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녕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52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선경(善慶) 1587∼ ?    파명:경녕군(敬寧君)
  영원군의 아들이다. 벼슬은 족친위를 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곡천리에 있다. 배위는 공인 안산김씨로 경고(慶皐)의 딸이다. 슬하에 복광(復光) · 함광(咸光) · 증광(增光) · 익광(益光) · 회광(晦光) 5남을 두었다.

선하(善夏) 1759∼1820    파명:경녕군(敬寧君)
  모양군의 10대손 일성(一誠)의 계자이다. 생부는 복성군의 10대손 재성(載誠)이다. 효심이 지극해 부친이 위독할 때에는 손가락을 자르고, 피를 마시게 하였다. 의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산 속에서 해가 저물자 호랑이가 나타나 불을 밝혀 길을 인도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도봉리 입구에 삼효비(三孝碑)가 세워졌다. 배위는 청주정씨로 해필(海弼)의 딸이다. 슬하에 병엽(秉燁) 1남을 두었다.

섬(暹) 1568∼1636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퇴지(退之), 은천군의 5대손이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호종한 공훈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가 됐다.

성구(聖求) 1584∼1644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자이(子異), 호는 분사(分沙) 또는 동사(東沙), 시호는 정숙(貞肅). 수광의 장남이다.
 1603년(선조 36) 진사에 오르고, 1608년(선조 41)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한원에 들어가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광해군 초기에 전적 감찰에 이어 예조·병조·형조의 좌랑·부교리·헌납·병조정랑·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613년(광해군 5) 헌납으로 있을 때 아버지는 대사헌을, 동생 민구는 홍문관 부제학을 지냄으로써 3부자가 삼사의 언관직에 같이 봉직하여 세인들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지평으로 있을 때 영창대군의 옥사가 일어나자, 시론(時論)에 반대하였으며,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이 정협(鄭浹)을 천거하여 종성판관으로 삼자 이를 문제삼는 간당(奸黨)들을 저지하다가 파직되었다. 1614년(광해군 6) 이천현감을 거쳐 1616년(광해군 8) 영평판관이 되고, 겸하여 포천을 다스렸다. 이 때 이항복이 북청의 배소에서 죽자 포천의 향민들이 운구해서 장사지내고 서원을 세워 봉사하였다. 그러나 이 일로 무고당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때에는 사간으로 기용되어 폐정을 일신시키고, 영의정 리원익의 인정을 받아 강화부윤 · 부승지 · 예조참의를 거쳐 1625년(인조 3) 대사간이 되고, 이듬해 병조참지가 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는 이조참의로서 왕세자를 전주로 호종하고, 이어 가선대부로 승진되어 이듬해 전라감사에 부임하였다. 그 뒤 대사간 · 좌승지 · 도승지 · 병조참판 · 대사헌 · 형조참판 · 경기감사 등을 지냈으며, 1636년(인조 14) 형조판서 · 이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와 체찰부사를 겸하였고, 병자호란 때에는 인조대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다. 이 때 최명길 등의 주화론에 동조하였으며, 1637년(인조 15) 왕세자가 심양에 갈 때에 좌의정이 되어 수행하였다. 이듬해 영돈녕부사가 되고, 1640년(인조 18) 사은사로 청나라에 가서 명나라를 칠 원군을 보낼 수 없다는 것을 전하고 왔다. 1641년(인조 19) 영의정이 되었으나, 이듬해 승지 홍무적의 모함으로 사직하였다가 곧 영중추부사가 되었는데, 다시 선천부사 이계가 청나라에 기밀을 누설한 사건을 논하다가 파직되어 양화강 부근에 만휴암(晩休庵)을 짓고, 향인(鄕人)을 권장하여 <서호향약기(西湖鄕約記)>라는 향약을 정하고 산수를 벗삼아 지냈다. 다시 영중추부사에 서용(敍用)되었으나 나오지 않고 강호에 살다 죽었다. 이 때 인조대왕이 조회를 폐하고 조제(弔祭)하였다. 이시백은 “반정 이후 인조가 발탁한 정승 중에서 공의 인물됨이 첫째였다”라고 하였다. 저서로는 <분사집(分沙集)>이 있다.

수광(睟光) 1563∼1628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峯), 시호는 문간(文簡). 병조판서 희검(希儉)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문화류씨이다.
 16세 때 초시에 합격하였고, 17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20세에 진사가 되었고, 1585년(선조 18) 23세에 별시 병과에 급제,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으며, 27세에 성균관 전적을 거쳐 그 이듬해에는 호조와 병조의 좌랑을 지냈으며,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30세 되던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도 방어사 조경의 종사관이 되어 종군하였으나, 아군의 패배 소식을 듣고 의주로 돌아가 북도선유어사가 되어 함경도 지방의 선무활동에 공을 세웠다. 1597년(선조 30) 35세에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는데 그 해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또 명나라에서 중극전과 건극전 등 궁전이 불타게 되자, 그는 진위사로서 두번째 명나라를 다녀왔다. 이 때 명나라에서 안남(베트남)의 사신을 만나 화답하면서 교류하였던 사실이 주목된다. 39세에 부제학으로 <고경주역(古經周易)>을 교정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주역언해(周易諺解)>를 교정하였으며, 41세에는 <사기(史記)>를 교정하였다.
 1605년(선조 38) 43세에 안변부사로 나아갔다가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와 1607년(선조 40) 겨울 다시 홍주목사로 부임하였다가 1609년(광해군 1) 돌아왔다. 1611년(광해군 3) 왕세자의 관복(冠服)을 주청하는 사절의 부사로 세번째 명나라를 다녀왔다. 이 때에 유구(琉球)사신과 섬라(타이)사신을 만나 그들의 풍속을 듣고 기록하였다. 정국이 혼란하자 1616년(광해군 8) 순천부사가 되어 지방관으로 나아가 지방행정에 전념하였다. 57세에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수원에 살면서 모든 관직을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다가 1623년 인조반정이 되자 도승지 겸 홍문관 제학으로 임명되고 대사간 · 이조참판 · 공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625년(인조 3) 대사헌으로서 왕의 구언(求言)에 응하여 12조목에 걸친 <조진무실차자(條陳懋實箚子)>를 올려 시무를 논하여 당시 가장 뛰어난 소장이라는 평을 받았다. 1628년(인조 6) 7월 66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그 해 12월에 별세하였다.
 그는 일찍이 관직에 나아가 요직을 모두 지냈으며, 세차례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 관료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였다. 특히, 그의 활동 시기에는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치르고, 광해군 때의 정치적 갈등과, 인조 때의 이괄의 난을 겪어 어려웠던 정국에 살면서도 붕당에 휩쓸리지 않았으며, 언제나 강직하면서도 온화한 입장을 지켜 그 시대의 성실하고 양식있는 관료요, 선비로서의 자세를 지켰다. 그러나 그에게서 가장 중요한 면모는 사회적 변동기에 새로운 사상적 전개방향을 탐색하고, 개척한 학자로서의 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그는 조선사회가 전기에서 후기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사회변화와 더불어 발생하게 될 실학파의 선구적 인물로, 사상사 내지 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지는 것이다.
 그가 두드러지게 활동하던 반세기 초기는 이미 16세기 후반에 있어 이황과 이이로 정점을 이루는 성리학의 이론이 성숙되었던 다음 시대로서 김장생·정구 등에 의해 예학(禮學)이 융성하게 일던 시기이다. 이와 같이 도학(道學)의 정통성은 확립되었지만, 임진왜란의 충격 속에 사회질서의 변화가 진행되었을 때는 사상적으로도 정통적 도학의 성리학적 관심에서 벗어난 새로운 요구가 대두되던 시기이다. 그것은 곧 한백겸의 <기전유제설(箕田遺制說)>에서 보여준 실증적 고증에 의하여 고대의 전제(田制)에 있어서 주자(朱子)의 견해도 추측에서 나온 것에 지나지 않음을 밝혔던 사실이나, 남언경 · 이요 등 양명학의 이론에 호의를 가지는 태도의 출현을 들 수 있다.
 이 때의 그의 사상적 성격을 분석하여 보면, 주자학을 존중하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그 당시 주자학의 기본문제인 태극 · 이기 · 사단 · 칠정 등 성리학의 이론에 뛰어들지 않고, 심성의 존양(存養)에 치중하는 수양론적 문제를 학문적 중추문제로 삼고 있는 데 그 특징이 있다. 비록 성리학의 이론적 분석이나 논변은 조선 후기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이러한 전통적 성리학파의 입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새로운 방향을 탐색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그의 철학적 기본문제가 심성의 이기론적 개념분석이 아니라 수양론적 실천방법의 탐색이라는 것은 그만큼 그의 철학이 관념철학을 벗어나 실천철학적 성격을 지니는 것임을 말해 준다. 그의 저술<지봉유설(芝峯類說)> 가운데 유도부(儒道部)에서 학문(學文) · 심학(心學) · 과욕(寡慾) · 초학(初學)·격언(格言)의 5항목으로 분류하고 있는 사실도 주자학에서 존중되는 도체(道體)의 문제나 성리학적 과제를 제쳐두고, 심성의 수양론적 관심 속에서 유학을 분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조진무실차자(條陳懋實箚子)>에서 정치의 효과를 이루지 못하고 사회가 어지러워지는 것은 모두 부실한 병 때문이라 지적하였고, 모든 일을 처리하는 관건은 성(誠)에 있으며, 성이 곧 실(實)임을 밝히고, 실심으로 실정(實政)을 행하고, 실공(實功)으로 실효를 거둘 것을 주장하면서 생각마다 모두 실하고, 일마다 실할 것을 요구하는 무실(懋實)을 강조하였다. 그의 무실론은 구체적 현실의 성이면서 동시에 도덕적 성실성의 요구이다. 성을 모든 것에 일관하는 원리로 삼고, 이 성의 현실적 실현을 추구하는 것은 실학정신의 근원적 사유방법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 그는 “학(學)은 활쏘기와 같아서 과녁을 지향하는 것”이라 밝히면서, 학문의 입지와 지향하는 바가 중요함을 강조하는 것도 진리의 기준에 대한 끊임없는 요구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의 학문적 개방정신과 더불어 학문의 수양론적 기능에 대한 요구에서 “학문은 습(習)을 귀하게 여기며, 습을 통하여 숙(熟)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학습론을 엿볼 수 있다. 함양성찰(涵養省察)하는 수양의 과정이 곧 학습이요, 살아 움직이는 마음의 배양, 즉 성숙인 것이다. 그의 이러한 철학적 특성이 도학의 정통성을 발판으로 하면서도 성리학의 이론적 천착(穿鑿)으로 나아가는 방향이 아니라 인격과의 구체적 실현을 추구하는 실학정신의 발휘로 지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66세로 세상을 떠난 뒤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수원의 청수서원(淸水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술로는 <지봉집(芝峯集)> 31권, 부록 3권이 있으며, <찬록군서(纂錄群書)> 25권이 있다고는 하나 확실하지 않다.
 
숙(핈) 1583∼1619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회보(晦甫), 단산도정의 현손 형욱(馨郁)의 아들이다. 1606년(선조 39)에 생원이 되고 1609년(광해군 1)에 증광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한림과 정언을 지냈다. 광해군 때 “이이첨을 참하라.” 라는 상소로 수년간 투옥되었다가 별세하였다. 인조대왕 초에 포상이 내려지고, 그 지조와 절개가 추앙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회천읍 부친묘하 임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강릉김씨로 감사 순명(順命)의 딸이다. 슬하에 익배(益培) 1남을 두었다.
시민(時敏) 1571∼1629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면지(勉之), 복성군의 현손 용순(用淳)의 아들이다. 1623년(인조 1) 문과급제하여 도사 겸 춘추관 기주관을 거쳐 통훈대부에 올랐다. 배위는 숙부인 현풍곽씨로 동지중추부사 수강(壽岡)의 딸이다. 슬하에 의권(義拳) 1남을 두었다.

시발(始發) 1792~1853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성심(聖心), 호는 호당(浩堂). 은천군의 12대손 기락의 아들이다. 학문이 깊고 지조가 있어, 선비와 벗이 덕을 사모하여 우러렀다. 증 호조참판이 되었다.
 묘소는 전북 고창군 성내면 양주리 묘좌이다. 배위는 숙부인 수원백씨로 사흠(師欽)의 딸이다. 슬하에 해종(海宗) · 해관(海觀) · 희수(喜秀) · 희문(喜文) · 희준(喜俊) · 희인(喜仁) 6남을 두었다.
시수(始秀) 1563∼1597    파명:경녕군(敬寧君)
  초명은 시화(始華), 자는 춘중(春仲), 호는 홍영당(紅影堂). 은천군의 6대손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여만정 · 임세무·김경덕 · 경탁상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5백명을 인솔하고 적과 싸웠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순절하였다. 고덕봉은 비통한 마음을 노래로 짓고, 치발(齒髮)로 선영하에 장례지냈다.

시우(時雨) 1591∼1639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화가(化加), 호는 서호(西湖). 복성군의 현손 용순의 아들이다. 1633년(인조 11) 문과급제하였다. 병자호란 때 임금을 남한산성까지 호종하였다. 1637년(인조 15) 비인을 다스리고, 지평 정언에 이르렀다.
 묘소는 개풍군 임한면 유천리 유좌이다. 배위는 숙인 영월신씨로 참판 경진(慶晋)의 딸이다. 슬하에 익권(翊拳) · 석권(碩拳) 2남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