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천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25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면수(勉修) 1725∼1777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백진(伯進), 경직(景稷)의 5대손인 성효(性孝)의 아들이다. 1756년(영조 32) 생원·진사 양시에 급제하고, 1773년(영조 49) 정시문과 을과에 급제, 교리·도승지를 지냈다. 1773년 봄 급제했을 때 임금이 전교하기를 “신은(新恩) 리면수(李勉修)는 증 이판 문정(聞政)의 증손이며 교리 성효(性孝)의 아들이다. 조자손(祖子孫) 3대가 과거에 급제하기는 어려운 일이니 <서경> 한 부를 특별히 주어 과인의 뜻을 표하라.”하고, 영조대왕이 손수 옛날 `너의 할아버지를 생각하니 내 마음이 한결같이 믿음직스럽다[憶昔爾祖 予心一信]\'라고 8자를 써 주고 공을 한림에 임명했다. 또 전교하기를 “너의 할아버지는 과인이 동궁으로 있을 때부터의 친구이니 도저히 잊을 수가 없구나.” 하였다.
배위는 강릉김씨 시영(始瑛)의 딸과 해주정씨 진후(震텋)의 딸이다.
묘소는 충주 석교 간좌에 있다.
배위는 강릉김씨 시영(始瑛)의 딸과 해주정씨 진후(震텋)의 딸이다.
묘소는 충주 석교 간좌에 있다.
면승(勉昇) 1766∼1835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계래(季來), 호는 만포(晩圃), 시호는 문헌(文憲). 호조판서 경직의 6대손이고 성순의 4남이요, 판서 면긍(勉兢)의 아우이다. 1789년(정조 13) 진사시 3등에 급제하고, 1794년(정조 18)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798년 홍문관 벼슬을 거쳐 사헌부 지평이 되었고, 1803년(순조 3) 지평으로서 당시 형옥(刑獄)을 비롯한 행정기강의 해이를 지적하고, 이것이 국체를 손상시키고 백성의 불안을 야기시키는 근본 원인이 되고 있다고 역설하였다. 이 의견이 순조숙황제에 의하여 받아들여져 각 부(府) · 조(曹)의 업무 수행을 엄격히 하는 조처가 취하여졌다.
1808년(순조 8) 전라도 암행어사가 되어 전라도 각 지역 수령들의 업무 수행 상황을 조사, 국가 재정의 핵심적 문제였던 환곡(還穀) · 민고(民庫) · 군정(軍政) 등 지방 행정 업무의 피폐상을 극론하여, 그 결과 전라지역의 환곡에 대한 시정조치가 내려졌다. 그 뒤 우승지가 되어 곡산(谷山)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안핵사로 나가 민심을 무마했다. 1811년 황해도 곡산에서 부사 박종신(朴宗信)이 민중에게 구타당하고 부신(符信)마저 빼앗기는 변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그가 안핵사로 파견되어 변란의 원인이 전곡(錢穀)의 혹심한 증발 등 부사의 혹정에 있었음을 밝히고 민심을 수습하였다. 1815년 2월 황해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연안(延安) · 토산(兎山) 등지의 호구(戶口)와 전결(田結) 상황을 조사하고, 실정에 맞는 합리적인 세정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여 백성의 부담을 경감시켰다. 1818년 이후 대사성 대사간을 역임하고 1820년 12월 함경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환곡의 불균으로 인한 백성들의 곤고를 시정하려고 노력하였다. 1825년 사헌 · 형조판서를 거쳐 같은 해 11월 동지사로서 부사 이석우(李錫祐) · 서장관 박종학(朴宗學) 등과 함께 청나라 연경에 다녀왔다. 1826년 11월 형조판서에 복직한 뒤 이듬해 우참찬에 임명되었고 1829년 경상도 관찰사로서 환곡의 수송 문제를 다루었다.
그 뒤 한성부 판윤 · 예조 · 이조 · 형조판서가 되었다가 1833년 형정(刑政)을 공정히 처리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비변사의 탄핵을 받았으나 다시 공조판서에 기용되었다. 그 뒤 대사헌 예문관 제학을 지내고 1834년 순조숙황제가 승하하자 산릉도감 제조로 있다가 병사했다.
공은 세역(稅役)제도의 문란과 각종 재해로 인하여 민중들이 곤궁을 겪고 있었던 순조숙황제시대의 지방 실정을 비교적 밝게 이해하고 있었으며 당시의 국가 행정과 민중생활을 기본적으로 규정짓고 있던 세역문제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노력한 관료였다.
배위는 반남박씨 진사 정엄(廷淹)의 딸이다.
묘소는 충주 소대양 구룡동 간좌에 있다.
1808년(순조 8) 전라도 암행어사가 되어 전라도 각 지역 수령들의 업무 수행 상황을 조사, 국가 재정의 핵심적 문제였던 환곡(還穀) · 민고(民庫) · 군정(軍政) 등 지방 행정 업무의 피폐상을 극론하여, 그 결과 전라지역의 환곡에 대한 시정조치가 내려졌다. 그 뒤 우승지가 되어 곡산(谷山)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안핵사로 나가 민심을 무마했다. 1811년 황해도 곡산에서 부사 박종신(朴宗信)이 민중에게 구타당하고 부신(符信)마저 빼앗기는 변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그가 안핵사로 파견되어 변란의 원인이 전곡(錢穀)의 혹심한 증발 등 부사의 혹정에 있었음을 밝히고 민심을 수습하였다. 1815년 2월 황해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연안(延安) · 토산(兎山) 등지의 호구(戶口)와 전결(田結) 상황을 조사하고, 실정에 맞는 합리적인 세정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여 백성의 부담을 경감시켰다. 1818년 이후 대사성 대사간을 역임하고 1820년 12월 함경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환곡의 불균으로 인한 백성들의 곤고를 시정하려고 노력하였다. 1825년 사헌 · 형조판서를 거쳐 같은 해 11월 동지사로서 부사 이석우(李錫祐) · 서장관 박종학(朴宗學) 등과 함께 청나라 연경에 다녀왔다. 1826년 11월 형조판서에 복직한 뒤 이듬해 우참찬에 임명되었고 1829년 경상도 관찰사로서 환곡의 수송 문제를 다루었다.
그 뒤 한성부 판윤 · 예조 · 이조 · 형조판서가 되었다가 1833년 형정(刑政)을 공정히 처리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비변사의 탄핵을 받았으나 다시 공조판서에 기용되었다. 그 뒤 대사헌 예문관 제학을 지내고 1834년 순조숙황제가 승하하자 산릉도감 제조로 있다가 병사했다.
공은 세역(稅役)제도의 문란과 각종 재해로 인하여 민중들이 곤궁을 겪고 있었던 순조숙황제시대의 지방 실정을 비교적 밝게 이해하고 있었으며 당시의 국가 행정과 민중생활을 기본적으로 규정짓고 있던 세역문제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노력한 관료였다.
배위는 반남박씨 진사 정엄(廷淹)의 딸이다.
묘소는 충주 소대양 구룡동 간좌에 있다.
면심(勉心) 1763∼1830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치존(穉存), 석문(石門) 경직(景稷)의 6대손이며 문정(聞政)의 손자인 성호(性浩)의 계자로 생부는 성흡(性洽)이다. 1801년(순조 1) 진사시 3등으로 급제, 참봉을 거쳐 부사까지 지내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장수황씨 원(瑗)의 딸과 능성주씨와 강릉최씨이다.
묘소는 청풍 방곡 자좌에 있다.
배위는 장수황씨 원(瑗)의 딸과 능성주씨와 강릉최씨이다.
묘소는 청풍 방곡 자좌에 있다.
면제(勉齊) 1743∼1820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공화(公華), 경석(景奭)의 6대손이며 국형(國亨)의 장남이고 면구(勉求)의 형이다. 1783년(정조 7) 진사시 3등에 합격,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사어(司禦)를 거쳐 청송부사를 지냈다. 글씨를 잘 썼다.
배위는 한양조씨 윤원(允元)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안산시 일리산에 있다.
배위는 한양조씨 윤원(允元)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안산시 일리산에 있다.
면충(勉퀖) 1761∼1825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숙겸(叔謙), 황해도 관찰사 진수의 증손이며 광려(匡呂)의 손자이고 치형(穉亨)의 계자로 생부는 돈형(敦亨)이다. 덕망이 있어 천거로 한성부 서윤(庶尹)이 되었다.
배위는 나주임씨 상중(象中)의 딸이다.
묘소는 충북 음성 금복동에 있다.
배위는 나주임씨 상중(象中)의 딸이다.
묘소는 충북 음성 금복동에 있다.
면휘(勉輝) 1740∼1811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사실(士實), 호조판서 경직의 차남 후영(後英)의 현손인 진사 민효(閔孝)의 계자로 생부는 찬형(?亨)이다. 1774년(영조 50) 생원시 2등에 합격, 목사를 지냈다.
배위는 청송심씨 명억(命億)의 딸이다.
묘소는 충남 아산 계림리 해좌에 있다.
배위는 청송심씨 명억(命億)의 딸이다.
묘소는 충남 아산 계림리 해좌에 있다.
명윤(命允) 1804∼1863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치백(致白), 호는 안호(安湖). 진주 출신으로서 덕천군의 13대손 완길(完吉)의 아들이며 전성부원군 준(準)의 8대손이다. 1838년(헌종 4)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가 되었고 1840년(헌종 6) 휘릉별검(徽陵別檢), 이듬해 성균관 전적 · 사헌부 감찰을 역임하였다. 1845년(헌종 11) 사간원 정언, 1855년(철종 6) 홍문관 수찬을 거쳐 다음 해 부교리를 지냈다. 1856년(철종 7) 교리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고향 진주 내평으로 내려가 은거하고 있었다. 1862년(철종 13) 2월에 일어난 진주민란의 주동자 류계춘(柳繼春)은 공의 동향인이다. 그때 공은 그곳 백성에게 신망이 두터웠다. 즉 문관조사(文官朝士)로서 지방민의 존경을 받고 있었으므로 마치 이 민란의 배후 지도자인 것처럼 소문을 퍼뜨렸다. 도회(都會)에 참석하지 않아 평소 공을 미워하던 지방 이서(吏胥)들에 의하여 민란의 주모자로 무고당하였다. 안핵사(按탢使) 박규수(朴珪壽)가 현지에서 조사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첫째 초군(樵軍)이 진주 읍내에 진입할 때 공도 읍내에 들어갔고, 둘째 초군이 읍내에 들어갈 때 일반 양반들에게 대해서는 닥치는 대로 폭행을 가하여 도로에 내왕조차 할 수가 없었으나 공에게만은 일제히 길을 열어주어 경의를 표하였다는 점, 셋째 초군들이 일반 양반이나 아전들의 가옥은 습격하여 파괴하였으나 공의 집안은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 등을 보고함에 따라 주동자로 몰려 그 해 5월 전라도 강진현(康津縣)의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 `피무사실(被誣事實)\'을 적어 자신이 무함(誣陷)을 입어 원통하다는 것을 피력하고는 날마다 산에 올라가 북쪽 서울을 향하여 통곡하였다. 이듬해인 1863년(철종 14) 여름, 철종장황제의 특사령이 내려졌으나 사서(赦書)가 도착하기 전에 배소에서 병사하였다.
묘소는 경남 진주시 곤명면 신흥리 만지동 정좌에 있다.
묘소는 경남 진주시 곤명면 신흥리 만지동 정좌에 있다.
명은(命殷) 1627∼1685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경숙(敬叔), 호는 백운(白雲) 혹은 봉천(鳳川). 관찰사 억손(億孫)의 현손이고 덕익(德益)의 아들이다. 진사로서 1675년(숙종 1)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하였고, 1677년 정언 · 지평을 거쳐 이듬해 장령이 되었으나 1679년 송시열(宋時烈)의 처단을 상소하고 사직하였다. 장령으로 있던 1679년, 송시열 · 송준길의 문인인 회덕(懷德)의 생원 송상민(宋尙敏)이 예송(禮訟)의 시말을 적은 책자를 올리자, 숙종대왕이 대노하여 송상민과 책자의 글을 쓴 박세징(朴世徵)이 옥사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때 양사(兩司)의 권대재(權大載) · 이수경(李壽慶) · 리현석(李玄錫) · 오정위(吳挺緯) · 송정렴(宋挺濂) · 배정휘(裵正徽) 등과 함께 송시열의 가죄(加罪)를 주청하여, 장기(長?)에 위리안치되어 있던 송시열은 거제도로 이배(移配)되었다. 그 뒤 5월에 사직하면서 다시 송시열을 사형에 처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노론이 집권하자 관계에서 물러나왔다. 글씨와 그림에 능했는데, 글씨로는 원천석(元天錫)의 묘갈과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의 묘비 등이 있고 저서로는 <백운필적(白雲筆迹)>이 있다.
배위는 숙부인 여흥이씨로 지정(志廷)의 딸이다. 묘소는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금산리 갑좌에 있다.
배위는 숙부인 여흥이씨로 지정(志廷)의 딸이다. 묘소는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금산리 갑좌에 있다.
문정(聞政) 1656∼1726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군필(君弼), 호는 농수(農첤), 시호는 정간(貞簡). 호조판서 경직의 증손이고 감찰 구성(九成)의 아들이다. 수호군(守護軍). 저서로 <농수수문록(農첤隨聞錄)> <신임일기(辛壬日記)>가 있으며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배위는 상산김씨 하석(夏錫)의 딸이다.
묘소는 청풍 자장 자좌에 있다.
배위는 상산김씨 하석(夏錫)의 딸이다.
묘소는 청풍 자장 자좌에 있다.
백형(百亨) 1737∼ ?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사능(士能), 경직의 5대손이며 광시(匡時)의 4남이다. 1773년(영조 49) 진사시에 급제하고, 1777년(정조 1) 증광전시 병과에 급제, 승지를 지냈다.
배위는 윤씨로 광하(光夏)의 딸이다.
배위는 윤씨로 광하(光夏)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