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천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25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기임(基任) 1713∼ ?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맹전(孟全), 전성부원군 준(準)의 6대손이며 이(?)의 아들이다. 1766년(영조 42) 정시 병과에 급제, 병조좌랑을 지냈다.
배위는 부여서씨 함일(咸一)의 딸이다.
묘소는 양주군 사리봉 남쪽 언덕이다.
배위는 부여서씨 함일(咸一)의 딸이다.
묘소는 양주군 사리봉 남쪽 언덕이다.
기헌(箕?) 1673∼1750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성관(聖觀), 학성군(鶴城君)의 7대손이며 진하(鎭夏)의 차남이다. 진사로서 1727년(영조 3) 증광 문과 병과에 급제, 설서(說書)·현감·장령(掌令)·이조참의를 거쳐 통정대부에 이르렀다. 1728년(영조 4) 분무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배위는 연일정씨 증 판서 도행(道行)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가칠암 간좌이다.
배위는 연일정씨 증 판서 도행(道行)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가칠암 간좌이다.
대성(大成) 1651∼1718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시숙(始叔), 호는 취헌(翠軒). 판서 경직의 손자이며 이조판서 정영(正英)의 차남이다. 1682년(숙종 8) 진사가 되었고 음보(蔭補)로 호조좌랑에 이르렀으며, 1699년(숙종 25)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이듬해 지평을 지냈다. 1708년(숙종 34)에는 검토관을, 뒤에 강화부 유수를 지냈고, 1716년(숙종 42) 호조참판이 되어 사은 겸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했다. 그는 소론의 과격파였다.
배위는 풍산홍씨 판서 만용(万容)의 딸이다.
묘소는 인천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임좌에 있다.
배위는 풍산홍씨 판서 만용(万容)의 딸이다.
묘소는 인천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임좌에 있다.
대원(大遠) 1749∼1818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원기(元器), 경직의 7대손이며 도승지 면수(勉修)의 아들이다. 1780년(정조 4) 진사시 3등에 합격, 부사까지 지냈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평산신씨 현감 광정(光鼎)의 딸이다.
묘소는 청산 금대 간좌에 있다.
배위는 평산신씨 현감 광정(光鼎)의 딸이다.
묘소는 청산 금대 간좌에 있다.
대집(大楫) 1711∼1774 파명:덕천군(德泉君)
 대집(大楫) [1711(숙종 37)∼1774(영조 50)]
자는 제경(濟卿), 호는 운경(雲耕). 운수군의 9대손이며 화림부수의 7대손이고 이무(爾茂)의 장남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선략장군(宣略將軍) 도총부 도사(都事)를 지냈다.
배위는 광산이씨 징화(徵華)의 딸이다.
묘소는 전남 화순군 이서면 방아동 대봉 방아재 경좌이다.
자는 제경(濟卿), 호는 운경(雲耕). 운수군의 9대손이며 화림부수의 7대손이고 이무(爾茂)의 장남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선략장군(宣略將軍) 도총부 도사(都事)를 지냈다.
배위는 광산이씨 징화(徵華)의 딸이다.
묘소는 전남 화순군 이서면 방아동 대봉 방아재 경좌이다.
덕성(德成) 1655∼1704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득보(得甫), 호는 반곡(盤谷) 혹은 지비자(知非子). 판서 경직의 손자이며 후영(後英)의 차남이다. 1677년(숙종 3)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82년(숙종 8) 춘당대(春塘臺)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순안현령 · 정언 등을 거쳐 1687년(숙종 13) 동래부사가 되었고, 1698년(숙종 24) 승지로 동지부사가 되어 청에 다녀와서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글씨가 뛰어나며, 작품으로는 `광주(廣州) 헌릉비(獻陵碑)\' `예조참의 조한영비(曺漢英碑)\' `익위(翊衛) 최휘지(崔徽之) 표(表)\' 등이 있다. 1694년(숙종 20)에 쓴 <소학서문(小學序文)>이 있고, 영정(影幀)이 있다.
배위는 남양홍씨 석구(錫龜)의 딸이다.
묘소는 대흥 팔봉산 하 와야동 해좌에 있다.
배위는 남양홍씨 석구(錫龜)의 딸이다.
묘소는 대흥 팔봉산 하 와야동 해좌에 있다.
덕주(德周) 1617∼1682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성종(聖從), 상산군의 4대손이며 준(準)의 손자이고 방익(邦益)의 아들이다. 1668년(현종 9) 진사로 별시 문과 병과로 급제, 1675년(숙종 1) 지평(持平) · 장령(掌令) · 사간(司諫)을 지냈고, 이어 집의(執義) · 승지(承旨) · 충청도 관찰사 · 강원도 관찰사 · 한산군수를 역임하였다. 1682년(숙종 8) 허새(許璽)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심한 고문으로 세상을 떠났다. 증 이조참판.
배위는 풍천임씨 형(衡)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내산 임좌이다.
배위는 풍천임씨 형(衡)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내산 임좌이다.
만성(晩成) 1636∼1708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기숙(器叔), 예조판서 정영(正英)의 장남이다. 1666년(현종 7) 진사시에 합격, 음보(蔭補)로 세마(洗馬)가 되었고, 형조좌랑 · 호조정랑 · 평강현감을 역임했다.
1683년(숙종 9) 안성군수가 되어 소론에 소속되었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이 일어나자 사직하였고,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로 남인이 제거되자 한성부 판관에 임명되었다. 이어서 성천부사로 나갔으나 죄인을 문초하다가 죽게 하여 파면되었다. 1696년 복직되어 성주목사 · 장악원(掌樂院) 첨정(僉正) · 강화부 경력(經歷) · 선공감(繕工監) 부정(副正) · 예빈시정(禮賓寺正)을 지냈다. 1708년(숙종 34) 호군을 거쳐 돈녕부 도정에 이르렀다.
배위는 성주이씨 참의 인(?)의 딸이다.
묘소는 장단 송남면 가좌곡 손좌에 있다.
1683년(숙종 9) 안성군수가 되어 소론에 소속되었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이 일어나자 사직하였고,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로 남인이 제거되자 한성부 판관에 임명되었다. 이어서 성천부사로 나갔으나 죄인을 문초하다가 죽게 하여 파면되었다. 1696년 복직되어 성주목사 · 장악원(掌樂院) 첨정(僉正) · 강화부 경력(經歷) · 선공감(繕工監) 부정(副正) · 예빈시정(禮賓寺正)을 지냈다. 1708년(숙종 34) 호군을 거쳐 돈녕부 도정에 이르렀다.
배위는 성주이씨 참의 인(?)의 딸이다.
묘소는 장단 송남면 가좌곡 손좌에 있다.
면구(勉求) 1757∼1818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자여(子餘), 호는 남하(南霞). 대제학 광덕(匡德)의 손자이고 군수 국형(國亨)의 차남이며 면제(勉齊)의 아우이다. 1798년(정조 22) 생원시 2등에 합격하였다. 1800년 세마(洗馬)가 되었고, 1803년(순조 3) 사헌부 감찰에 이르러 그 해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록(弘文錄)에 등록되었다. 1805년(순조 5) 해서암행어사, 1806년 부수찬이 되었다. 1811년(순조 11) 부사직으로 통신부사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으며 의주부윤 · 대사성 등을 역임했다. 일찍이 청렴하여 가재를 돌보지 않아 생활이 곤궁하여도 태연하게 지냈으며, 조정에서는 소신대로 일을 처리했고, 지방관으로 나가서도 모두 잘 다스렸다. 시문에 뛰어났고 글씨도 잘 썼다. 특히 당나라의 백거이(白居易), 양나라 도홍경(陶弘景)의 필체를 따라 고아한 풍취를 풍겼다.
배위는 고령박씨 부사 인영(仁榮)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광숭리 삼거대산 간좌에 있다.
배위는 고령박씨 부사 인영(仁榮)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광숭리 삼거대산 간좌에 있다.
면긍(勉兢) 1753∼1812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대림(大臨), 경직의 6대손이며 영순(永淳)의 3남이다. 1768년(영조 44) 생원시에 급제하고, 1783년(정조 7)에 증광 문과에 장원, 이듬해 홍문관에 등용되어 응교(應敎) · 교리(校理) 등을 역임하였다. 1787년(정조 11)에 동지사 서장관으로 청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이조참의에 보직, 1789년(정조 13) 대사성(大司成)에 특진했다. 1792년(정조 16)에 영천군수로 나갔다가 다음 해 이조참의가 되었으나 관리 명단 작성을 소홀히 하여 판서 · 참판과 함께 파직되었다. 곧 복직되어 동부승지가 되었고, 1794년(정조 18)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우부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능(陵)에 제사지낼 때 제헌관(祭獻官)에 대한 감독 불충분으로 제사 절차에 차질을 초래하여 파직되었다. 1797년(정조 21) 다시 이조참의가 되었으나 기일 안에 부임하지 않아 금성현(金城縣)에 유배, 1799년(정조 23) 방환(放還)되어 다시 승지가 되었고, 1803년(순조 3)에 이조참판, 다음 해에 형조참판으로 충청도 안핵사를 겸직했다. 1805년(순조 5) 호조판서, 이듬해 평안도 관찰사, 한성부 판윤, 대사헌을 거쳐 6조의 각 판서를 역임했다.
배위는 진주류씨 지평 칭(?)의 딸이다.
묘소는 금화읍 학사리 사기막 해좌에 있다.
배위는 진주류씨 지평 칭(?)의 딸이다.
묘소는 금화읍 학사리 사기막 해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