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46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의징(義徵) 1643∼1695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자는 대숙(大叔), 대군의 7대손이며 이조판서 응시의 아들이다. 1676년(숙종 2) 음직으로 진안현감에 배수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1681년(숙종 7) 암행어사 오도일(吳道一)의 추천으로 양리(良吏)로 선발되어 임금이 포장하였다. 이어 남원부사로 전임하여서는 가뭄이 들면 농사를 못짓는 오수방에 보를 막아 농사를 짓게 하여 그곳 사람들이 감복하여 공덕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남원 오수방에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를 세웠다.
이어 내직으로 승차하여 1689년(숙종 15) 호조참의에 이어 충청도 관찰사, 곧 이어 수원부사를 배수받았다. 다음 해인 1690년(숙종 16) 어영대장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3월 호조참판에 배수되었다. 1691년(숙종 17)에 공조판서에 특진되고 훈련대장을 겸임하였다. 이듬해 형조판서 겸 훈련대장에, 같은 해 7월 한성부판윤에 배수되고 훈련대장을 겸임하였다. 또한 임금은 갑주와 궁시를 하사하였다. 1693년(숙종 19) 9월 또 다시 형조판서를 제수받고, 같은 해 10월 다시 훈련대장이 되어 왕명으로 통진 문수산 일대를 답사하고 축성의 필요성을 진언하여 성을 쌓게 하였다. 11월에 지돈녕부사로 전임되었다.
1694년(숙종 20) 3월 장희빈과 장희재(張希載) 등이 밀모하여 폐비 민씨와 최숙원을 시해음모한다는 고변상소가 올라와 갑술옥사가 일어났다. 남인의 영수 민암(閔촒)을 비롯하여 모든 당상관이 유배되니, 공도 관직에서 물러나 거제현에 유배되었다. 새로 등장한 의정부와 간원에서 처형을 주장하였으나 임금은 번번히 허락하지 않았다. 대간의 끈질긴 탄핵으로 1695년(숙종 21) 정월 22일에 사약을 받고, 향년 53세로 세상을 떠났다. 1908년(순종 2) 3월 억울한 죄가 신원되고 복작되었다.
이어 내직으로 승차하여 1689년(숙종 15) 호조참의에 이어 충청도 관찰사, 곧 이어 수원부사를 배수받았다. 다음 해인 1690년(숙종 16) 어영대장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3월 호조참판에 배수되었다. 1691년(숙종 17)에 공조판서에 특진되고 훈련대장을 겸임하였다. 이듬해 형조판서 겸 훈련대장에, 같은 해 7월 한성부판윤에 배수되고 훈련대장을 겸임하였다. 또한 임금은 갑주와 궁시를 하사하였다. 1693년(숙종 19) 9월 또 다시 형조판서를 제수받고, 같은 해 10월 다시 훈련대장이 되어 왕명으로 통진 문수산 일대를 답사하고 축성의 필요성을 진언하여 성을 쌓게 하였다. 11월에 지돈녕부사로 전임되었다.
1694년(숙종 20) 3월 장희빈과 장희재(張希載) 등이 밀모하여 폐비 민씨와 최숙원을 시해음모한다는 고변상소가 올라와 갑술옥사가 일어났다. 남인의 영수 민암(閔촒)을 비롯하여 모든 당상관이 유배되니, 공도 관직에서 물러나 거제현에 유배되었다. 새로 등장한 의정부와 간원에서 처형을 주장하였으나 임금은 번번히 허락하지 않았다. 대간의 끈질긴 탄핵으로 1695년(숙종 21) 정월 22일에 사약을 받고, 향년 53세로 세상을 떠났다. 1908년(순종 2) 3월 억울한 죄가 신원되고 복작되었다.
이정(以鼎) 1624∼1694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만창의 아들이며 1664년(현종 5) 병절교위(秉節校尉)에 올랐다. 후에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전의이씨이다.
묘는 능동(陵洞) 유좌에 있으며 쌍봉이다.
배위는 전의이씨이다.
묘는 능동(陵洞) 유좌에 있으며 쌍봉이다.
일범(一范) 1700∼1756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자는 만갑(萬甲), 호는 괴암(槐岩). 호조참판 우춘의 아들이다. 무과에 올라 진해현감에 임명되고 이어 서천군수를 지냈다.
덕조(德祖) [1702(숙종 28)∼1777(정조 1)]
자는 윤보(潤甫), 통덕랑 경관(慶觀)의 아들이다. 1735년(영조 11) 무과에 올라 도사에 임명되고 통정대부에 올랐다.
덕조(德祖) [1702(숙종 28)∼1777(정조 1)]
자는 윤보(潤甫), 통덕랑 경관(慶觀)의 아들이다. 1735년(영조 11) 무과에 올라 도사에 임명되고 통정대부에 올랐다.
정수(廷秀) 1610∼1690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자는 고실(苦實), 대군의 5대손이며 하산도정의 손자로 추의 아들이다. 병자호란 이후 과거 공부를 폐하고 호를 부심자(腐心子)라 하였다. 효행으로 천거되어 침랑(寢郞) 능참봉에 다시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가선대부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정신(廷臣) 1559∼1627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자는 공보(公輔), 호는 역암(쫃庵) 또는 졸옹(拙翁). 군자감 판관 몽상(夢祥)의 아들이다. 나이 15세에 이미 사서에 통달하고 1579년(선조 12)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반궁(泮宮)에 있으면서 경학에 전념하고 1588년(선조 21) 봄에 문과에 올라 부정자(副正字)에 배수되고 이듬해에 승정원 주서, 1591년(선조 24)에 호조좌랑 · 의정부 검상 · 사인에 전보되었다. 또 이듬해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다. 1592년(선조 25)에 예조좌랑과 병조정랑을 지냈다. 4월에 왜적이 쳐들어와 임금이 서쪽으로 피난갈 때 사간원 헌납으로서 호종하였으며, 적군이 물러나자 임금을 받들어 서울로 돌아와 그 길로 호남에 내려갔다.
1594년(선조 27)에 김제군수를 제수받고, 1596년(선조 29) 순찰사 홍세공(洪世公)과 도원수 권율이 연이어 그 치적을 아뢰었으므로 이해 겨울 광주목사로 발탁되었다. 1597년(선조 30) 가을에 왜적이 남원을 함락시키고 이웃 고을을 핍박하기에 이르렀다. 공이 홀로 고을 안의 백성과 더불어 향병을 모집하고 계책을 세워 거의 보름 동안 방비하였다. 적병이 야습하여 성밑에 접근하니 공은 잠시 숨어서 이를 피하였으며 적은 안을 엿보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모두 물러갔다. 이에 즉시 고을로 돌아와 아전과 백성을 모아 수습하였으니 이런 까닭에 호남이 병화를 입은 뒤에도 광주가 맨 먼저 복구되었다.
이듬해 순찰사 황신(黃愼)이 사유를 갖추어 아룀으로써 통정대부에 올랐다. 이때에 명나라 군사가 순천에 오랫동안 주둔하여 적과 대치하는 상황이었다. 군량이 궁핍해지자 공은 광주에 축적된 곡식 수백석을 운반하여 군량을 조달했다. 호조참의 이민각(李民覺)이 또한 장계를 올리자 임금은 특별히 공에게 표리(表裏) 한벌을 하사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주부윤에 임명되었는데 떠나가는 날에 광주의 백성들이 모두 길을 막고 눈물을 흘렸으며 업적을 기록한 비를 세웠다. 명나라 군사가 돌아가는 길에 전주에서 오래 머물자 끝까지 접대하였으므로 임금은 어구의 말을 내려 은총을 베풀었다.
1601년(선조 34) 동부승지에 이어서 나주목사에 임명되어 한달이 채 안돼 치적이 널리 알려졌다. 이듬해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무덤 옆에 초가를 짓고 한결같이 법도를 따랐으며 1604년(선조 37)에 복상을 마치자 광주목사에 임명되었다. 다시 모친상을 당하여 부친상과 같이 복상을 마치자 1608년(선조 41) 안동대도호부사에 배수되고 1609년(광해군 1) 동지중추부사 · 의주부윤, 이어서 충청도 관찰사로 옮겼다. 1615년(광해군 7) 사은부사로 북경에 갔다가 돌아와 복명한 뒤 가의대부의 위계에 올랐다. 1617년(광해군 9) 죽산부사, 1620년(광해군 12) 한성부 우윤, 이어 좌윤에 찬리사가 되어 황해도 · 평안도에서 군무를 보살피고 계해정사가 있은 뒤에 중추부와 비변사 당상 및 경연특진관을 겸하였다. 이 해 9월에 경주부윤에 임명되고 1627년(인조 5)에 여진 오랑캐가 관서를 계속 함락하고 해서에 육박하자 임금이 서울을 떠나 강화도로 들어갔다. 이때 공이 호종하고 4월에 다시 호가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이 해 11월에 원주목사에 임명되어 부임한 지 며칠 안되어 12월 20일 향년 69세로 임지에서 생애를 마쳤다. 1627년(인조 5) 이듬해 2월 과천 장의동 선영에서 장사지냈다. 뒤에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신대리에 이장하였다.
1594년(선조 27)에 김제군수를 제수받고, 1596년(선조 29) 순찰사 홍세공(洪世公)과 도원수 권율이 연이어 그 치적을 아뢰었으므로 이해 겨울 광주목사로 발탁되었다. 1597년(선조 30) 가을에 왜적이 남원을 함락시키고 이웃 고을을 핍박하기에 이르렀다. 공이 홀로 고을 안의 백성과 더불어 향병을 모집하고 계책을 세워 거의 보름 동안 방비하였다. 적병이 야습하여 성밑에 접근하니 공은 잠시 숨어서 이를 피하였으며 적은 안을 엿보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모두 물러갔다. 이에 즉시 고을로 돌아와 아전과 백성을 모아 수습하였으니 이런 까닭에 호남이 병화를 입은 뒤에도 광주가 맨 먼저 복구되었다.
이듬해 순찰사 황신(黃愼)이 사유를 갖추어 아룀으로써 통정대부에 올랐다. 이때에 명나라 군사가 순천에 오랫동안 주둔하여 적과 대치하는 상황이었다. 군량이 궁핍해지자 공은 광주에 축적된 곡식 수백석을 운반하여 군량을 조달했다. 호조참의 이민각(李民覺)이 또한 장계를 올리자 임금은 특별히 공에게 표리(表裏) 한벌을 하사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주부윤에 임명되었는데 떠나가는 날에 광주의 백성들이 모두 길을 막고 눈물을 흘렸으며 업적을 기록한 비를 세웠다. 명나라 군사가 돌아가는 길에 전주에서 오래 머물자 끝까지 접대하였으므로 임금은 어구의 말을 내려 은총을 베풀었다.
1601년(선조 34) 동부승지에 이어서 나주목사에 임명되어 한달이 채 안돼 치적이 널리 알려졌다. 이듬해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무덤 옆에 초가를 짓고 한결같이 법도를 따랐으며 1604년(선조 37)에 복상을 마치자 광주목사에 임명되었다. 다시 모친상을 당하여 부친상과 같이 복상을 마치자 1608년(선조 41) 안동대도호부사에 배수되고 1609년(광해군 1) 동지중추부사 · 의주부윤, 이어서 충청도 관찰사로 옮겼다. 1615년(광해군 7) 사은부사로 북경에 갔다가 돌아와 복명한 뒤 가의대부의 위계에 올랐다. 1617년(광해군 9) 죽산부사, 1620년(광해군 12) 한성부 우윤, 이어 좌윤에 찬리사가 되어 황해도 · 평안도에서 군무를 보살피고 계해정사가 있은 뒤에 중추부와 비변사 당상 및 경연특진관을 겸하였다. 이 해 9월에 경주부윤에 임명되고 1627년(인조 5)에 여진 오랑캐가 관서를 계속 함락하고 해서에 육박하자 임금이 서울을 떠나 강화도로 들어갔다. 이때 공이 호종하고 4월에 다시 호가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이 해 11월에 원주목사에 임명되어 부임한 지 며칠 안되어 12월 20일 향년 69세로 임지에서 생애를 마쳤다. 1627년(인조 5) 이듬해 2월 과천 장의동 선영에서 장사지냈다. 뒤에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신대리에 이장하였다.
정익(廷翼) 1571∼1597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자는 군익(君翊), 호는 죽와(竹窩). 대군의 5대손이며 진사 몽경(夢慶)의 아들이다. 공은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깊었으며 큰 기질과 지략이 뛰어났다. 1597년(선조 30)에 왜구가 재침하여 왔을 때 현감 이원춘(李元春)이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고, 왜적의 후방이 끊이지 않으니 공이 의리에 격동하고 분발하여 울면서 백씨 정직(廷直)에게 부모의 봉양을 의탁하며 “다행히도 형제가 있으니 하나는 부모를 위할 것이며 하나는 나라를 위하면 이것이 충효에 두 가지를 온전히 하는 것이다.”하고 의병을 일으켜 적과 싸우다 순절하였다. 조봉대부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으니 이 사실이 <호남절의록>과 <봉성읍지>에 실려 있다. 석주관 옛 전쟁터에 사우를 짓고 단을 쌓아 매년 제향을 올린다. 행적기와 시 한편이 남아 있다.
진(캹) 1553∼1631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초휘는 수(璲), 자는 경유(景瑜). 대군의 4대손이며 진천군의 차남이다. 1580년(선조 13) 28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부장이 되고, 1592년(선조 25) 함종현령이 되었다. 이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안도 순찰사 리원익(李元翼)의 휘하로서 부산원(斧山院) 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고, 이듬해 정월 이여송의 평양 수복전에 참가하여 평안도 별장이 되었다. 1595년(선조 28) 평안도 순찰사 윤승길(尹承吉)의 휘하에서 진관속오군(鎭管束伍軍) 편성과 훈련의 책임을 맡아보았다. 그 공으로 온성부사로 임명되어 임기를 마치고 회령부사가 되어 여진족의 침입을 막아 왕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1603년(선조 36) 임진왜란의 논공행상 때 선무원종공신으로 책록되고, 1606년(선조 39) 회령부사 · 영흥부사 · 순천부사를 두루 거쳐 훈련도정에 올랐다. 1609년(광해군 1) 경상도 병마절도사로 나갔다가 그 다음해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전임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칠서지옥(七庶之獄) 사건에 연좌되어 오랫동안 유배생활을 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영사원종공신에 책록되어 훈련대장에 발탁되고, 포도대장을 역임하였다. 1628년(인조 6) 중추부사로 함경도 절도사를 겸하여 북방 경비에 많은 공을 세웠다. 1631년(인조 9) 향년 79세로 별세했다. 인조대왕은 부음을 듣고 애도하여 예조좌랑 김수익(金壽翼)을 보내어 `명문의 가계에서 태어나 무관으로 발신하여 여러 고을의 재상을 지내고 백성을 지성으로 사랑하였다. 오위의 장관이 되어 위풍이 늠름하였고 나이가 70이 넘어 작위가 2품에 이르렀도다. 근력이 쇠잔하지 않고 기운이 장사보다 더하니 위품이 있으며 나라의 노장이라 할 만하다. 도적을 잡는 것을 직책으로 하니 간사한 자들의 종적이 없어졌고, 내 일찍이 이를 가상히 여겨 왔는데 경이 홀연히 세상을 떠났도다. 선조의 무신이 다 저 세상으로 가고 나라가 적막하니 누구를 간성으로 삼을꼬? 조정에 임하니 탄식을 하게 되고 북소리를 들으니 비감한 생각이 드는도다.\'라는 조서를 내렸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영사원종공신에 책록되어 훈련대장에 발탁되고, 포도대장을 역임하였다. 1628년(인조 6) 중추부사로 함경도 절도사를 겸하여 북방 경비에 많은 공을 세웠다. 1631년(인조 9) 향년 79세로 별세했다. 인조대왕은 부음을 듣고 애도하여 예조좌랑 김수익(金壽翼)을 보내어 `명문의 가계에서 태어나 무관으로 발신하여 여러 고을의 재상을 지내고 백성을 지성으로 사랑하였다. 오위의 장관이 되어 위풍이 늠름하였고 나이가 70이 넘어 작위가 2품에 이르렀도다. 근력이 쇠잔하지 않고 기운이 장사보다 더하니 위품이 있으며 나라의 노장이라 할 만하다. 도적을 잡는 것을 직책으로 하니 간사한 자들의 종적이 없어졌고, 내 일찍이 이를 가상히 여겨 왔는데 경이 홀연히 세상을 떠났도다. 선조의 무신이 다 저 세상으로 가고 나라가 적막하니 누구를 간성으로 삼을꼬? 조정에 임하니 탄식을 하게 되고 북소리를 들으니 비감한 생각이 드는도다.\'라는 조서를 내렸다.
추(樞) 1576∼1637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자는 군실(君實), 대군의 현손이며 하산도정(河山都正)의 아들이다. 일찍이 수의부위를 지내고 병자호란 때 창신교위의 신분으로 참전했다가 강화도 마니산에서 순절했다. 통정대부로 추증되었다.
충작(忠綽) 1521∼1578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자는 군정(君貞), 호는 졸암(拙菴) · 낙빈(洛濱). 대군의 4대손이며 당은군(唐恩君)의 아들이다. 1559년(명종 14) 정시 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뽑혔으며, 1562년(명종 17) 학문이 해박하고 품행이 뛰어나 형조좌랑에 특진되었다. 또 공조 · 예조 · 병조를 두루 거치고 사헌부 지평 · 장령 · 지제교 · 사성 · 사섬시정 · 사간 등을 역임하고, 승정원 승지에 올랐으며 외직으로 여주목사 · 전주부윤 ·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다.
공은 마음을 맑게 하여 모든 일을 살펴서 모두 공의 덕을 송덕했다. 공은 모친 상을 당하여 묘지기하며 통곡하다가 눈이 하나 멀기까지 했다. 시에 능했고 저서도 많다.
공은 마음을 맑게 하여 모든 일을 살펴서 모두 공의 덕을 송덕했다. 공은 모친 상을 당하여 묘지기하며 통곡하다가 눈이 하나 멀기까지 했다. 시에 능했고 저서도 많다.
필(苾) 1659∼1746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자는 여휴(汝休), 증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 세림(世霖)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문무의 재능이 뛰어나고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다. 1683년(숙종 9) 무과에 급제하여 옹진군수가 되었다. 1746년(영조 22) 가선대부의 위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