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원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33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종도(宗道) 1792∼1867 파명:양원군(楊原君)
  종도(宗道) [1792(정조 16)∼1867(고종 4)]
자는 사성(士成), 호는 죽헌(竹軒). 성암 동규의 아들이다.
1792년(정조 16) 3월 20일에 태어나 1867년(고종 4) 5월 23일에 별세했다. 당세에 문필로 명성이 높았다. 배위는 여산송씨 삽(鈒)의 딸이며 배위 횡성고씨는 상석(相錫)의 딸로 1남 윤효(允孝)를 두었다. 묘소는 양주 노원 억동 묘좌에 있다.
자는 사성(士成), 호는 죽헌(竹軒). 성암 동규의 아들이다.
1792년(정조 16) 3월 20일에 태어나 1867년(고종 4) 5월 23일에 별세했다. 당세에 문필로 명성이 높았다. 배위는 여산송씨 삽(鈒)의 딸이며 배위 횡성고씨는 상석(相錫)의 딸로 1남 윤효(允孝)를 두었다. 묘소는 양주 노원 억동 묘좌에 있다.
종빈(鍾彬) 1809∼1886 파명:양원군(楊原君)
  종빈(鍾彬) [1809(순조 9)∼1886(고종 23)]
초휘는 복빈(復彬), 호는 구암(龜菴). 지영의 아들이다. 1809년(순조 9) 12월 28일 태어나 1886년(고종 23) 2월 26일 별세하였다. 문학과 효행으로 두 번이나 천거되어 임금에게 올리는 계문에 올랐다. 배위는 수안이씨 만영(晩榮)의 딸과 원주변씨 도순(道純)의 딸이다. 계자로 규익(奎翼)을 두었다. 묘소는 황해도 봉산군 누동 을좌에 있다.
초휘는 복빈(復彬), 호는 구암(龜菴). 지영의 아들이다. 1809년(순조 9) 12월 28일 태어나 1886년(고종 23) 2월 26일 별세하였다. 문학과 효행으로 두 번이나 천거되어 임금에게 올리는 계문에 올랐다. 배위는 수안이씨 만영(晩榮)의 딸과 원주변씨 도순(道純)의 딸이다. 계자로 규익(奎翼)을 두었다. 묘소는 황해도 봉산군 누동 을좌에 있다.
종수(宗遂) 1794∼ ? 파명:양원군(楊原君)
  종수(宗遂) [1794(정조 18)∼ ? ]
자는 공우(公尤), 호는 죽재(竹齋). 양원군의 9대손으로 1794년(정조 18) 12월 1일 태어났다. 재기가 뛰어나 총명하였고 덕성은 순박하고 두터웠다.
어려서부터 경사에 두루 통달하였으며, 과묵하였다.
자는 공우(公尤), 호는 죽재(竹齋). 양원군의 9대손으로 1794년(정조 18) 12월 1일 태어났다. 재기가 뛰어나 총명하였고 덕성은 순박하고 두터웠다.
어려서부터 경사에 두루 통달하였으며, 과묵하였다.
종익(鍾翊) 1819∼1908 파명:양원군(楊原君)
  종익(鍾翊) [1819(순조 19)∼1908(순종 2)]
자는 두경(斗卿), 초휘는 병의(炳儀), 호는 청전거사(靑甸居士). 양원군의 11대손으로 1819년(순종 2) 2월 15일에 함경북도 북청의 관사에서 태어나 향년 80세로 1908년(순종 2) 10월 12일에 양주 희곡 초옥에서 별세하였고 양주 읍내면 희곡 고산성 아래 임좌에 장례지냈다. 공의 성품은 관대하고 온화하며 검소하고 안으로는 매우 강직하였다. 이익을 위하여 구차스럽게 도모하지 않았고 일을 할 때는 구차하게 영합하지 않았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고 문예가 탁월하여 10세에 이미 몇 질의 서적을 읽어 의미와 장구에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1897년(광무 1) 정3품으로 승지, 가선대부의 품계에 올랐고 중추원 의관을 지냈다. 배위는 숙부인 창녕성씨로 재덕(在德)의 딸이며 1남 2녀을 두었으니 1남은 우승(禹承)이며 딸은 박면수(朴冕壽), 윤영기(尹榮岐)에게 출가했다.
자는 두경(斗卿), 초휘는 병의(炳儀), 호는 청전거사(靑甸居士). 양원군의 11대손으로 1819년(순종 2) 2월 15일에 함경북도 북청의 관사에서 태어나 향년 80세로 1908년(순종 2) 10월 12일에 양주 희곡 초옥에서 별세하였고 양주 읍내면 희곡 고산성 아래 임좌에 장례지냈다. 공의 성품은 관대하고 온화하며 검소하고 안으로는 매우 강직하였다. 이익을 위하여 구차스럽게 도모하지 않았고 일을 할 때는 구차하게 영합하지 않았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고 문예가 탁월하여 10세에 이미 몇 질의 서적을 읽어 의미와 장구에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1897년(광무 1) 정3품으로 승지, 가선대부의 품계에 올랐고 중추원 의관을 지냈다. 배위는 숙부인 창녕성씨로 재덕(在德)의 딸이며 1남 2녀을 두었으니 1남은 우승(禹承)이며 딸은 박면수(朴冕壽), 윤영기(尹榮岐)에게 출가했다.
준영(俊英) 1798∼1883 파명:양원군(楊原君)
  준영(俊英) [1798(정조 22)∼1883(고종 20)]
자는 수보(秀甫), 양원군의 10대손으로 1798년(정조 22) 7월 19일 한양 석산동 집에서 태어나 향년 86세로 1883년(고종 20) 11월 25일 양주 희곡의 상중에 초막에서 별세하였다. 모친은 한양조씨로 통덕랑 윤원(尹源)의 딸이다. 시부모를 섬기는데 뛰어난 덕행으로 순조대왕은 효부의 정려를 세우도록 명하였고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공은 19세에 중사마에 임명되고 36세에 장릉참봉과 의금부 도사를 거쳐 의영고(義盈庫) 직장과 장원서 별제 · 장흥고 주부를 역임, 1810년(순조 10) 영양현감이 되었다. 그 후 가선대부로 품계가 오르고 특별히 공조참판으로 제수된 후 종정경 겸 경연 특진관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임명되어 가의대부로 품계를 더하였다. 공의 성품은 청수하고 고결담백하고 검소하였다. 어려서부터 호학하여 다른 일에 뜻을 두지 않고 일찍이 정격의 문장을 익혀서 문예방면에 탁월하였고 효심이 지극하여 도리에 맞는 행실과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배위는 반남박씨로 3남 1녀를 두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어둔리 백현 해좌에 있다.
자는 수보(秀甫), 양원군의 10대손으로 1798년(정조 22) 7월 19일 한양 석산동 집에서 태어나 향년 86세로 1883년(고종 20) 11월 25일 양주 희곡의 상중에 초막에서 별세하였다. 모친은 한양조씨로 통덕랑 윤원(尹源)의 딸이다. 시부모를 섬기는데 뛰어난 덕행으로 순조대왕은 효부의 정려를 세우도록 명하였고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공은 19세에 중사마에 임명되고 36세에 장릉참봉과 의금부 도사를 거쳐 의영고(義盈庫) 직장과 장원서 별제 · 장흥고 주부를 역임, 1810년(순조 10) 영양현감이 되었다. 그 후 가선대부로 품계가 오르고 특별히 공조참판으로 제수된 후 종정경 겸 경연 특진관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임명되어 가의대부로 품계를 더하였다. 공의 성품은 청수하고 고결담백하고 검소하였다. 어려서부터 호학하여 다른 일에 뜻을 두지 않고 일찍이 정격의 문장을 익혀서 문예방면에 탁월하였고 효심이 지극하여 도리에 맞는 행실과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배위는 반남박씨로 3남 1녀를 두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어둔리 백현 해좌에 있다.
태승(台承) ? ∼ ? 파명:양원군(楊原君)
  태승(台承) [ ? ∼ ? ]
자는 성화(聖化), 호는 춘재(春齋). 양원군의 12대손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영민한 기상이 있었고 행동에 법도가 있었다. 책을 읽은 지 10년만에 문장이 거의 완성되었으나 가정에 습봉된 것이 없음을 한하여 근독당을 중수하고 부모님께 효도함이 남달랐다. 모든 가문에서 칭송이 많았다. 배위는 제주양씨 상태(相泰)의 딸로 살아있는 열부라 하였고 이른바 열녀 효부가 한 가문에 4명이 나왔다.
자는 성화(聖化), 호는 춘재(春齋). 양원군의 12대손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영민한 기상이 있었고 행동에 법도가 있었다. 책을 읽은 지 10년만에 문장이 거의 완성되었으나 가정에 습봉된 것이 없음을 한하여 근독당을 중수하고 부모님께 효도함이 남달랐다. 모든 가문에서 칭송이 많았다. 배위는 제주양씨 상태(相泰)의 딸로 살아있는 열부라 하였고 이른바 열녀 효부가 한 가문에 4명이 나왔다.
형도(衡道) 1731∼1795 파명:양원군(楊原君)
  형도(衡道) [1731(영조 7)∼1795(정조 19)]
자는 사평(士平), 통덕랑 덕기(德耆)의 아들로 1731년(영조 7) 6월 28일에 태어나 1795년(정조 19) 2월 29일에 별세했다. 문학으로 황해도 지방에서 으뜸이었다. 배위는 안동권씨 염(念)의 딸로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윤염(允廉)이고 차남은 윤검(允儉)이다. 딸은 청주한씨 상묵(象默)에게 출가했다. 묘소는 재령군 은비지방 매화동 건좌에 있다.
자는 사평(士平), 통덕랑 덕기(德耆)의 아들로 1731년(영조 7) 6월 28일에 태어나 1795년(정조 19) 2월 29일에 별세했다. 문학으로 황해도 지방에서 으뜸이었다. 배위는 안동권씨 염(念)의 딸로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윤염(允廉)이고 차남은 윤검(允儉)이다. 딸은 청주한씨 상묵(象默)에게 출가했다. 묘소는 재령군 은비지방 매화동 건좌에 있다.
형원(馨遠) 1666∼1717 파명:양원군(楊原君)
  형원(馨遠) [1666(현종 7)∼1717(숙종 43)]
자는 덕보(德甫), 초휘는 방(枋). 이조참판으로 추증된 유석(儒碩)의 장자로 1666년(현종 7) 3월 1일에 태어나 1717년(숙종 43) 5월 13일 별세하였다. 품계는 통덕랑에 이르렀다. 모친은 좌찬성으로 추증된 송강 문정공 철(澈)의 5대손 장흥고주부를 지낸 연일정씨 필(泌)의 딸이다. 공은 문장에 있어서 대책문이 특히 뛰어났고 내용은 풍부하여 의론이 원만하고 쉬워서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녹양동 지동 선영 계좌에 있다.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명익(命翊)이고 장녀는 사인 권지성(權知性)에게 출가했고 차녀는 황집(黃쏥)에게, 3녀는 현감 유욱기(兪郁基)에게 출가했다.
자는 덕보(德甫), 초휘는 방(枋). 이조참판으로 추증된 유석(儒碩)의 장자로 1666년(현종 7) 3월 1일에 태어나 1717년(숙종 43) 5월 13일 별세하였다. 품계는 통덕랑에 이르렀다. 모친은 좌찬성으로 추증된 송강 문정공 철(澈)의 5대손 장흥고주부를 지낸 연일정씨 필(泌)의 딸이다. 공은 문장에 있어서 대책문이 특히 뛰어났고 내용은 풍부하여 의론이 원만하고 쉬워서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녹양동 지동 선영 계좌에 있다.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명익(命翊)이고 장녀는 사인 권지성(權知性)에게 출가했고 차녀는 황집(黃쏥)에게, 3녀는 현감 유욱기(兪郁基)에게 출가했다.
후백(後白) 1677∼1703 파명:양원군(楊原君)
  후백(後白) [1677(숙종 3)∼1703(숙종 29)]
자는 문소(文素), 양원군의 4세손 봉릉도정의 증손으로 1677년(숙종 3) 10월 25일 태어나 1703년(숙종 29) 8월 28일에 별세하니 향년 28세였다. 모친은 무장김씨로 관찰사 극량(克良)의 딸이다. 공은 문예에 능하였고 사적에 장기가 있어서 여러번 초시에 합격하였으며 천품이 온화하고 공손하여 선과 의를 좋아하였다. 군서를 박람하여 천문, 지리, 수학, 병법에 통달하였다. 배위는 창녕성씨와 광주김씨이다. 1남을 두었다. 공의 묘소는 황해도 금천군 조지동에 있다.
자는 문소(文素), 양원군의 4세손 봉릉도정의 증손으로 1677년(숙종 3) 10월 25일 태어나 1703년(숙종 29) 8월 28일에 별세하니 향년 28세였다. 모친은 무장김씨로 관찰사 극량(克良)의 딸이다. 공은 문예에 능하였고 사적에 장기가 있어서 여러번 초시에 합격하였으며 천품이 온화하고 공손하여 선과 의를 좋아하였다. 군서를 박람하여 천문, 지리, 수학, 병법에 통달하였다. 배위는 창녕성씨와 광주김씨이다. 1남을 두었다. 공의 묘소는 황해도 금천군 조지동에 있다.
휘원(輝遠) 1675∼1721 파명:양원군(楊原君)
  휘원(輝遠) [1675(숙종 1)∼1721(경종 1)]
자는 덕소(德邵), 호는 물오헌(勿五軒). 양원군의 6대손으로 1675년(숙종 1) 5월 3일 태어나 1721년(경종 1) 4월 15일에 향년 47세로 별세하였다. 공의 기개는 빼어났으며 성품과 도량은 깊고 굳으며 관후하고 인자하며 일에 임함에는 지조를 지키고 분명하였다. 효성과 우애 또한 남달랐다. 공은 문장에 있어서 사부의책이 모두 뛰어났으며 특히 대책문이 뛰어났다. 공은 선교랑을 지냈고, 배위는 의인 반남박씨로 첨지증 참판 태서(泰舒)의 딸이다.
2남 1녀를 두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어둔리 선영후곡 임좌에 합폄하였다.
자는 덕소(德邵), 호는 물오헌(勿五軒). 양원군의 6대손으로 1675년(숙종 1) 5월 3일 태어나 1721년(경종 1) 4월 15일에 향년 47세로 별세하였다. 공의 기개는 빼어났으며 성품과 도량은 깊고 굳으며 관후하고 인자하며 일에 임함에는 지조를 지키고 분명하였다. 효성과 우애 또한 남달랐다. 공은 문장에 있어서 사부의책이 모두 뛰어났으며 특히 대책문이 뛰어났다. 공은 선교랑을 지냈고, 배위는 의인 반남박씨로 첨지증 참판 태서(泰舒)의 딸이다.
2남 1녀를 두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어둔리 선영후곡 임좌에 합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