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녕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52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우송(友松) 1626∼1671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여수(汝壽), 복성군의 6대손 의영(義英)의 아들이다. 절충장군 행 통정대부 호조참의를 하고, 증 숭정대부 용양위 부호군을 하였다.
묘소는 남포 불은면 동정 간좌이다. 배위는 숙부인 평양조씨로 달유(達惟)의 딸이다. 슬하에 행삼(行三) 1남을 두었다.
묘소는 남포 불은면 동정 간좌이다. 배위는 숙부인 평양조씨로 달유(達惟)의 딸이다. 슬하에 행삼(行三) 1남을 두었다.
운근(雲根) 1562∼1621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사앙(士昻), 모양군의 현손 중광(重光)의 아들이다. 벼슬은 부사에 이르렀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어등산 정산하 자좌이다. 배위는 숙인 연안송씨로 장사랑 대립(大立)의 딸이다. 슬하에 기수(耆壽) · 기영(耆英) 2남을 두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어등산 정산하 자좌이다. 배위는 숙인 연안송씨로 장사랑 대립(大立)의 딸이다. 슬하에 기수(耆壽) · 기영(耆英) 2남을 두었다.
운상(雲相) 1639∼1667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서향(瑞鄕), 은천군의 8대손 수재(岫栽)의 아들이다. 증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하였다.
묘소는 충남 공주시 이인면 노백동 임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고령신씨로 우후(虞候)의 딸이다. 슬하에 제송(齊松) · 제백(齊栢) · 제개(齊楷) 3남을 두었다.
묘소는 충남 공주시 이인면 노백동 임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고령신씨로 우후(虞候)의 딸이다. 슬하에 제송(齊松) · 제백(齊栢) · 제개(齊楷) 3남을 두었다.
원규(源奎) 1710∼1760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효중(孝中), 가림군의 9대손 상걸(尙傑)의 아들이다. 증 가선대부 좌참찬을 하였다.
묘소는 남면 과거동 오좌이다. 배위는 숙부인 분성김씨이다. 슬하에 계자 오순(五順)을 두었는데, 오순의 생부는 원재(源載)이다.
묘소는 남면 과거동 오좌이다. 배위는 숙부인 분성김씨이다. 슬하에 계자 오순(五順)을 두었는데, 오순의 생부는 원재(源載)이다.
원남(元男) 1588∼1627 파명:경녕군(敬寧君)
  정묘호란 때 김장생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킨 공으로, 증 가선대부 병조참판이다.
원성(源成) 1712∼1766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효숙(孝淑), 가림군의 9대손 상걸(尙傑)의 아들이다. 증 장례원 정이 되었다.
묘소는 아포면 불당곡 자좌이다. 배위는 숙부인 장수황씨이다. 슬하에 계자 점석(點碩) 1남을 두었는데, 점석의 생부는 봉의(鳳儀)이다.
묘소는 아포면 불당곡 자좌이다. 배위는 숙부인 장수황씨이다. 슬하에 계자 점석(點碩) 1남을 두었는데, 점석의 생부는 봉의(鳳儀)이다.
위상(緯常) 1672∼1726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문중(文仲), 모양군의 7대손 명삼(明三)의 아들이다. 1696년(숙종 22) 문과 급제하여 행 성균관 진사를 하고, 태학관 장의를 하였다.
묘소는 충북 음성군 생극면 대지공원 묘지이다. 배위는 의인 의령남씨로 세정(世禎)의 딸이다. 슬하에 효전(孝全) · 효걸(孝傑) · 효성(孝成) · 효달(孝達) 4남을 두었다.
묘소는 충북 음성군 생극면 대지공원 묘지이다. 배위는 의인 의령남씨로 세정(世禎)의 딸이다. 슬하에 효전(孝全) · 효걸(孝傑) · 효성(孝成) · 효달(孝達) 4남을 두었다.
유성(游誠) 1768∼1821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의용(宜用), 호는 미재(眉齋). 퇴촌(退村) 당규(堂揆)의 현손이다. 1804년(순조 4) 문과에 급제하여 양사(兩司) 헌납에 올랐다. 배위는 숙부인 해주정씨로 통덕랑 언경(彦慶)의 딸이다.
유신(庾信) 1554∼1621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원경(元景), 호는 소명재(小明齋). 복성군의 현손 용(鎔)의 아들이다. 문장이 뛰어나 일찍부터 이름이 나고, 진사(進士)였다.
묘소는 선영하 유좌이다. 배위는 영광류씨 현감 대승(大承)의 딸이다. 슬하에 준형(俊馨) 1남을 두었다.
묘소는 선영하 유좌이다. 배위는 영광류씨 현감 대승(大承)의 딸이다. 슬하에 준형(俊馨) 1남을 두었다.
유신(惟信) 1559∼1627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효경(孝景), 호는 퇴헌(退軒). 복성군의 현손 옥(鈺)의 아들이다. 1583년(선조 16) 생원과 진사에 모두 급제하고 5년 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우승지가 되었다. 행 임천군수 때 선정을 베풀어 군민이 송덕비를 세웠다. 도백이 이같은 사실을 듣고, 청백리로 포상할 것을 상주하였다.
묘소는 전남 곡성군 오곡면 장성동 안산 유좌이며, 묘갈명이 있다. 배위는 숙부인 경주김씨로 국주(國柱)의 딸이다. 슬하에 익형(益馨) · 극형(克馨) 2남을 두었다.
묘소는 전남 곡성군 오곡면 장성동 안산 유좌이며, 묘갈명이 있다. 배위는 숙부인 경주김씨로 국주(國柱)의 딸이다. 슬하에 익형(益馨) · 극형(克馨) 2남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