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양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75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질(耋) 1634∼1716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대로(大老), 귀천군의 손자이며, 봉산군의 차남이다.
1662년(현종 3)에 진사가 되고, 평창(平昌) 등 두 고을 벼슬을 역임하고 선공부정(繕工副正)이 되었으며,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1682년(숙종 8)에 부친 봉산군이 별세하자 공의 종훈(從勳)으로 흥록대부 오위도총부 도총관의 증직이 내렸다.
1712년(숙종 38) 당년 79세 생일 때 아침에 도정공(都正公) 당(堂), 참판공(參判公) 야(쉶), 판서공(判書公) 돈(墪), 도정공 서(叙+土)가 임지인 연안(延安)의 송도 · 황주 등 지방에서 서울로 모여 5형제가 한자리를 마련했는데, 수염과 눈썹이 다 희어졌고, 벼슬살이 인끈(綬)을 서로 빛내면서 장수를 축하하는 술잔을 들며 친히 손님을 맞이하여 주식(酒食)을 권하면서 한폭의 그림을 이루고, 일대의 명석(名碩)들이 한 권의 책을 지어 서로 시를 짓고 서문을 써서 “치대(治代)의 성사(盛事) 꾸밈이라.” 하였다.
배위 숙부인 청주한씨(1638∼1741)는 부사 휴(休)의 딸로 104세의 상수(上壽)를 누렸다.
79세 생일잔치 <연지회 도첩(連枝會 圖帖)>과 비문이 있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궁내동 산18번지이다.
1662년(현종 3)에 진사가 되고, 평창(平昌) 등 두 고을 벼슬을 역임하고 선공부정(繕工副正)이 되었으며,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1682년(숙종 8)에 부친 봉산군이 별세하자 공의 종훈(從勳)으로 흥록대부 오위도총부 도총관의 증직이 내렸다.
1712년(숙종 38) 당년 79세 생일 때 아침에 도정공(都正公) 당(堂), 참판공(參判公) 야(쉶), 판서공(判書公) 돈(墪), 도정공 서(叙+土)가 임지인 연안(延安)의 송도 · 황주 등 지방에서 서울로 모여 5형제가 한자리를 마련했는데, 수염과 눈썹이 다 희어졌고, 벼슬살이 인끈(綬)을 서로 빛내면서 장수를 축하하는 술잔을 들며 친히 손님을 맞이하여 주식(酒食)을 권하면서 한폭의 그림을 이루고, 일대의 명석(名碩)들이 한 권의 책을 지어 서로 시를 짓고 서문을 써서 “치대(治代)의 성사(盛事) 꾸밈이라.” 하였다.
배위 숙부인 청주한씨(1638∼1741)는 부사 휴(休)의 딸로 104세의 상수(上壽)를 누렸다.
79세 생일잔치 <연지회 도첩(連枝會 圖帖)>과 비문이 있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궁내동 산18번지이다.
충현(忠鉉) 1845∼ ? 파명:덕양군(德陽君)
  초휘는 상현(象鉉), 자는 덕삼(德三). 봉산군 경신(烱信)의 8대손이며 참판공 야(壄)의 7대손이다.
무과에 합격, 오위장에 이르렀다.
배위 숙부인 반남박씨(1843∼?)는 동지중추부사 종선(宗瑄)의 딸이다.
무과에 합격, 오위장에 이르렀다.
배위 숙부인 반남박씨(1843∼?)는 동지중추부사 종선(宗瑄)의 딸이다.
태현(泰鉉) 1836∼1900 파명:덕양군(德陽君)
 양정공 기익(箕翊)의 차남 증 참판공 시서(蓍瑞)의 4남 증 참판공 순제(舜濟)의 증손인 부사 증 자헌대부 병조판서 주성(周聖)의 계자이다.
무과에 급제, 자헌대부 지의금부사에 이르렀다.
배위는 정부인 능성구씨 승조(承祖)의 딸(1835∼1864)과 정부인 수원김씨(1841∼?)이다.
무과에 급제, 자헌대부 지의금부사에 이르렀다.
배위는 정부인 능성구씨 승조(承祖)의 딸(1835∼1864)과 정부인 수원김씨(1841∼?)이다.
홍겸(弘謙) 1786∼1851 파명:덕양군(德陽君)
  공은 덕양군의 9대손이다.
문과에 급제, 벼슬길에 나아갔다.
배위 문화류씨는 권중(權中)의 딸이다.
문과에 급제, 벼슬길에 나아갔다.
배위 문화류씨는 권중(權中)의 딸이다.
후(垕) 1611∼1668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자중(子重), 호는 남곡(南谷). 봉래군의 차남이다.
1633년(인조 11)에 사마시에 합격, 1643년(인조 21) 유학으로서 김상헌(金尙憲) · 리경여(李敬輿) 등을 재상에 임명할 것을 소청(疎請)하여 임용하게 하였다. 1644년(인조 22)에 정시 문과에 뽑혀 검열을 거쳐 괴원(槐院 : 승문원) · 한원(翰院 : 예문관) · 춘방(春坊 : 세자시강원) · 기성(騎省 : 병조) · 미원(薇垣 : 사간원) · 백부(栢府 : 사헌부)를 두루 역임했다. 1650년(효종 1)지평으로 춘추관 기주관이 되어 <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정언 · 문학 · 장령 등을 지내고, 1660년(현종 1) 고부사(告訃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집의 · 실록청의 편수관이 되어 <효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외직으로는 은진현감 · 금성군수 · 광주목사 · 홍주목사를 지냈고, 사명을 받들어 두번이나 여러 도의 시관이 되었으며, 암행어사도 역임했다.
효종대왕이 세자시절에 서연에서 힘없는 소리로 글을 읽거늘 공이 아뢰기를 “독서는 정미롭고 명백한 것이 필수이며 한 글자 한 구절이라도 방종하고 지나치지 않은 뒤에라야 글을 읽어 뜻을 구할 수 있습니다.”하였다.
1667년(현종 8) 홍양(洪陽) 임소에서 귀천군 충숙공의 시호를 연시(延諡)하였고, 같은 해에 사간(司諫)으로 내직에 들어왔다.
앞서 상신(相臣)이 임금이 몸을 굽히어 청(淸)나라 차사(差使)에게 애걸하도록 하여 허물을 임금에게 돌린 일이 있었는데, 다른 재상이 이를 바로잡지 못하였다. 같은 해인 1667년에 간신(諫臣) 이숙(李?) 등 7인이 아울러 그 상신을 탄핵하니, 임금은 그들이 대신인 까닭에 도리어 일곱 신하를 외직으로 내쫓아 버렸다. 이에 공이 일곱 신하의 죄가 없었음을 밝혀 구원하고, 이어서 상신의 일을 논함에 지극히 위엄이 있고, 엄격하고 격렬하니 임금이 더욱 노하여 이르기를 “이후(李垕)는 의리를 핑계하여 군상(君上)을 시험해 보는 것이라.”하고, 국경지대 온성(穩城)으로 귀양 보내기를 명령하니, 옥당(玉堂)과 양사(兩司)가 끈질기게 힘써 간하였으나 임금의 노여움을 풀지는 못했다.
오래지 않아 용서를 받아 유배지에서 돌아왔는데 당시의 사람들이 공을 8간신(八諫臣)의 한 사람으로 추중(推重)하였다.
1680년(숙종 6)에 아들 기석(箕錫)의 원종훈(原從勳) 추은(追恩)으로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예문관 직제학 상서원정(尙瑞院正)으로 증직되었다.
배위 증 숙부인 안동권씨(1609∼1682)는 증영의정 근중(謹中)의 딸이다.
묘갈명(墓碣銘)이 있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궁내동이다.
1633년(인조 11)에 사마시에 합격, 1643년(인조 21) 유학으로서 김상헌(金尙憲) · 리경여(李敬輿) 등을 재상에 임명할 것을 소청(疎請)하여 임용하게 하였다. 1644년(인조 22)에 정시 문과에 뽑혀 검열을 거쳐 괴원(槐院 : 승문원) · 한원(翰院 : 예문관) · 춘방(春坊 : 세자시강원) · 기성(騎省 : 병조) · 미원(薇垣 : 사간원) · 백부(栢府 : 사헌부)를 두루 역임했다. 1650년(효종 1)지평으로 춘추관 기주관이 되어 <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정언 · 문학 · 장령 등을 지내고, 1660년(현종 1) 고부사(告訃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집의 · 실록청의 편수관이 되어 <효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외직으로는 은진현감 · 금성군수 · 광주목사 · 홍주목사를 지냈고, 사명을 받들어 두번이나 여러 도의 시관이 되었으며, 암행어사도 역임했다.
효종대왕이 세자시절에 서연에서 힘없는 소리로 글을 읽거늘 공이 아뢰기를 “독서는 정미롭고 명백한 것이 필수이며 한 글자 한 구절이라도 방종하고 지나치지 않은 뒤에라야 글을 읽어 뜻을 구할 수 있습니다.”하였다.
1667년(현종 8) 홍양(洪陽) 임소에서 귀천군 충숙공의 시호를 연시(延諡)하였고, 같은 해에 사간(司諫)으로 내직에 들어왔다.
앞서 상신(相臣)이 임금이 몸을 굽히어 청(淸)나라 차사(差使)에게 애걸하도록 하여 허물을 임금에게 돌린 일이 있었는데, 다른 재상이 이를 바로잡지 못하였다. 같은 해인 1667년에 간신(諫臣) 이숙(李?) 등 7인이 아울러 그 상신을 탄핵하니, 임금은 그들이 대신인 까닭에 도리어 일곱 신하를 외직으로 내쫓아 버렸다. 이에 공이 일곱 신하의 죄가 없었음을 밝혀 구원하고, 이어서 상신의 일을 논함에 지극히 위엄이 있고, 엄격하고 격렬하니 임금이 더욱 노하여 이르기를 “이후(李垕)는 의리를 핑계하여 군상(君上)을 시험해 보는 것이라.”하고, 국경지대 온성(穩城)으로 귀양 보내기를 명령하니, 옥당(玉堂)과 양사(兩司)가 끈질기게 힘써 간하였으나 임금의 노여움을 풀지는 못했다.
오래지 않아 용서를 받아 유배지에서 돌아왔는데 당시의 사람들이 공을 8간신(八諫臣)의 한 사람으로 추중(推重)하였다.
1680년(숙종 6)에 아들 기석(箕錫)의 원종훈(原從勳) 추은(追恩)으로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예문관 직제학 상서원정(尙瑞院正)으로 증직되었다.
배위 증 숙부인 안동권씨(1609∼1682)는 증영의정 근중(謹中)의 딸이다.
묘갈명(墓碣銘)이 있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궁내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