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양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75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주긍(周兢) 1828∼ ? 파명:덕양군(德陽君)
 양정공 기익의 5대손이고, 정의공(靖毅公) 주철(周喆)의 동생이다.
무과에 올라 가선대부 오위장에 이르렀다.
배위 정부인 고흥류씨(1826∼1867)는 오위장 영만(榮萬)의 딸이다.
무과에 올라 가선대부 오위장에 이르렀다.
배위 정부인 고흥류씨(1826∼1867)는 오위장 영만(榮萬)의 딸이다.
주덕(周悳) 1848∼1895 파명:덕양군(德陽君)
  사간공 후(垕)의 6대손이며, 좌랑공 기정(箕禎)의 5대손이고, 승지공 동환(東煥)의 손자이다.
무과에 급제,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배위 정부인 임천조씨(1846∼?)는 한기(漢紀)의 딸이다.
무과에 급제,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배위 정부인 임천조씨(1846∼?)는 한기(漢紀)의 딸이다.
주봉(周鳳) ? ∼ ?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명서(鳴瑞), 양성공 지(至)의 6대손이며 좌랑공 기상(箕相)의 3남인 시창(蓍昌)의 현손이다.
1782년(정조 6)에 무과에 급제, 1792년(정조 16)에 통정대부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나아갔다.
배위 숙부인 남양홍씨(1750∼?)는 계초(啓初)의 딸이다.
1782년(정조 6)에 무과에 급제, 1792년(정조 16)에 통정대부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나아갔다.
배위 숙부인 남양홍씨(1750∼?)는 계초(啓初)의 딸이다.
주성(周聖) 1804∼1834 파명:덕양군(德陽君)
  양정공 기익의 차남 증 참판공 시서(蓍瑞)의 4남 증 참판공 순제(舜濟)의 증손이며 창성(昌城) 방어사 형겸(亨謙)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 부사로 나아갔으며, 자헌대부 병조판서의 증직을 받았다.
배위 증 정부인 진주류씨(1804∼1851)는 명원(命源)의 딸이다.
무과에 급제, 부사로 나아갔으며, 자헌대부 병조판서의 증직을 받았다.
배위 증 정부인 진주류씨(1804∼1851)는 명원(命源)의 딸이다.
주송(周松) 1816∼1889 파명:덕양군(德陽君)
  장정공 무(堥)의 차남인 도정공 기명(箕明)의 5대손이다.
음직으로, 처음 벼슬로 금부도사로 나아가, 통정대부 돈녕부 도정에 올랐다.
배위 숙부인 평산신씨(1813∼1879)는 택현(宅顯)의 딸이다.
음직으로, 처음 벼슬로 금부도사로 나아가, 통정대부 돈녕부 도정에 올랐다.
배위 숙부인 평산신씨(1813∼1879)는 택현(宅顯)의 딸이다.
주응(周膺) 1806~1870 파명:덕양군(德陽君)
 양정공 기익의 차남 참판공 시서의 현손이며, 방어사 형겸(亨謙)의 차남이다.
무과에 급제, 부총관에 이르렀다.
공이 1865년(고종 2)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있을 때 구천군 충숙공 유배지 망북정 옛터가 황폐해졌음을 보고 비각을 새로 건립하고 단청을 하였으며 기판(記板) 사적도 개각(改刻)하였다.
배위는 정부인 밀양박씨로 병사 응호(應浩)의 딸(1805∼1835)과 정부인 능성구씨(1814∼1891)이다.
무과에 급제, 부총관에 이르렀다.
공이 1865년(고종 2)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있을 때 구천군 충숙공 유배지 망북정 옛터가 황폐해졌음을 보고 비각을 새로 건립하고 단청을 하였으며 기판(記板) 사적도 개각(改刻)하였다.
배위는 정부인 밀양박씨로 병사 응호(應浩)의 딸(1805∼1835)과 정부인 능성구씨(1814∼1891)이다.
주철(周喆) 1806∼1875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혜백(惠伯), 시호는 정의(靖毅). 양정공 기익의 5대손이고 첨절제사 안동(安東) 영장 사겸(思謙)의 아들이다. 무과에 올라, 1842년(현종 8) · 1846년(헌종 12) · 1857년(철종 8)에 파견된 암행어사들은 연대순에 따라 명천부사 · 길주목사 ·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를 지낸 그를 죄주어야 한다고 보고하였다.
1858년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있다가 파직당했으며 1864년(고종 1) 흥선대원군이 집정하자 종실에게 군사권이 집중되어 그도 우포도대장이 되었고, 종친부 유사당상(宗親府 有司堂上)과 경복궁 중건 당시 영건도감 제조(營建都監 提調)가 되었다. 1866년 총융사 · 금위대장 · 공조판서를 지내면서 계속 경복궁 중건 감독을 맡아 가자되기도 하였다. 병인양요 때에는 형조판서로 금위대장을 겸임하면서 대응책을 세웠다. 1868년(고종 5)에 삼군부(三軍府)의 관제를 개정하고 새로 인사 배치를 할 때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가 되었다.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때에도 한성부 판윤과 총융사를 지내며 강화도 방비를 위하여 제도를 개선하기도 하였다.
고종태황제의 친정 뒤에는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하면서 고성을 이읍(移邑)하였다. 그 뒤 다시 금위대장 · 통사 등을 역임, 숭록대부 형조 · 공조판서 판의금부사에 이르렀다.
배위 증 정경부인 안산김씨(1805∼1825)는 기종(驥鍾)의 딸이고, 배위 정경부인 고령박씨(1806∼1837)는 지영(芝榮)의 딸이다.
1858년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있다가 파직당했으며 1864년(고종 1) 흥선대원군이 집정하자 종실에게 군사권이 집중되어 그도 우포도대장이 되었고, 종친부 유사당상(宗親府 有司堂上)과 경복궁 중건 당시 영건도감 제조(營建都監 提調)가 되었다. 1866년 총융사 · 금위대장 · 공조판서를 지내면서 계속 경복궁 중건 감독을 맡아 가자되기도 하였다. 병인양요 때에는 형조판서로 금위대장을 겸임하면서 대응책을 세웠다. 1868년(고종 5)에 삼군부(三軍府)의 관제를 개정하고 새로 인사 배치를 할 때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가 되었다.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때에도 한성부 판윤과 총융사를 지내며 강화도 방비를 위하여 제도를 개선하기도 하였다.
고종태황제의 친정 뒤에는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하면서 고성을 이읍(移邑)하였다. 그 뒤 다시 금위대장 · 통사 등을 역임, 숭록대부 형조 · 공조판서 판의금부사에 이르렀다.
배위 증 정경부인 안산김씨(1805∼1825)는 기종(驥鍾)의 딸이고, 배위 정경부인 고령박씨(1806∼1837)는 지영(芝榮)의 딸이다.
주하(周夏) 1819∼1894 파명:덕양군(德陽君)
  첨지중추부사 질(耋)의 차남인 과천현감 기좌(箕佐)의 5대손이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관동소집사가 되고, 1875년(고종 12)에 홍주목사, 1883년(고종 20)에 통정대부 성주목사 겸 진병마사에 이르렀다.
배위 숙부인 양천허씨(1815∼1858)는 당(塘)의 딸이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관동소집사가 되고, 1875년(고종 12)에 홍주목사, 1883년(고종 20)에 통정대부 성주목사 겸 진병마사에 이르렀다.
배위 숙부인 양천허씨(1815∼1858)는 당(塘)의 딸이다.
주흥(周興) 1810∼1883 파명:덕양군(德陽君)
  양정공 기익(箕翊)의 5대손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병사에 이르렀다.
배위 숙부인 달성서씨(1812∼1882)는 경력(經歷) 국보(國輔)의 딸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병사에 이르렀다.
배위 숙부인 달성서씨(1812∼1882)는 경력(經歷) 국보(國輔)의 딸이다.
지(至) 1608∼1676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자옥(子玉), 호는 지곡(智谷).
구천군의 손자이며 봉래군의 장남이다. 광해군 때 귀천군이 정사소(丁巳疏)를 올린 것이 화가 되어 순천으로 귀양가자 집안의 환란으로 공부를 할 수 없게 되었는데, 귀천군이 귀양에서 풀려 돌아오자 비로소 스승에게 나아가니, 그 때 나이 16세였다.
겨우 배우기 시작한 지 1년이 못되어서 태학(太學 : 성균관) 과제(課題)에서 장원을 하였다.
1653년(효종 4)에 목릉참봉에 제수되고, 1656년(효종 7) 군자감 봉사(奉事)로 옮겼다가 한성참군으로 전직되었다.
1660년(현종 1)에 장흥고 주부(主簿)에 오르고, 1661년(현종 2)에 연산현감이 되었다.
1665년(현종 6) 사축서 별제(別提)의 벼슬을 받았다가 장악원 주부(主簿)로 전임되었고, 1666년(현종 7)에 양성현감이 되었다.
현종대왕은 그 때에 온천으로 갑자기 행차를 하였는데 여러 고을에서는 궁색하여 비용을 빌어다 대느라고 분주하였으나 공만은 홀로 힘들이지 않고 변통하여 준비를 갖추었으니 이는 평상시에 절약하여 넉넉히 모아 두었던 때문이다.
1670년(현종 11) · 1671년(현종 12) 양년에 흉년이 들고 역질(疫疾)이 나돌아 백성들이 서로 달아나고 죽기에 공은 급히 정부 곡식을 풀어서 직접 감독하여, 밥과 국을 끓여 먹게 하여 은덕을 베풀었다.
공은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조상의 음덕으로 오로지 고을 원이 되어 늙으신 어머님을 봉양하는 것 만도 사사로운 정으로는 만족한데 감히 스스로 삼가하지 아니하여 어찌 조상을 욕되게 하겠느냐.”하였다.
배위 증 숙부인 진주소씨(1609∼1697)는 감찰 정진(挺震)의 딸이다.
묘지명(墓誌銘)이 있다.
구천군의 손자이며 봉래군의 장남이다. 광해군 때 귀천군이 정사소(丁巳疏)를 올린 것이 화가 되어 순천으로 귀양가자 집안의 환란으로 공부를 할 수 없게 되었는데, 귀천군이 귀양에서 풀려 돌아오자 비로소 스승에게 나아가니, 그 때 나이 16세였다.
겨우 배우기 시작한 지 1년이 못되어서 태학(太學 : 성균관) 과제(課題)에서 장원을 하였다.
1653년(효종 4)에 목릉참봉에 제수되고, 1656년(효종 7) 군자감 봉사(奉事)로 옮겼다가 한성참군으로 전직되었다.
1660년(현종 1)에 장흥고 주부(主簿)에 오르고, 1661년(현종 2)에 연산현감이 되었다.
1665년(현종 6) 사축서 별제(別提)의 벼슬을 받았다가 장악원 주부(主簿)로 전임되었고, 1666년(현종 7)에 양성현감이 되었다.
현종대왕은 그 때에 온천으로 갑자기 행차를 하였는데 여러 고을에서는 궁색하여 비용을 빌어다 대느라고 분주하였으나 공만은 홀로 힘들이지 않고 변통하여 준비를 갖추었으니 이는 평상시에 절약하여 넉넉히 모아 두었던 때문이다.
1670년(현종 11) · 1671년(현종 12) 양년에 흉년이 들고 역질(疫疾)이 나돌아 백성들이 서로 달아나고 죽기에 공은 급히 정부 곡식을 풀어서 직접 감독하여, 밥과 국을 끓여 먹게 하여 은덕을 베풀었다.
공은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조상의 음덕으로 오로지 고을 원이 되어 늙으신 어머님을 봉양하는 것 만도 사사로운 정으로는 만족한데 감히 스스로 삼가하지 아니하여 어찌 조상을 욕되게 하겠느냐.”하였다.
배위 증 숙부인 진주소씨(1609∼1697)는 감찰 정진(挺震)의 딸이다.
묘지명(墓誌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