손자이고 증 가선대부 탁(퀺)의 차남이다. 진사로 1689년(숙종 15) 증광별시 병과로 급제, 진주목사 · 지평(持平)을 지냈다.
 배위는 승지 사천목씨 대성(大成)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 파주 감악산 서록 사기동에 있다.
장영(長英) 1610∼1678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자화(子華), 호조판서 경직(景稷)의 장남이다. 상주목사를 지냈고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증 좌찬성 연일정씨 직(?)의 딸로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증손녀이다.
 묘소는 서울시 관악구 남현동 산57의 10 오좌에 있다.
재의(載毅) 1772∼1839    파명:덕천군(德泉君)
 재의(載毅) [1772(영조 48)∼1839(헌종 5)]
 자는 여홍(汝弘), 호는 문산(文山). 주국 대장의 증손이며 응오(?五)의 아들이다. 1801년(순조 1) 생원시에 3등으로 급제했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썼다. 문집이 있다.
 배위는 여흥민씨 참봉 지혁(志爀)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백암면 양준리 경좌이다.
재형(載亨) 1786∼1836    파명:덕천군(德泉君)
 재형(載亨) [1786(정조 10)∼1836(헌종 2)]
 장연령 후손으로 주국(柱國)의 증손이며 가선대부 병사(兵使)를 지냈다. 배위는 경주김씨 노순(魯純)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구봉산하 을좌이다.
정(靖) [? ∼ ?    파명:덕천군(德泉君)
 정(靖) [? ∼ ?]
 신종군의 8남인 상산군의 증손. 무과에 급제, 수안군수 · 남포현감 · 김해부사를 지냈고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에 공을 세워 진무공신(振武功臣)이 되었다. 병자호란 때에는 중군(中軍)으로 남한산성에서 싸웠으며 승지(承旨)로서 소현세자를 모시고 심양에서 충절을 다해 시흥군(始興君)에 봉해졌다.
 묘소는 충남 천안시 광덕면 신흥리에 있다.
정립(廷立) 1558∼ ?    파명:덕천군(德泉君)
 정립(廷立) [1558(명종 13)∼ ? ]
 운수군의 현손이며 희평의 차남이고 근매의 아우이다.
 일찍이 형과 함께 무과에 급제, 봉사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근매와 함께 왕명을 받고 창의사가 되어 의병을 일으켜 진주에서 왜적을 토벌할 때 형이 먼저 적탄에 맞아 전사하자, 큰 소리로 외치면서 용감하게 적진으로 나아가 싸우다가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전남 보성군 율어면 기정(旗亭) 오른쪽 주로치(周老峙) 사봉동(四峯洞) 을좌에 초혼장을 지냈다. 선무공신에 책록되었다.
 배위는 김해김씨 시려(時麗)의 딸이다.
정영(正英) 1616∼1686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자수(子修), 호는 서곡(西谷), 시호는 효간(孝簡). 호조판서 경직(景稷)의 3남이다.
 1636년(인조 1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병자호란 후 세자가 볼모로 심양에 갈 때 사서(司書)로 시종했다. 귀국해서는 정언 · 수찬 · 응교를 역임하였다. 1649년 효종대왕이 즉위하자 다시 정언이 되었고 교리 · 헌납을 지냈다. 1651년 교리였을 때 술에 취한 채 경연에 나갔다가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으며, 그 후 겸사서 및 이조정랑을 지냈다. 1660년(현종 1)에는 대사간이 되었고 이듬해에 진위 겸 진향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1672년(현종 13) 한성부 판윤으로 다시 동지부사가 되어 청에 갔다가 이듬해에 귀국하였다. 1674년 현종대왕이 승하하자 산릉도감 당상(山陵都監 堂上)이 되었고, 이듬해 이조판서에 올랐다. 1677년(숙종 3) 형조판서로 시관(試官)이 되었으나 부정을 저지른 죄로 철원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후에 풀려 판돈녕부사가 되어 1685년(숙종 11) 기로소에 들어갔다.
 글씨가 뛰어났고 특히 전서(篆書), 주서(켩書)를 잘 썼다. 작품 글씨로는 민기 신도비(閔箕神道碑) · 통진 이순신 명량대첩비 · 해남 영안위(永安尉) 홍주원비(洪柱元碑) · 호판 이경직비(李景稷碑) · 판추(判樞) 김시양비(金時讓碑) · 괴산 감사 강홍중비(姜弘重碑) · 형참 이소한비(李昭漢碑) · 정여창비(鄭汝昌碑) · 예참 홍주국비(洪柱國碑) 등이 있다.
 배위는 청송심씨 부사 장세(長世)의 딸과 문화류씨 기선(基善)의 딸이다.
 묘소는 서울시 동작구 사당동 산44-23 유좌에 있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94호로 지정되었다.
정익(廷益) 1571∼1630    파명:덕천군(德泉君)
  전성부원군(全城府院君) 준의 아들. 생원시에 합격, 참봉을 거쳐 군수에 이르렀고 호성원종공신이 되었다. 집의(執義)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동지중추부사 삼척김씨 전(銓)의 딸과 광흥수(廣興守) 함평이씨 찬(燦)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남면 신산리(莘山里) 자좌에 있으며 표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