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양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75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득현(得鉉) 1843∼1922 파명:덕양군(德陽君)
  초휘는 구현(九鉉), 자는 성보(聖甫). 봉산군 형신(炯信)의 8대손이며 참판공 야의 7대손이다.
무과에 합격, 오위장에 이르렀다.
배위 숙부인 동래정씨(1845∼1890)는 찬용(燦容)의 딸이다.
무과에 합격, 오위장에 이르렀다.
배위 숙부인 동래정씨(1845∼1890)는 찬용(燦容)의 딸이다.
명제(明濟) 1724~1781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여량(汝亮).
덕양군의 7대손으로 1754년(영조 30) 생원이 되고 1777년(정조 1) 증광문과에 급제했다. 1781년(정조 5)에 사간원 정언에 오르고 통훈대부 행 사헌부 지평을 역임했다.
배위 숙인 진천송씨(1723∼1796)는 기손(基孫)의 딸이다.
덕양군의 7대손으로 1754년(영조 30) 생원이 되고 1777년(정조 1) 증광문과에 급제했다. 1781년(정조 5)에 사간원 정언에 오르고 통훈대부 행 사헌부 지평을 역임했다.
배위 숙인 진천송씨(1723∼1796)는 기손(基孫)의 딸이다.
무(堥) 1621∼1703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자삼(子三), 호는 낙계(駱溪) · 우천(牛川), 시호는 장정(莊靖). 봉래군의 3남으로 어머니는 증 참판 최행(崔行)의 딸이다. 이식(李植)의 문인이다.
1651년(효종 2)에 사마시에 합격, 1653년(효종 4)에 알성문과(謁聖文科) 병과에 합격하여 괴원에 뽑혀서 곧 설서(說書)가 되고 이어 한원에 들어가 검열이 되었다. 그 후 대교(待) · 봉교(奉) 겸 설서 · 전적(典籍)을 거쳐 예조 · 병조의 정랑으로 옮겼다가 외직으로 충청도 도사가 되고 다음 해에 병랑(兵郞) · 사서(司書) · 정언(正言) · 문학(文學)을 역임하였다.
1659년(효종 10)에 병조정랑으로 있을 때 상소를 올려 북로(北路)의 백성들이 질병과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음을 조목조목 나열하여 그 폐단에서 구원할 것을 진술하니, 임금이 비답(批答)하기를 “가상 하도다.”하고, 조정에서 다 청하는 대로 시행하게 되니, 북도 백성들이 힘을 입게 되었는데 얼마 후 파직되었다.
1660년(현종 1) 서용(敍用)되어 지평(持平)이 되었다. 겨울에 뇌성이 들리자 임금에게 차자(箚子)를 올려 경계할 것을 있는 힘을 다하여 직언하기를 “하늘에 감응하는 이치가 실로 덕을 닦고 반성하는 데에 있고, 닦고 반성하는 방법은 간하는 말을 받아 들이시고, 어진 사람을 쓰는 일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효종대왕이 승하 후 모후인 조대비(趙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로 남인과 서인간에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는데,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이 1년설을 주장하여 이것이 채택되자, 남인 윤선도(尹善道)가 이를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 이 때 공은 지평으로 있으면서 윤선도를 탄핵하였다. 1661년(현종 2) 다시 병조와 예조의 정랑 겸 춘추관 기주관(記注官)으로 옮기고 다음 해 송도(松都) 소윤(少尹)을 배명받고, 그 다음 해 다시 사헌부 장령으로 들어왔으나 이 해에 옛 병환이 도져서 집에서 몸 조섭을 하였다.
1665년(현종 6) 다시 남인의 거두인 허적(許積)의 잘못을 따지다가 임금의 뜻에 거슬리어 광릉 송추(松楸) 아래에서 두문불출하였다. 1666년(현종 7)에 성문밖까지만 내쫓는 가벼운 형별로 감형되었고, 1667년(현종 8) 용서를 받아 등용되었다. 풍덕부사 · 한산군수로 전임, 1671년(현종 12) 모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마치고, 태상정(太常正)을 거쳐 집의(執義)가 되었다. 그 후 종부정(宗簿正) · 헌납(獻納)이 되었다가 다시 종부시로 들어가니 10년 동안 금고(禁錮)를 당하면서도 임금의 은혜를 입음이 빈번하였으니 조정에서도 치하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같은 해 정월에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승하하자 산릉도감 청랑(廳郞)에 뽑혔으나 병환으로 사임하였고, 사간 · 집의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후 보덕(補德)으로서 집의가 되었다.
숙종 초기에는 사간이 되어 성학(聖學) 권장, 훌륭한 인재의 선발, 언로(言路) 개방, 선비 양성, 둔전제 폐지, 군정(軍政) 개혁 등을 역설하였고, 또 송나라 철종(哲宗)의 고사를 인용하여 선조(先朝)에서 견책받은 모든 신하들의 죄를 용서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현종대왕이 승하하자 이조정랑이 당하관의 반열을 압도하려 하므로 공이 그 부당함을 지적 통박하여, 비록 슬프고 창황한 중이지만 체계는 밝히지 않을 수 없다 하니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 1629∼1689)의 말로 “체계를 얻게 되었다.”하였다.
이 때 영남인(嶺南人) 곽세건(郭世楗 : 1618∼1686)이 간당(奸黨)에 앞장 서서 소를 올려 사류(士類)를 일망타진하려 하니 공이 사간(司諫)으로 홀로 임금께 아뢰어 국문(鞫問)하기를 청하였다. 공이 또 극론하였더니 임금의 뜻을 거슬렸다고 하여 체직(遞職)되니 간당들이 세력을 펴게 되었다.
공은 서울에 있는 것이 즐겁지 않아서 양주(陽州) 장리(庄里)에 집을 짓고 `둔길(遁吉)'이라 써붙이고 그 뜻을 나타냈다.
1680년(숙종 6)에 시사(時事)가 일변(一變)하여 곧장 기용되어 사성(司成)이 되었다가 사간으로 옮기었다. 그 후 호조 · 공조참의, 승지 등을 역임 후 또 공조참의를 배명받았다. 1689년(숙종 15) 공이 69세 때 시사가 크게 변하여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송시열(宋時烈 : 1607∼1689)이 제주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고 숙종대왕 계비 민씨(閔氏)가 폐출되었다. 그 후 두문불출하며 인사(人事)를 사절하였다.
1697년(숙종 23) 정월 대신이 임금께 아뢰어 공이 “세 조정 3조(三朝 : 효종 · 현종 · 숙종)의 근시(近侍)로서 나이가 80에 가까운데 우대가 없습니다.”하자 임금은 특별히 가선대부에 승진 시켰는데 이는 전에 없던 일이다. 2월에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호조참판으로 옮기고 특진관(特進官)에 뽑혔다.
1700년(숙종 26) 2월 연신(筵臣)들이 또 “공은 효종대왕 때의 한림(翰林)으로 나이가 80세이오니 마땅히 우대의 은전이 있어야 한다.”고 서로가 아뢰자 임금이 명하여 두 계급을 뛰어넘어 자헌대부의 계급을 더하여 지돈녕부사에 임명하였다. 계속하여 기사(耆社)에 참여하였으며, 내섬시 제조 겸직을 배명받았다. 글씨에 능하기도 했다.
1703년(숙종 29) 5월 21일 성동(城東) 구제(舊第)에서 별세하니 향년 83세였다.
1761년(영조 37)에 시호를 `간숙(簡肅) · 장정(莊靖) · 정간(靖簡)'으로 올렸다가 1788년(정조 12)에 장정(莊靖)으로 결정, 5월에 현손(玄孫) 동직(東直)의 집에서 시호를 받았는데 이조정랑 성덕우(成德雨)가 와서 선포하였다.
배위 증 정부인 전주최씨는 정사공신 판서 완천군(完川君) 증 영의정 내길(來吉)의 딸이고, 배위 정부인 청주한씨는 석중(碩中)의 딸이다.
신도비명이 있다.
1651년(효종 2)에 사마시에 합격, 1653년(효종 4)에 알성문과(謁聖文科) 병과에 합격하여 괴원에 뽑혀서 곧 설서(說書)가 되고 이어 한원에 들어가 검열이 되었다. 그 후 대교(待) · 봉교(奉) 겸 설서 · 전적(典籍)을 거쳐 예조 · 병조의 정랑으로 옮겼다가 외직으로 충청도 도사가 되고 다음 해에 병랑(兵郞) · 사서(司書) · 정언(正言) · 문학(文學)을 역임하였다.
1659년(효종 10)에 병조정랑으로 있을 때 상소를 올려 북로(北路)의 백성들이 질병과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음을 조목조목 나열하여 그 폐단에서 구원할 것을 진술하니, 임금이 비답(批答)하기를 “가상 하도다.”하고, 조정에서 다 청하는 대로 시행하게 되니, 북도 백성들이 힘을 입게 되었는데 얼마 후 파직되었다.
1660년(현종 1) 서용(敍用)되어 지평(持平)이 되었다. 겨울에 뇌성이 들리자 임금에게 차자(箚子)를 올려 경계할 것을 있는 힘을 다하여 직언하기를 “하늘에 감응하는 이치가 실로 덕을 닦고 반성하는 데에 있고, 닦고 반성하는 방법은 간하는 말을 받아 들이시고, 어진 사람을 쓰는 일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효종대왕이 승하 후 모후인 조대비(趙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로 남인과 서인간에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는데,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이 1년설을 주장하여 이것이 채택되자, 남인 윤선도(尹善道)가 이를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 이 때 공은 지평으로 있으면서 윤선도를 탄핵하였다. 1661년(현종 2) 다시 병조와 예조의 정랑 겸 춘추관 기주관(記注官)으로 옮기고 다음 해 송도(松都) 소윤(少尹)을 배명받고, 그 다음 해 다시 사헌부 장령으로 들어왔으나 이 해에 옛 병환이 도져서 집에서 몸 조섭을 하였다.
1665년(현종 6) 다시 남인의 거두인 허적(許積)의 잘못을 따지다가 임금의 뜻에 거슬리어 광릉 송추(松楸) 아래에서 두문불출하였다. 1666년(현종 7)에 성문밖까지만 내쫓는 가벼운 형별로 감형되었고, 1667년(현종 8) 용서를 받아 등용되었다. 풍덕부사 · 한산군수로 전임, 1671년(현종 12) 모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마치고, 태상정(太常正)을 거쳐 집의(執義)가 되었다. 그 후 종부정(宗簿正) · 헌납(獻納)이 되었다가 다시 종부시로 들어가니 10년 동안 금고(禁錮)를 당하면서도 임금의 은혜를 입음이 빈번하였으니 조정에서도 치하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같은 해 정월에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승하하자 산릉도감 청랑(廳郞)에 뽑혔으나 병환으로 사임하였고, 사간 · 집의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후 보덕(補德)으로서 집의가 되었다.
숙종 초기에는 사간이 되어 성학(聖學) 권장, 훌륭한 인재의 선발, 언로(言路) 개방, 선비 양성, 둔전제 폐지, 군정(軍政) 개혁 등을 역설하였고, 또 송나라 철종(哲宗)의 고사를 인용하여 선조(先朝)에서 견책받은 모든 신하들의 죄를 용서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현종대왕이 승하하자 이조정랑이 당하관의 반열을 압도하려 하므로 공이 그 부당함을 지적 통박하여, 비록 슬프고 창황한 중이지만 체계는 밝히지 않을 수 없다 하니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 1629∼1689)의 말로 “체계를 얻게 되었다.”하였다.
이 때 영남인(嶺南人) 곽세건(郭世楗 : 1618∼1686)이 간당(奸黨)에 앞장 서서 소를 올려 사류(士類)를 일망타진하려 하니 공이 사간(司諫)으로 홀로 임금께 아뢰어 국문(鞫問)하기를 청하였다. 공이 또 극론하였더니 임금의 뜻을 거슬렸다고 하여 체직(遞職)되니 간당들이 세력을 펴게 되었다.
공은 서울에 있는 것이 즐겁지 않아서 양주(陽州) 장리(庄里)에 집을 짓고 `둔길(遁吉)'이라 써붙이고 그 뜻을 나타냈다.
1680년(숙종 6)에 시사(時事)가 일변(一變)하여 곧장 기용되어 사성(司成)이 되었다가 사간으로 옮기었다. 그 후 호조 · 공조참의, 승지 등을 역임 후 또 공조참의를 배명받았다. 1689년(숙종 15) 공이 69세 때 시사가 크게 변하여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송시열(宋時烈 : 1607∼1689)이 제주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고 숙종대왕 계비 민씨(閔氏)가 폐출되었다. 그 후 두문불출하며 인사(人事)를 사절하였다.
1697년(숙종 23) 정월 대신이 임금께 아뢰어 공이 “세 조정 3조(三朝 : 효종 · 현종 · 숙종)의 근시(近侍)로서 나이가 80에 가까운데 우대가 없습니다.”하자 임금은 특별히 가선대부에 승진 시켰는데 이는 전에 없던 일이다. 2월에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호조참판으로 옮기고 특진관(特進官)에 뽑혔다.
1700년(숙종 26) 2월 연신(筵臣)들이 또 “공은 효종대왕 때의 한림(翰林)으로 나이가 80세이오니 마땅히 우대의 은전이 있어야 한다.”고 서로가 아뢰자 임금이 명하여 두 계급을 뛰어넘어 자헌대부의 계급을 더하여 지돈녕부사에 임명하였다. 계속하여 기사(耆社)에 참여하였으며, 내섬시 제조 겸직을 배명받았다. 글씨에 능하기도 했다.
1703년(숙종 29) 5월 21일 성동(城東) 구제(舊第)에서 별세하니 향년 83세였다.
1761년(영조 37)에 시호를 `간숙(簡肅) · 장정(莊靖) · 정간(靖簡)'으로 올렸다가 1788년(정조 12)에 장정(莊靖)으로 결정, 5월에 현손(玄孫) 동직(東直)의 집에서 시호를 받았는데 이조정랑 성덕우(成德雨)가 와서 선포하였다.
배위 증 정부인 전주최씨는 정사공신 판서 완천군(完川君) 증 영의정 내길(來吉)의 딸이고, 배위 정부인 청주한씨는 석중(碩中)의 딸이다.
신도비명이 있다.
문제(文濟) 1707∼1743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영숙(寧叔).
덕양군의 7대손으로 1741년(영조 17)에 문과 갑과에서 장원급제, 감제(柑製) 괴관(魁官)으로 종사랑을 걸쳐 승문원 부정자(副正字) · 한림 · 금촌도(金村道) 찰방을 역임했다.
배위 영일정씨(1707∼1780)는 도정 관하(觀河)의 딸이다.
자는 영숙(寧叔).
덕양군의 7대손으로 1741년(영조 17)에 문과 갑과에서 장원급제, 감제(柑製) 괴관(魁官)으로 종사랑을 걸쳐 승문원 부정자(副正字) · 한림 · 금촌도(金村道) 찰방을 역임했다.
배위 영일정씨(1707∼1780)는 도정 관하(觀河)의 딸이다.
방림(邦林) 1889∼1975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원민(元民), 호는 내석(乃石). 장정공 무(堥)의 9대손이다.
장정공(莊靖公) 묘하인 경기도 양주군 광적에서 대를 이어 장정공의 유덕을 계승한 명문으로, 아버지 승우(承禹)의 고매한 품격과 온후한 덕행을 이어받아 오직 학덕으로 90평생을 일관하였다.
양주 사림의 추천으로 회장직을 맡고 수십년동안 한결같이 성인(聖人)을 존중하고, 부자묘(夫子廟)를 옛터에 다시 세웠다. 또한 노강서원(鷺江書院)의 원장을 맡아 손수 물뿌리며, 문앞을 쓸었으며 도봉서원(道峯書院)을 세워 원장직을 맡기도 했다. 문장이 뛰어나고 덕이 있다는 소문으로 성균관 사성(司成)이 되었다.
종약원에는 `참여'로서 원무에 적극 협조하여, 영왕(英王)의 시호를 미리 정할 것을 원의(院議)에 제창하여 이를 의결하도록 하였다.
파종중에는 종산유지(宗山維持)를 위하여 종손가에서 종손과 함께 기거를 하면서 월여의 끈질긴 협상끝에 이를 `종산등기(宗山登記) 21인(人)' 공유로 하여 반석위에 올려 놓았다.
만년에는 79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3년 여에 걸쳐서 덕양세가(德陽世家)의 <세덕승(世德乘)>을 집필하였는데, 그 내용이 소상 · 방대하여, 후세들의 숭조관념 함양의 지표가 되는 지보적인 주옥같은 대역작이다.
공이 한일병탄 이 후 3년인 1913년 초부터, 상고이래 우리 나라에 이르기까지의 고금서적, 시담야화(市談野話)의 시비, 또는 사람의 선악을 불구하고 본 대로 들은 대로를 8 · 15광복까지 30여 년간, 후세들에게 참고될 만한 것을 추려서 순서없이 기록 정리하여 <총명보략(聰明補略)>이라 이름하였는데, 이는 `총명이 불여둔필(不如鈍筆)'이라는 뜻으로 상하 2권으로 되어 있다.
그 내용은 문학 · 정치 · 사회 · 여인상 등 다방면으로 호번(浩繁)하여 표현하기 어려운데, 한문체(漢文體)로 되어 있다. 이밖의 작품으로 <내석만필(乃石漫筆)> 5권 · <화동통고(華東通考)> 1권 · <감전조후(鑑前照後)> 4권이 있다.
배위 숙인 파평윤씨(1886∼1968)는 면주(冕周)의 딸이다.
장정공(莊靖公) 묘하인 경기도 양주군 광적에서 대를 이어 장정공의 유덕을 계승한 명문으로, 아버지 승우(承禹)의 고매한 품격과 온후한 덕행을 이어받아 오직 학덕으로 90평생을 일관하였다.
양주 사림의 추천으로 회장직을 맡고 수십년동안 한결같이 성인(聖人)을 존중하고, 부자묘(夫子廟)를 옛터에 다시 세웠다. 또한 노강서원(鷺江書院)의 원장을 맡아 손수 물뿌리며, 문앞을 쓸었으며 도봉서원(道峯書院)을 세워 원장직을 맡기도 했다. 문장이 뛰어나고 덕이 있다는 소문으로 성균관 사성(司成)이 되었다.
종약원에는 `참여'로서 원무에 적극 협조하여, 영왕(英王)의 시호를 미리 정할 것을 원의(院議)에 제창하여 이를 의결하도록 하였다.
파종중에는 종산유지(宗山維持)를 위하여 종손가에서 종손과 함께 기거를 하면서 월여의 끈질긴 협상끝에 이를 `종산등기(宗山登記) 21인(人)' 공유로 하여 반석위에 올려 놓았다.
만년에는 79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3년 여에 걸쳐서 덕양세가(德陽世家)의 <세덕승(世德乘)>을 집필하였는데, 그 내용이 소상 · 방대하여, 후세들의 숭조관념 함양의 지표가 되는 지보적인 주옥같은 대역작이다.
공이 한일병탄 이 후 3년인 1913년 초부터, 상고이래 우리 나라에 이르기까지의 고금서적, 시담야화(市談野話)의 시비, 또는 사람의 선악을 불구하고 본 대로 들은 대로를 8 · 15광복까지 30여 년간, 후세들에게 참고될 만한 것을 추려서 순서없이 기록 정리하여 <총명보략(聰明補略)>이라 이름하였는데, 이는 `총명이 불여둔필(不如鈍筆)'이라는 뜻으로 상하 2권으로 되어 있다.
그 내용은 문학 · 정치 · 사회 · 여인상 등 다방면으로 호번(浩繁)하여 표현하기 어려운데, 한문체(漢文體)로 되어 있다. 이밖의 작품으로 <내석만필(乃石漫筆)> 5권 · <화동통고(華東通考)> 1권 · <감전조후(鑑前照後)> 4권이 있다.
배위 숙인 파평윤씨(1886∼1968)는 면주(冕周)의 딸이다.
방현(邦鉉) 1822~1896 파명:덕양군(德陽君)
  정의공(靖毅公) 주철(周喆)의 아들로 무과에 올라 정헌대부 한성판윤 · 경연관 특진관에 이르렀다.
배위 정부인 청송심씨는 진사 능정(能鼎)의 딸이고, 배위 정부인 여흥민씨는 수현(壽顯)의 딸이며, 배위 정부인 남양홍씨는 용섭(龍燮)의 딸이다.
배위 정부인 청송심씨는 진사 능정(能鼎)의 딸이고, 배위 정부인 여흥민씨는 수현(壽顯)의 딸이며, 배위 정부인 남양홍씨는 용섭(龍燮)의 딸이다.
범제(範濟) 1734∼1776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문박(文博).
남곽공 기창(箕昌)의 손자로 1762년(영조 38)에 진사가 되고 1769년(영조 45)에 정시문과에 급제했다. 1776년(영조 52) 정언으로, 장사(杖死)했다. 1804년(순조 4)에 복관 되었다.
배위는 여산송씨와, 양천최씨 득천(得天)의 딸이다.
남곽공 기창(箕昌)의 손자로 1762년(영조 38)에 진사가 되고 1769년(영조 45)에 정시문과에 급제했다. 1776년(영조 52) 정언으로, 장사(杖死)했다. 1804년(순조 4)에 복관 되었다.
배위는 여산송씨와, 양천최씨 득천(得天)의 딸이다.
서(叙+土) 1652∼1725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태승(泰升).
봉산군의 6남으로 1677년(숙종 3)에 생원이 되고, 1695년(숙종 21)에 처음으로 벼슬길에 올라 신계 현령으로 부임하여 백성들을 잘 다스리어 통정대부에 올랐고, 파주 · 환주 · 성주 · 공주 네 고을의 목관(牧官)을 역임하였으며, 통정대부 돈녕부 도정에 이르렀다.
배위 숙부인 청주한씨(1654∼1733)는 성서(聖瑞)의 딸이다.
봉산군의 6남으로 1677년(숙종 3)에 생원이 되고, 1695년(숙종 21)에 처음으로 벼슬길에 올라 신계 현령으로 부임하여 백성들을 잘 다스리어 통정대부에 올랐고, 파주 · 환주 · 성주 · 공주 네 고을의 목관(牧官)을 역임하였으며, 통정대부 돈녕부 도정에 이르렀다.
배위 숙부인 청주한씨(1654∼1733)는 성서(聖瑞)의 딸이다.
숙(塾) 1621∼1680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학이(學而), 귀천군의 3남인 봉산군의 장남으로 혼전(魂殿) 집사에 차임(差任)되었고, 어모장군 충좌위 부사과에 이르렀다.
배위 숙인 여산송씨(1620∼1670)는 동지중추부사 현(鉉)의 딸이다.
배위 숙인 여산송씨(1620∼1670)는 동지중추부사 현(鉉)의 딸이다.
승구(承九) 1849∼ ? 파명:덕양군(德陽君)
  공은 양정공 기익(箕翊)의 7대손이다.
무과에 급제하고, 정평부사로 나아갔다.
1896년(고종 33)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배위는 진주강씨(1846∼1907)이다.
무과에 급제하고, 정평부사로 나아갔다.
1896년(고종 33)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배위는 진주강씨(1846∼1907)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