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성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79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온형(蘊馨) 1705∼1758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용선(用先), 호는 춘암(春菴) 혹은 월담(月潭)이다. 선성군의 10대손이고 노저 양원의 6대손이며 판서공 우정의 셋째 동생 우림(宇臨)의 손자이다.
1740년(영조 16)에 증광사마시에 응했다. 공은 일찍이 학문에 온 힘을 기울였으며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유고(遺稿)> 3권, <사례고(四禮考)>, <독서차기(讀書箚記)>, <동자의송(童子宜誦)>, <훈자첩(訓子帖)>, <시고(詩稿)>, <동사잡록(東史雜錄)>, <공언시화(空言詩話)>, <사론(史論)> 등이 유명하다.
묘소는 충북 괴산군 사리면 이곡리 해좌에 있다.
1740년(영조 16)에 증광사마시에 응했다. 공은 일찍이 학문에 온 힘을 기울였으며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유고(遺稿)> 3권, <사례고(四禮考)>, <독서차기(讀書箚記)>, <동자의송(童子宜誦)>, <훈자첩(訓子帖)>, <시고(詩稿)>, <동사잡록(東史雜錄)>, <공언시화(空言詩話)>, <사론(史論)> 등이 유명하다.
묘소는 충북 괴산군 사리면 이곡리 해좌에 있다.
용진(龍鎭) 1823∼1886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석로(錫老), 호는 석관(石퉓). 선성군의 13대손이며 노저 양원의 9대손이고 종포 백영의 손자, 주황(周璜)의 아들이다.
1866년(고종 3)에 감역이 되었다. <석관시집(石퉓詩集)> 3권이 전해진다.
1866년(고종 3)에 감역이 되었다. <석관시집(石퉓詩集)> 3권이 전해진다.
용화(容和) 1828∼1884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양배(陽培), 호는 하의(荷衣). 선성군의 15대손이고 노저 양원의 11대손이며 충신 시경의 10대손이다.
1864년(고종 1) <갑자보> 수보 때 개정 유사로서 종사에 공헌했고 성균관 진사 및 가선대부 내부협판이었다.
공의 아버지는 증통정대부 비서원승을 지낸 원연(源淵)이다. 아들은 학문이 높은 명익(明翊)과 명상(明翔)을 두었다.
1864년(고종 1) <갑자보> 수보 때 개정 유사로서 종사에 공헌했고 성균관 진사 및 가선대부 내부협판이었다.
공의 아버지는 증통정대부 비서원승을 지낸 원연(源淵)이다. 아들은 학문이 높은 명익(明翊)과 명상(明翔)을 두었다.
용화(龍和) 1879∼1919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운경(雲卿), 생부는 덕천군파(德泉君派) 상기(象琦)이고 양부는 원로(源老)이다. 선성군의 15대손이다.
고종태황제 국상을 기회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경기도 양주에서도 1919년 3월 3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공은 결연하게 일어나 격문을 뿌리고 사람을 끌어모아 지금의 광적면 가납리 광장에서 만세운동 중 일본헌병과 충돌하여 순절하였다. 지금도 그 장소를 `만세 현대인물
고종태황제 국상을 기회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경기도 양주에서도 1919년 3월 3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공은 결연하게 일어나 격문을 뿌리고 사람을 끌어모아 지금의 광적면 가납리 광장에서 만세운동 중 일본헌병과 충돌하여 순절하였다. 지금도 그 장소를 `만세 현대인물
우겸(宇謙) 1654∼1719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수백(受伯), 호는 만은(晩隱). 선성군의 8대손이며 노저 양원의 현손이고 판서공 우정의 넷째 동생이다.
1682년(숙종 8)에 진사에 입격하고 1689년(숙종 15)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 후 한림 · 대교 · 설서 · 옥당의 교리 · 지제교 · 이조정랑을 거쳐 세자 시강원에서 사서로서 세자에게 <천자> <사략> 등을 사전했고 양양부사 · 청주목사를 역임했다.
때는 당쟁이 극심할 때인데 공은 당파를 초월했다. 이조정랑으로 있을 때 희빈 장씨의 오빠 장희재가 승정원의 승지로 추천되는 것을 저지했으며 상신(相臣) 독대의 비위사실을 논소한 것은 지금까지도 유명하다.
묘소는 충북 괴산군 사창리 해좌에 있다.
1682년(숙종 8)에 진사에 입격하고 1689년(숙종 15)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 후 한림 · 대교 · 설서 · 옥당의 교리 · 지제교 · 이조정랑을 거쳐 세자 시강원에서 사서로서 세자에게 <천자> <사략> 등을 사전했고 양양부사 · 청주목사를 역임했다.
때는 당쟁이 극심할 때인데 공은 당파를 초월했다. 이조정랑으로 있을 때 희빈 장씨의 오빠 장희재가 승정원의 승지로 추천되는 것을 저지했으며 상신(相臣) 독대의 비위사실을 논소한 것은 지금까지도 유명하다.
묘소는 충북 괴산군 사창리 해좌에 있다.
우익(宇益) 1633∼1669 파명:선성군(宣城君)
  노저 양원의 아우인 양형의 현손이다. 음관으로 진사, 통훈대부로서 경기도 적성, 충청도 연기, 경상도 의흥의 현감을 역임했다.
묘소는 선성군 묘역 내에 있다.
묘소는 선성군 묘역 내에 있다.
우정(宇鼎) 1635∼1692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중백(重伯), 호는 취암(醉巖)이다. 선성군의 8대손이고 양원의 현손이며 성균관 직강공 익로의 아들이다.
1662년(현종 3)에 생원 · 진사 양시와 증광시 문과에 급제, 세자시강원 · 사간원 · 사헌부의 장과 승정원의 도승지, 평양부윤 ·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했고 예조판서 · 남한산성 수어사 · 한성판윤을 역임했다.
1691년(숙종 17) 정사로 중국 연경에 갔다가 그 이듬해에 임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공은 효성과 우애가 깊었으며 천성이 강직하여 사헌 · 사간에 있을 때 죽기를 겁내지 않고 임금께 직언을 하였다. 1689년(숙종 15) 왕의 계비 인현왕후가 폐비될 때 공은 연거푸 부당함을 상소하며 눈물로 간했건만 윤허되지 않았다. 또한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가 포도대장에 오르는 것을 극력 반대했다.
공의 묘소는 충북 괴산군 괴산읍 수락동 축좌에 있고 동록에 배위 나주정씨 묘가 있다. 공의 평안감사 때와 남한산성 수어사 때의 교서(敎書)와 120여 장의 공의 교지 및 누대 윗 조상들의 교지 등 다수를 직손 상수(商秀)가 보관 중이다.
1662년(현종 3)에 생원 · 진사 양시와 증광시 문과에 급제, 세자시강원 · 사간원 · 사헌부의 장과 승정원의 도승지, 평양부윤 ·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했고 예조판서 · 남한산성 수어사 · 한성판윤을 역임했다.
1691년(숙종 17) 정사로 중국 연경에 갔다가 그 이듬해에 임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공은 효성과 우애가 깊었으며 천성이 강직하여 사헌 · 사간에 있을 때 죽기를 겁내지 않고 임금께 직언을 하였다. 1689년(숙종 15) 왕의 계비 인현왕후가 폐비될 때 공은 연거푸 부당함을 상소하며 눈물로 간했건만 윤허되지 않았다. 또한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가 포도대장에 오르는 것을 극력 반대했다.
공의 묘소는 충북 괴산군 괴산읍 수락동 축좌에 있고 동록에 배위 나주정씨 묘가 있다. 공의 평안감사 때와 남한산성 수어사 때의 교서(敎書)와 120여 장의 공의 교지 및 누대 윗 조상들의 교지 등 다수를 직손 상수(商秀)가 보관 중이다.
우진(宇晉) 1640∼1698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진백(進伯). 선성군의 8대손이며 노저 양원의 현손이고 판서공 우정의 동생이다.
1675년(숙종 1)에 진사가 되고 1683년(숙종 9) 문과에 급제했다. 관직으로는 동부승지에 이르고 황해도 봉산 임소에서 세상을 떴다.
공의 묘소는 충북 괴산군 남대사동 자좌이다.
1675년(숙종 1)에 진사가 되고 1683년(숙종 9) 문과에 급제했다. 관직으로는 동부승지에 이르고 황해도 봉산 임소에서 세상을 떴다.
공의 묘소는 충북 괴산군 남대사동 자좌이다.
우춘(宇春) 1646∼1722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화서(和픊), 호는 사헌(思軒). 선성군의 8대손이며 세마공 시경의 손자이자 두로(斗老)의 아들이다.
성균관에서 사업(司業)을 맡았으며 증사헌부대사헌이었다. 저서로는 <사헌문집(思軒文集)> 2권이 전해지고 있다.
성균관에서 사업(司業)을 맡았으며 증사헌부대사헌이었다. 저서로는 <사헌문집(思軒文集)> 2권이 전해지고 있다.
원긍(源兢) 1849∼1919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공리(公履), 호는 취당(取堂). 노저 양원의 10대손이고 증 종2품 가선대부 내부협판 두진(斗鎭)의 아들이다.
1873년(고종 10)에 진사, 1889년(고종 26) 음성현감 · 춘천판관을 지냈다. 1891년(고종 28) 문과 증광병과에 급제하였으며 1894년 갑오개혁 때 승정원 부승지 · 이조참의로 있다가 8월에 북청부사(北靑府使), 1906년(광무 10) 의정부 토지 소관법 기초위원 · 경상북도 관찰사 · 경북재판소 판사 · 비서감승 · 법부협판 · 특별법원 판사 · 평리원 재판장 · 형법 교정관 · 봉상사장(奉常司長) · 내각부동산법 조사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07년(융희 1) 12월 종2품 가선대부에 승계, 조선조 고관양반으로서 이상재 · 리승만 · 유성준 · 김린 · 안기선 등과 같이 기독교에 최초로 집단 귀의했다.
묘동교회(廟洞 : 妙洞敎會)를 창건하였으며 장남 능화(能和)는 유명한 학자이며 차남 중화(重和)는 공의 뒤를 따라 묘동교회 장로였다.
3부자 묘소는 경기도 하남시 덕풍1동 산 64 선성군 산소 국내(局內)에 있다. 한말 여자교과서 · 중등지리지 등 다수의 저서가 있고 최초로 마태복음을 국역했다.
1873년(고종 10)에 진사, 1889년(고종 26) 음성현감 · 춘천판관을 지냈다. 1891년(고종 28) 문과 증광병과에 급제하였으며 1894년 갑오개혁 때 승정원 부승지 · 이조참의로 있다가 8월에 북청부사(北靑府使), 1906년(광무 10) 의정부 토지 소관법 기초위원 · 경상북도 관찰사 · 경북재판소 판사 · 비서감승 · 법부협판 · 특별법원 판사 · 평리원 재판장 · 형법 교정관 · 봉상사장(奉常司長) · 내각부동산법 조사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07년(융희 1) 12월 종2품 가선대부에 승계, 조선조 고관양반으로서 이상재 · 리승만 · 유성준 · 김린 · 안기선 등과 같이 기독교에 최초로 집단 귀의했다.
묘동교회(廟洞 : 妙洞敎會)를 창건하였으며 장남 능화(能和)는 유명한 학자이며 차남 중화(重和)는 공의 뒤를 따라 묘동교회 장로였다.
3부자 묘소는 경기도 하남시 덕풍1동 산 64 선성군 산소 국내(局內)에 있다. 한말 여자교과서 · 중등지리지 등 다수의 저서가 있고 최초로 마태복음을 국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