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산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22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진식(震식) 1645∼1694 파명:무산군(茂山君)
  자는 군명(君明) 또는 경부(敬夫), 호는 사암(思菴). 무산군의 5대손이다. 춘계군의 3남인 오성군의 손자이고 현국의 4남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학문에 열중하였으며 1661년(현종 2) 사마시에 급제하고 1684년(숙종 10) 정시 병과에 등과하여 한림 · 응교 · 홍문관 박사 · 성균관 사예 등 여러 관직을 거쳤다. 기사환국 때 우암 송시열과 연루되어 유배 후 충남 청양땅에 은거하면서 후학양성에 힘썼다. 그 후 갑술옥사로 서인(西人)을 등용하면서 숙종대왕이 여러 차례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숙종대왕이 공의 학덕과 치세를 기리기 위해 벽함정(碧涵亭)이라고 친필로 쓴 사액을 내리고 이조판서로 증직하였다.
묘소는 수원 겸두박 간좌이었으나 실전되어 충남 청양군 남양면 신왕리 오성군 묘하에 설단하였다. 배위 정부인 의령남씨와 함께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학문에 열중하였으며 1661년(현종 2) 사마시에 급제하고 1684년(숙종 10) 정시 병과에 등과하여 한림 · 응교 · 홍문관 박사 · 성균관 사예 등 여러 관직을 거쳤다. 기사환국 때 우암 송시열과 연루되어 유배 후 충남 청양땅에 은거하면서 후학양성에 힘썼다. 그 후 갑술옥사로 서인(西人)을 등용하면서 숙종대왕이 여러 차례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숙종대왕이 공의 학덕과 치세를 기리기 위해 벽함정(碧涵亭)이라고 친필로 쓴 사액을 내리고 이조판서로 증직하였다.
묘소는 수원 겸두박 간좌이었으나 실전되어 충남 청양군 남양면 신왕리 오성군 묘하에 설단하였다. 배위 정부인 의령남씨와 함께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다.
태진(泰鎭) 1708∼1789 파명:무산군(茂山君)
  무산군의 9대손으로 판관 억대의 손자이다. 1725년(영조 1)에 무과에 급제하여 가의대부를 거쳐 자헌대부에 이르렀다.
배위는 정부인 용인송씨이다.
배위는 정부인 용인송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