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성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79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진백(震白) 1622∼1707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태소(太素), 호는 서암(西巖)이다.
진사 · 가선대부 · 동지중추부사 · 증 호조참판을 지냈으며 글씨는 뛰어났으나 과거에는 급제를 못했다. <서암문집(西巖文集)> 2권이 전해지고 있으며 친필로 5언시 7수, 7언시 9수와 “손자 의춘이 영구보존토록 하라.”는 발문까지 붙어있는 유품이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 시 두 수를 소개한다.
1) 乳燕含靑蟲(유연함청충)
어미제비 푸른 벌레 물고서 오니
群雛開口受(군추개구수)
새끼들 입벌리고 받아 먹누나.
爾雖愛爾雛(이수애이추)
네 비록 네 새끼를 사랑하지만
蟲亦有其母(충역유기모)
벌레 또한 저들의 어미 있단다.
2) 白頭背負薪(백두배부신)
흰 머리로 등뒤에 나뭇짐 지고
?行顚復蹶(누행전부궐)
구부리고 가면서 자꾸 넘어져
及暮到柴門(급모도시문)
저물녘에 사립문에 당도하니
춹兒搖尾出(와아요미출)
꼬리를 흔들면서 삽살개 나와
<중략>
진사 · 가선대부 · 동지중추부사 · 증 호조참판을 지냈으며 글씨는 뛰어났으나 과거에는 급제를 못했다. <서암문집(西巖文集)> 2권이 전해지고 있으며 친필로 5언시 7수, 7언시 9수와 “손자 의춘이 영구보존토록 하라.”는 발문까지 붙어있는 유품이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 시 두 수를 소개한다.
1) 乳燕含靑蟲(유연함청충)
어미제비 푸른 벌레 물고서 오니
群雛開口受(군추개구수)
새끼들 입벌리고 받아 먹누나.
爾雖愛爾雛(이수애이추)
네 비록 네 새끼를 사랑하지만
蟲亦有其母(충역유기모)
벌레 또한 저들의 어미 있단다.
2) 白頭背負薪(백두배부신)
흰 머리로 등뒤에 나뭇짐 지고
?行顚復蹶(누행전부궐)
구부리고 가면서 자꾸 넘어져
及暮到柴門(급모도시문)
저물녘에 사립문에 당도하니
춹兒搖尾出(와아요미출)
꼬리를 흔들면서 삽살개 나와
<중략>
집(집) 1565∼ ?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사원(士源). 선성군의 5대손이며 준도의 아들 육의 동생이다.
1583년(선조 16)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정3품 통례(通禮)에 이르렀다. 또한 증직으로서는 증 통정대부 도승지 · 양관 직제학 · 상서원랑에 이르렀다.
1583년(선조 16)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정3품 통례(通禮)에 이르렀다. 또한 증직으로서는 증 통정대부 도승지 · 양관 직제학 · 상서원랑에 이르렀다.
창중(昌重) 1695∼1759 파명:선성군(宣城君)
  선성군의 10대손이고 노저 양원의 동생 양형의 6대손이며 증통정대부 좌승지 구주(九疇)의 아들이다. 함경도 무산부사를 지냈다. 1728년(영조 4)에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양무공신이 되었다.
춘영(春英) 1563∼1606 파명:선성군(宣城君)
 춘영(春英) [1563(명종 18)∼1606(선조 39)] 자는 관지(貫之), 호는 체소재(體素齋),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선성군의 4대손이고 도성수의 증손이고 의령도정 윤조의 아들이다. 1590년(선조 23)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추천을 기다리던 중 한림원 검열이 되었고 후에 종계변무의 서장관을 지냈다. 1591년(선조 24) 서인(西人) 송강 정철의 건저문제(建儲問題 : 정여립을 가혹하게 다룬 정철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동인들은 정철이 세자책봉을 주장하자, 당시 왕의 총애를 받고 있던 인빈김씨에게 정철이 세자책봉을 서두르는 것은 김씨소생인 신성군을 해치려는 음모라고 밀고, 김씨가 왕에게 알려, 왕이 정철을 비롯해 서인들이 좌천되거나 유배된 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도 삼수(三水)에 유배되었다가 임진왜란으로 풀려났다. 이 후 다난한 세상살이를 등지고 물러나 청주 심악산(深岳山)에서 살았으니 스스로 호를 `심악산인\'이라고도 했다. 글과 시가 뛰어났는데 저서를 여러 권 남겼다. <체소재 문집> 3권과 <사기요찬(史記要纂)> 7권, <해동사부(海東辭賦)> 등이 남아 있다. 문집 서문은 상촌(桑村) 신흠(申欽) · 김상헌(金尙憲) · 정수암(鄭壽菴)이 썼고 발문은 잠곡(潛谷) 김육(金堉)이 썼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에 있다.
택(澤) 1651∼1719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운몽(雲夢), 선성군의 8대손이고 증 사복정 극검의 현손이며 증 좌승지 창주의 증손, 서암 진백의 아들이다. 1675년(숙종 1)에 무과 급제했다.
6개도의 병사 · 통제사와 포도대장 및 훈련도정을 역임하다가 안주(安州) 임소에서 별세했다. 공은 부모 봉양에 힘써서 부친인 서암공과 절친한 노인들을 초빙하여 시와 노래로 즐겁게 해드려 주위에 소문이 자자했었다. 아들은 박직재(樸直齋) 의천(倚天), 의춘(倚春), 의중(倚重), 의경(倚卿)이 있다.
묘소는 충남 서산시 운산면 여미리 등고재 술좌에 있으며 신도비는 포암(圃巖) 윤봉조가 찬하였다. 시조(詩調) 두 수가 남아 있는데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감장새 작다 하고 대붕아 웃지 마라.
구만리 장천을 너도 날고 저도 난다.
두어라 일반 비조(飛鳥)니 네오 긔오 다르랴.
낙양재자(洛陽才子) 모드신 곳에 향촌무사(鄕村武士) 들어가니
백옥(白玉)싸힌데 돌더짐 갓다마는,
두어라 문무일체(文武一體)니 놀고 갈까 하노라.
6개도의 병사 · 통제사와 포도대장 및 훈련도정을 역임하다가 안주(安州) 임소에서 별세했다. 공은 부모 봉양에 힘써서 부친인 서암공과 절친한 노인들을 초빙하여 시와 노래로 즐겁게 해드려 주위에 소문이 자자했었다. 아들은 박직재(樸直齋) 의천(倚天), 의춘(倚春), 의중(倚重), 의경(倚卿)이 있다.
묘소는 충남 서산시 운산면 여미리 등고재 술좌에 있으며 신도비는 포암(圃巖) 윤봉조가 찬하였다. 시조(詩調) 두 수가 남아 있는데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감장새 작다 하고 대붕아 웃지 마라.
구만리 장천을 너도 날고 저도 난다.
두어라 일반 비조(飛鳥)니 네오 긔오 다르랴.
낙양재자(洛陽才子) 모드신 곳에 향촌무사(鄕村武士) 들어가니
백옥(白玉)싸힌데 돌더짐 갓다마는,
두어라 문무일체(文武一體)니 놀고 갈까 하노라.
해석(海錫) 1800∼1866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구숙(久叔), 초휘는 항석(恒錫). 호는 학로암(鶴老菴)이다. 선성군의 13대손이고 도성수의 12대손이며 경달(敬達)의 아들이다. 문사(文詞)가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며 과거를 보지 않고 후학을 기르는 데 힘써 여러 고을에서 훌륭한 선생으로 추앙되었다. 저서로는 <학로암유집(鶴老菴遺集)> 2책이 있다.
헌방(憲邦) 1582∼1627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군식(君式), 초휘는 경방(經邦). 1603년(선조 36) 임금이 공주로 갈 때 호가(扈駕)했다. 1624년(인조 2)에 사헌부 감찰과 은산현감을 지냈다.
형로(馨老) ? ∼1665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형보(馨甫). 선성군의 7대손이며 3대가 은일(隱逸)이었던 묵재(默齋) 덕광(德匡 : 1570∼1664)의 아들. 음관으로 감찰 · 통훈대부로서 동복현감을 지냈다.
우관(宇觀) [1624(인조 2)∼1694(숙종 20)]
자는 국빈(國賓). 선성군의 8대손이며 영상 노저 양원의 아우 양형의 현손이다. 정5품 통덕랑에 머물렀지만 동생 우익(宇益)과 같이 문학을 좋아했다.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 : 1610∼1669), 동토(童土) 윤순거(尹舜擧 : 1596∼1668), 유학자 박세채(朴世采 : 1631∼1695),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 1629∼1703) 등과 교유했다. 이 모두 <제현록(諸賢錄)>에 기록되어 있다.
우관(宇觀) [1624(인조 2)∼1694(숙종 20)]
자는 국빈(國賓). 선성군의 8대손이며 영상 노저 양원의 아우 양형의 현손이다. 정5품 통덕랑에 머물렀지만 동생 우익(宇益)과 같이 문학을 좋아했다.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 : 1610∼1669), 동토(童土) 윤순거(尹舜擧 : 1596∼1668), 유학자 박세채(朴世采 : 1631∼1695),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 1629∼1703) 등과 교유했다. 이 모두 <제현록(諸賢錄)>에 기록되어 있다.
홍주(弘胄) 1562∼1638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백윤(伯胤), 호는 이천(梨川),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선성군의 5대손이며 간성군수 극인(克仁)의 아들이다.
1582년(선조 15)에 진사, 의금부 도사를 지냈으며 1594년(선조 27) 문과 급제, 승정원 주서를 역임했다. 예조좌랑 · 이조좌랑 · 강서현령 · 성균관 사예 · 평양서윤을 지냈으며 부수찬 · 홍문관 교리 · 의주부윤 · 부승지 · 전라감사에 올랐다. 1618년(광해군 10)부터 1621년(광해군 13)까지 형조참의 · 사은사 · 병조참판 · 의금부지사를 역임하고 인조 때에는 도승지 · 도원수 · 대사헌 · 우참찬 · 지경연 · 호태감 접반사를 지냈다. 이어 대사헌 · 전주부윤 · 도승지 · 예조 · 병조 ·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1637년(인조 15)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인조대왕은 공을 칭송하기를 “경의 기량이 탁월하고 몸가짐이 깨끗하여 여러 사람이 심복한다.” “홍주의 위인이 담백하고 도량이 있으니 내실은 있어도 외화는 없다.”라고 하였다. 이는 예문관 대제학 경석(景奭 : 1595∼1671)이 쓴 묘지명에 나와 있다.
또한 필재가 출중하여 문묘의 중수비를 임금의 명을 받고 썼으며 인목대비 국장 때에는 서사관(書寫官)을 맡았다. 아들로는 헌방(憲邦)과 안방(安邦) 둘을 두었다.
1582년(선조 15)에 진사, 의금부 도사를 지냈으며 1594년(선조 27) 문과 급제, 승정원 주서를 역임했다. 예조좌랑 · 이조좌랑 · 강서현령 · 성균관 사예 · 평양서윤을 지냈으며 부수찬 · 홍문관 교리 · 의주부윤 · 부승지 · 전라감사에 올랐다. 1618년(광해군 10)부터 1621년(광해군 13)까지 형조참의 · 사은사 · 병조참판 · 의금부지사를 역임하고 인조 때에는 도승지 · 도원수 · 대사헌 · 우참찬 · 지경연 · 호태감 접반사를 지냈다. 이어 대사헌 · 전주부윤 · 도승지 · 예조 · 병조 ·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1637년(인조 15)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인조대왕은 공을 칭송하기를 “경의 기량이 탁월하고 몸가짐이 깨끗하여 여러 사람이 심복한다.” “홍주의 위인이 담백하고 도량이 있으니 내실은 있어도 외화는 없다.”라고 하였다. 이는 예문관 대제학 경석(景奭 : 1595∼1671)이 쓴 묘지명에 나와 있다.
또한 필재가 출중하여 문묘의 중수비를 임금의 명을 받고 썼으며 인목대비 국장 때에는 서사관(書寫官)을 맡았다. 아들로는 헌방(憲邦)과 안방(安邦) 둘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