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성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79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익로(翼老) 1608∼1663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덕수(德첤), 호는 무언옹(無言翁). 선성군의 7대손이고 노저 양원의 증손이며 기린도찰방 홍광의 아들이다. 공의 동생에 진사 영로(榮老)가 있어 그 후손이 충남 아산에서 번창하였다.
1639년(인조 17) 진사, 1644년(인조 22)에 처음으로 벼슬자리를 얻었다. 1647년(인조 25) 장악원 정(正)으로서 음율을 정확히 해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악기도감의 감조관(監造官)을 겸하였다. 그래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난으로 없어지고 파괴된 종묘의 예악기를 완전히 개수, 완성하였다. 지금의 종묘대제 때 묘정에서 사용하고 있는 악기가 바로 공이 감조한 것이다.
1649년 인조대왕이 승하하자 공이 국장도감 낭청을 겸임하여 지석을 감수하던 중 지석문 중에 `순치(順治)\'라는 청국 연호를 사용한 것을 발견하였다. 이에 공은 도감당상에게 “지석은 한 번 써 넣으면 영원히 남는 중대한 일인데 어찌 적국 연호를 사용한단 말인가.”하고 역설하였다. 공의 항의에 따라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임금에게 재가를 받아서 결국 적국 연호를 삭제했다.
그 해 겨울 개령현감을 제수받고 부임했을 때 이곳에 도적이 기승을 부리는 고로 즉시 엄하게 다스렸다. 그러나 원래 이 도적들은 이 지방에서 세력이 드센 자들이었다. 이들이 관찰사에게 중상모략하여 도리어 공이 해남으로 유배되는 등 전후 6년간을 귀양살이를 하는 고역을 겪었다. 1655년(효종 6) 풀려나와 1659년(효종 10) 순안현령으로 서임받고 1660년(현종 1)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직강으로 승진되었다.
묘소는 노량진 선영에 있었으나 선고 · 조부와 같이 충남 당진군 대호지면 송전리로 이장되었다.
1639년(인조 17) 진사, 1644년(인조 22)에 처음으로 벼슬자리를 얻었다. 1647년(인조 25) 장악원 정(正)으로서 음율을 정확히 해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악기도감의 감조관(監造官)을 겸하였다. 그래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난으로 없어지고 파괴된 종묘의 예악기를 완전히 개수, 완성하였다. 지금의 종묘대제 때 묘정에서 사용하고 있는 악기가 바로 공이 감조한 것이다.
1649년 인조대왕이 승하하자 공이 국장도감 낭청을 겸임하여 지석을 감수하던 중 지석문 중에 `순치(順治)\'라는 청국 연호를 사용한 것을 발견하였다. 이에 공은 도감당상에게 “지석은 한 번 써 넣으면 영원히 남는 중대한 일인데 어찌 적국 연호를 사용한단 말인가.”하고 역설하였다. 공의 항의에 따라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임금에게 재가를 받아서 결국 적국 연호를 삭제했다.
그 해 겨울 개령현감을 제수받고 부임했을 때 이곳에 도적이 기승을 부리는 고로 즉시 엄하게 다스렸다. 그러나 원래 이 도적들은 이 지방에서 세력이 드센 자들이었다. 이들이 관찰사에게 중상모략하여 도리어 공이 해남으로 유배되는 등 전후 6년간을 귀양살이를 하는 고역을 겪었다. 1655년(효종 6) 풀려나와 1659년(효종 10) 순안현령으로 서임받고 1660년(현종 1)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직강으로 승진되었다.
묘소는 노량진 선영에 있었으나 선고 · 조부와 같이 충남 당진군 대호지면 송전리로 이장되었다.
익서(益瑞) 1678∼1729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운경(雲卿), 호는 춘헌(春軒). 선성군의 7대손이며 체소재의 증손이고 만장의 아들이다. 관직이 조산대부 의금부도사 · 통훈대부 행 이원현감 겸 북청진관병마절제사에 이르렀다.
정재(正在) 1803∼1873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사고(士固), 선성군의 12대손 해종(海宗)의 아들이다.
1865년(고종 2) 증광 생원이 되고 관직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에 이르렀다.
1865년(고종 2) 증광 생원이 되고 관직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에 이르렀다.
제운(濟運) 1582∼1625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응휴(應休). 선성군의 6대손이고 준도의 장손이다.
1606년(선조 39)에 증광시에서 진사가 되었고 1612년(광해군 4)에 처음으로 벼슬자리에 나아갔다. 통훈대부 장흥고 봉사에 이르렀다.
1606년(선조 39)에 증광시에서 진사가 되었고 1612년(광해군 4)에 처음으로 벼슬자리에 나아갔다. 통훈대부 장흥고 봉사에 이르렀다.
종영(宗榮) 1723∼1781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인길(仁吉), 호는 청탄(聽灘). 선성군의 11대손이고 노저 양원의 7대손이고 발형(發馨 : 1697∼1754)의 아들이다.
동생 방영(邦榮)과 1759년(영조 35) 식년시 문과에 나란히 급제했다. 관직은 사헌부의 집의에 이르고 증직으로 가선대부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아들로는 주철(周喆), 주석(周奭), 주섭(周燮), 주환(周?) 그리고 주흡(周翕)이 있다.
특기할 일은 1729년(영조 5)에 7대조인 영상 양원의 시호를 청한 일이다. 이 시장(諡狀)은 명재상 문숙공(文肅公)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께서 찬하여 `문헌(文憲) 충간(忠簡) 문민(文敏)\'으로 왕에게 올렸으나 수망(首望)인 `문헌(文憲)\'으로 비하(批下)하였다.
동생 방영(邦榮)과 1759년(영조 35) 식년시 문과에 나란히 급제했다. 관직은 사헌부의 집의에 이르고 증직으로 가선대부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아들로는 주철(周喆), 주석(周奭), 주섭(周燮), 주환(周?) 그리고 주흡(周翕)이 있다.
특기할 일은 1729년(영조 5)에 7대조인 영상 양원의 시호를 청한 일이다. 이 시장(諡狀)은 명재상 문숙공(文肅公)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께서 찬하여 `문헌(文憲) 충간(忠簡) 문민(文敏)\'으로 왕에게 올렸으나 수망(首望)인 `문헌(文憲)\'으로 비하(批下)하였다.
주석(周奭) 1760∼1810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성신(成臣), 선성군의 12대손이고 순국충신 시경의 7대손이며 방영이 양부이고 생부는 집의공 종영이다.
1794년(정조 18) 정시 문과 병과에 급제하였다. 벼슬은 정언에 머물렀다. 아들은 항진(恒鎭 : 1799∼1863), 손자는 원조(源祖 : 1831∼1903)이다.
1794년(정조 18) 정시 문과 병과에 급제하였다. 벼슬은 정언에 머물렀다. 아들은 항진(恒鎭 : 1799∼1863), 손자는 원조(源祖 : 1831∼1903)이다.
준도(遵道) 1532∼1584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택중(擇中). 선성군의 4대손이며, 봉사손이다. 춘산도정(春山都正)의 증손이며 풍산부령(豊山副令)의 아들이다. 통정대부이다.
1561년(명종 16) 생원 · 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564년(명종 19) 별시 문과 병과에 급제하였다.
1568년(선조 1) 조모 승중상(承重喪)을 치른 후 구례에 따라 박사가 되고 1572년(선조 5) 평안평사 · 형조좌랑 · 함경도사를 거쳤다. 1576년(선조 9) 공조 · 예조정랑을 역임하고 봉산군수를 거쳐 1578년(선조 11) 창성부사(昌城府使)로 승진하였다. 그곳에서 정치를 잘 했으므로 임지에서 1년을 더 근무하다가 1581년(선조 14) 교체되어 성균관 전적으로 있었다. 이 후 대구도호부사로 임명되어 근무하다가 1584년(선조 17) 53세로 생을 마쳤다.
선성군 묘역은 상후면에 묘가 있고 묘갈명은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 : 1537∼1616)가 지었으며 글씨는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 : 1542∼1621)이 썼다.
공은 문장이 뛰어났고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교우가 깊었으며 과거문제를 함께 주관했다. 어느날 과거시험장에서 두 분이 같이 있을 때 천도책(天道策)에 대한 문제가 출제되었다. 응시생들이 시험관에게 제목의 뜻을 묻자 시험관이 말하기를 “이율곡과 리준도가 지금 시험장에 있으니 그들에게 가서 물어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응시생들이 앞을 다투어 찾아와 물어보느라고 대단히 혼잡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차라리 글로 한 장을 써서 보여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니 율곡이 그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마침내 두 분이 각기 첫머리와 말미를 나누어 써서 글 한 장을 만들어 그들에게 보였다고 한다.
1561년(명종 16) 생원 · 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564년(명종 19) 별시 문과 병과에 급제하였다.
1568년(선조 1) 조모 승중상(承重喪)을 치른 후 구례에 따라 박사가 되고 1572년(선조 5) 평안평사 · 형조좌랑 · 함경도사를 거쳤다. 1576년(선조 9) 공조 · 예조정랑을 역임하고 봉산군수를 거쳐 1578년(선조 11) 창성부사(昌城府使)로 승진하였다. 그곳에서 정치를 잘 했으므로 임지에서 1년을 더 근무하다가 1581년(선조 14) 교체되어 성균관 전적으로 있었다. 이 후 대구도호부사로 임명되어 근무하다가 1584년(선조 17) 53세로 생을 마쳤다.
선성군 묘역은 상후면에 묘가 있고 묘갈명은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 : 1537∼1616)가 지었으며 글씨는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 : 1542∼1621)이 썼다.
공은 문장이 뛰어났고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교우가 깊었으며 과거문제를 함께 주관했다. 어느날 과거시험장에서 두 분이 같이 있을 때 천도책(天道策)에 대한 문제가 출제되었다. 응시생들이 시험관에게 제목의 뜻을 묻자 시험관이 말하기를 “이율곡과 리준도가 지금 시험장에 있으니 그들에게 가서 물어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응시생들이 앞을 다투어 찾아와 물어보느라고 대단히 혼잡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차라리 글로 한 장을 써서 보여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니 율곡이 그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마침내 두 분이 각기 첫머리와 말미를 나누어 써서 글 한 장을 만들어 그들에게 보였다고 한다.
지긍(志兢) 1817∼1877 파명:선성군(宣城君)
  선성군의 21대손이다. 설성부정 철정의 손자 대안도정 노담(老聃)은 유인(由仁)과 유의(由義) 두 아들이 있다. 유인의 손자 순남(順男 : 1613∼1676)은 1639년(인조 17) 기묘별시 을과에 급제하고 통훈대부 송화(松禾) 현감이었다. 자는 이순(而順)이다.
유의는 대안도정의 동생 풍덕감(豊德監)에게 입후하여 수사(水使)가 되었다. 유의의 6대손에 순남(舜南)이 있고 그 순남의 아들 삼룡(三龍)은 조령 중성 축조 때 수천금과 노역을 도와 공사를 마친 공으로 가선대부를 제수받고 성숙한 말 한 필과 어명으로 기로소에 들게 하였으며 가의대부로 품계를 올려 받았다.
삼룡의 아들이 공신 진웅(震雄 : 1683∼1733)인데 이는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에 아들 조카를 끌고 육전을 감행한 공으로 양무원종공신에 봉해졌으며 녹권(錄券)을 하사받고 그의 자손들은 음관을 천거받는 특혜를 입게 되었다. 또한 공신 진웅의 증손 재동(在東 : 1759∼1835)도 가통을 이어받아 조령 삼성 수축 때의 공으로 특별히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하사받았다. 재동의 아들이 장배(長培 : 1789∼1850)이며 장배의 아들로는 6명이 있었다. 그 가운데 다섯째인 지긍은 조령란 때 괴수 필제(弼濟)와 옥현(玉絃)을 잡아들인 공으로 절충장군 겸 오위장에 제수되었다.
유의는 대안도정의 동생 풍덕감(豊德監)에게 입후하여 수사(水使)가 되었다. 유의의 6대손에 순남(舜南)이 있고 그 순남의 아들 삼룡(三龍)은 조령 중성 축조 때 수천금과 노역을 도와 공사를 마친 공으로 가선대부를 제수받고 성숙한 말 한 필과 어명으로 기로소에 들게 하였으며 가의대부로 품계를 올려 받았다.
삼룡의 아들이 공신 진웅(震雄 : 1683∼1733)인데 이는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에 아들 조카를 끌고 육전을 감행한 공으로 양무원종공신에 봉해졌으며 녹권(錄券)을 하사받고 그의 자손들은 음관을 천거받는 특혜를 입게 되었다. 또한 공신 진웅의 증손 재동(在東 : 1759∼1835)도 가통을 이어받아 조령 삼성 수축 때의 공으로 특별히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하사받았다. 재동의 아들이 장배(長培 : 1789∼1850)이며 장배의 아들로는 6명이 있었다. 그 가운데 다섯째인 지긍은 조령란 때 괴수 필제(弼濟)와 옥현(玉絃)을 잡아들인 공으로 절충장군 겸 오위장에 제수되었다.
지백(知白) 1606∼1676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계현(契玄), 호는 금화(金華). 영의정 홍주의 손자이고 헌방의 아들이다. 선성군의 8대손. 1652년(효종 3)에 문과급제하고 누전군수를 지냈다.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책록되었다. 저서로는 <금화문집(金華文集)> 1권이 전해지고 있다. 아들은 손(?) · 제(濟) · 수(?) · 일(溢) · 유(洧) 5형제가 있다.
지형(趾馨) 1726∼1799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계린(季麟), 호는 학오당(學鰲堂). 선성군의 10대손이고 노저 양원의 6대손이다.
1779년(정조 3)에 회인현감을 배수받았으며 관직은 통훈대부 사도시 첨정에 이르렀다.
효성이 지극하여 생부댁 · 양가댁의 노친들이 항상 병환을 앓고 있을 때는 안성 · 괴산 · 해미를 멀다 않고 약시중을 하였으며 약숟가락인 도규를 품에서 멀리하지 않을 정도였다. 1773년에 대신이 연주(筵奏)하고 상언으로 노저상공(鷺渚相公) 양원의 사손(祀孫)으로 명을 받아 12대손 응길이 신주를 모시고 있다.
1779년(정조 3)에 회인현감을 배수받았으며 관직은 통훈대부 사도시 첨정에 이르렀다.
효성이 지극하여 생부댁 · 양가댁의 노친들이 항상 병환을 앓고 있을 때는 안성 · 괴산 · 해미를 멀다 않고 약시중을 하였으며 약숟가락인 도규를 품에서 멀리하지 않을 정도였다. 1773년에 대신이 연주(筵奏)하고 상언으로 노저상공(鷺渚相公) 양원의 사손(祀孫)으로 명을 받아 12대손 응길이 신주를 모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