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성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74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병철(秉哲) 1808∼1882 파명:밀성군(密城君)
  병철(秉哲) [1808(순조 8)∼1882(고종 19)]
자는 명여(明汝), 밀성군의 13대손이며 평릉정(平陵正)의 10대손이고 헌원(憲元)의 계자로 생부는 헌수(憲需)이다.
진사 · 현감 · 도정을 지냈다.
묘소는 충남 연기군 북면 부곡 자좌에서 충북 청원군 남이면 가마리 사장치 선영계하 자좌에 이폄하였다.
배위는 숙부인 청주한씨와 김해김씨이다.
자는 명여(明汝), 밀성군의 13대손이며 평릉정(平陵正)의 10대손이고 헌원(憲元)의 계자로 생부는 헌수(憲需)이다.
진사 · 현감 · 도정을 지냈다.
묘소는 충남 연기군 북면 부곡 자좌에서 충북 청원군 남이면 가마리 사장치 선영계하 자좌에 이폄하였다.
배위는 숙부인 청주한씨와 김해김씨이다.
복상(復祥) 1712∼1778 파명:밀성군(密城君)
  복상(復祥) [1712(숙종 38)∼1778(정조 2)]
자는 여시(汝始), 호는 입지당. 면지(勉之)의 장남이다.
1741년(영조 17) 성균관 진사 · 장릉참봉을 지내고, 1766년(영조 42) 정시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군수를 비롯하여 경주부윤을 역임하고 가선대부에 올라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묘품리 해좌에 있다.
배위는 양주조씨이다.
자는 여시(汝始), 호는 입지당. 면지(勉之)의 장남이다.
1741년(영조 17) 성균관 진사 · 장릉참봉을 지내고, 1766년(영조 42) 정시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군수를 비롯하여 경주부윤을 역임하고 가선대부에 올라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묘품리 해좌에 있다.
배위는 양주조씨이다.
복여(福輿) 1617~1679 파명:밀성군(密城君)
 福輿 광해군(9년)丁巳 1617년~숙종(5년)己未 1679,
字는 君五 春祿의 아들(入鄕祖)이며 通德郞(正五品)벼슬을 하였다,墓는 경북 상주 모동면 지장동 후 만초곡 손좌이다,
配位는 恭人 김해김씨로 父 海運의 딸이며 墓는 충북 영동군 황간면 신의현 사기점곡 갑좌이다,
아들로 一男. 敏錫 숙종(21년)乙亥 1695년 ~영조(44년)戊子1768년생과 二男.敏述 영조(3년)丁未 1727년~영조(41년)乙酉 1765년생을 두셨다,
字는 君五 春祿의 아들(入鄕祖)이며 通德郞(正五品)벼슬을 하였다,墓는 경북 상주 모동면 지장동 후 만초곡 손좌이다,
配位는 恭人 김해김씨로 父 海運의 딸이며 墓는 충북 영동군 황간면 신의현 사기점곡 갑좌이다,
아들로 一男. 敏錫 숙종(21년)乙亥 1695년 ~영조(44년)戊子1768년생과 二男.敏述 영조(3년)丁未 1727년~영조(41년)乙酉 1765년생을 두셨다,
봉상(鳳祥) 1707∼1772 파명:밀성군(密城君)
  봉상(鳳祥) [1707(숙종 33)∼1772(영조 48)]
자는 의소(儀韶), 호는 설천(雪川), 시호는 문경(文敬). 이명(?命)의 장손이며 기지(器之)의 장남이다.
1722년(경종 2) 신임사화 때 가족을 멸족시킨다는 소문을 듣고, 변복하고 무주로 도망가 굴속에서 기거하다가 1725년(영조 1) 영조대왕이 좌의정 이명(命)의 후손을 찾는다는 소문을 듣고, 임금을 만났다. 공릉참봉에 임명됐으나 곧 사직하고 충남 부여군 임천면 옥곡리에서 성리학 연구에 열중했다. 1754년(영조 30)에 충청도사, 1757년(영조 33)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하였으며 문집 20권이 있다. 1858년(철종 9) 가선대부 · 대사헌 겸 성균관 좨주에 추증되고, 1879년(고종 16)에 시호가 내려졌다.
묘소는 충남 부여군 임천면 옥곡리 임좌에 있다.
배위는 증 정부인 안동김씨와 증 정부인 온양정씨이다.
자는 의소(儀韶), 호는 설천(雪川), 시호는 문경(文敬). 이명(?命)의 장손이며 기지(器之)의 장남이다.
1722년(경종 2) 신임사화 때 가족을 멸족시킨다는 소문을 듣고, 변복하고 무주로 도망가 굴속에서 기거하다가 1725년(영조 1) 영조대왕이 좌의정 이명(命)의 후손을 찾는다는 소문을 듣고, 임금을 만났다. 공릉참봉에 임명됐으나 곧 사직하고 충남 부여군 임천면 옥곡리에서 성리학 연구에 열중했다. 1754년(영조 30)에 충청도사, 1757년(영조 33)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하였으며 문집 20권이 있다. 1858년(철종 9) 가선대부 · 대사헌 겸 성균관 좨주에 추증되고, 1879년(고종 16)에 시호가 내려졌다.
묘소는 충남 부여군 임천면 옥곡리 임좌에 있다.
배위는 증 정부인 안동김씨와 증 정부인 온양정씨이다.
사명(師命) 1647∼1689 파명:밀성군(密城君)
  사명(師命) [1647(인조 25)∼1689(숙종 15)]
자는 백길(伯吉), 호는 포암(蒲庵). 민적(敏迪)의 장남이다.
원종공신 2등에 올랐으며 원훈 완녕군(完寧君)이 되었다. 1673년(현종 14) 진사시에 장원하고, 1680년(숙종 6) 창릉참봉을 지냈다. 같은 해 문과에 장원하여 정언을 거쳐, 그 후 사간원 · 홍문관에 있다가 전라도 관찰사, 형조판서 · 병조판서를 지내다가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공훈 원훈이 병삭되었다. 그 후 완전 복관되었으나 1722년(경종 2) 신임사화(辛壬士禍)로 다시 추탈되었다가 1725년(영조 1)에 복관되었다.
묘소는 충남 부여군 임천면 옥곡리 초막동 유좌에 있다.
배위는 정부인 안정나씨와 정부인 임천조씨이다. 정부인 임천조씨는 부군 완녕군과 숙질인 이명과 희지가 귀양을 가자 통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어 1722년(경종 2)에 순사하여 열녀정려(烈女旌閭)가 내려졌다.
자는 백길(伯吉), 호는 포암(蒲庵). 민적(敏迪)의 장남이다.
원종공신 2등에 올랐으며 원훈 완녕군(完寧君)이 되었다. 1673년(현종 14) 진사시에 장원하고, 1680년(숙종 6) 창릉참봉을 지냈다. 같은 해 문과에 장원하여 정언을 거쳐, 그 후 사간원 · 홍문관에 있다가 전라도 관찰사, 형조판서 · 병조판서를 지내다가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공훈 원훈이 병삭되었다. 그 후 완전 복관되었으나 1722년(경종 2) 신임사화(辛壬士禍)로 다시 추탈되었다가 1725년(영조 1)에 복관되었다.
묘소는 충남 부여군 임천면 옥곡리 초막동 유좌에 있다.
배위는 정부인 안정나씨와 정부인 임천조씨이다. 정부인 임천조씨는 부군 완녕군과 숙질인 이명과 희지가 귀양을 가자 통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어 1722년(경종 2)에 순사하여 열녀정려(烈女旌閭)가 내려졌다.
성록(成祿) 1559∼1627 파명:밀성군(密城君)
  성록(成祿) [1559(명종 14)∼1627(인조 5)]
자는 성지(成之), 밀성군의 5대손이며 극강(克綱)의 장남이다. 1591년(선조 24) 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형조참의에 올랐으며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내리 능곡 주금산 선영이며 표석이 있다.
배위는 정부인 해주최씨로 묘는 합폄이다.
자는 성지(成之), 밀성군의 5대손이며 극강(克綱)의 장남이다. 1591년(선조 24) 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형조참의에 올랐으며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내리 능곡 주금산 선영이며 표석이 있다.
배위는 정부인 해주최씨로 묘는 합폄이다.
세무(世茂) 1637∼1698 파명:밀성군(密城君)
  세무(世茂) [1637(인조 15)∼1698(숙종 24)]
자는 화숙(華叔), 광원군의 5대손이며 민달(敏達)의 차남이다.
1660년(현종 1) 생원 · 현감이 되고, 1681년(숙종 7) 식년문과 갑과에 급제, 파주목사 · 황주목사를 거쳐 참의를 역임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기곡 해좌에 있다.
배위는 숙부인 강릉김씨와 숙부인 청송심씨이다.
자는 화숙(華叔), 광원군의 5대손이며 민달(敏達)의 차남이다.
1660년(현종 1) 생원 · 현감이 되고, 1681년(숙종 7) 식년문과 갑과에 급제, 파주목사 · 황주목사를 거쳐 참의를 역임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기곡 해좌에 있다.
배위는 숙부인 강릉김씨와 숙부인 청송심씨이다.
세욱(世郁) 1642∼ ? 파명:밀성군(密城君)
  세욱(世郁) [1642(인조 20)∼ ? ]
자는 문숙(文叔), 광원군의 5대손이며 민각(敏覺)의 차남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영장(營將)을 지냈다.
묘소는 광주 고읍에 있다.
배위는 풍덕김씨이다.
자는 문숙(文叔), 광원군의 5대손이며 민각(敏覺)의 차남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영장(營將)을 지냈다.
묘소는 광주 고읍에 있다.
배위는 풍덕김씨이다.
수록(綏祿) 1564∼1620 파명:밀성군(密城君)
  수록(綏祿) [1564(명종 19)∼1620(광해군 12)]
자는 유지(綏之), 호는 동고(東皐). 극강(克綱)의 3남이다.
1586년(선조 19)에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광주목사와 상주목사를 역임하다가 1617년(광해군 9)에 폐모론에 반대하여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리원익(李元翼) · 정엽(鄭曄) 등과 교유하다가 여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신병을 이유로 거절하였다. 1620년(광해군 12) 통정대부에 올랐고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양근리 간좌이다. 양평군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되었으며, 1992년 양평군 용문면 조현리 산48의 13으로 이장하였다. 비문은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이 찬하였다. 문집에 <동고문집>이 있다.
배위는 정경부인 진천송씨이며 묘소는 합부이다.
자는 유지(綏之), 호는 동고(東皐). 극강(克綱)의 3남이다.
1586년(선조 19)에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광주목사와 상주목사를 역임하다가 1617년(광해군 9)에 폐모론에 반대하여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리원익(李元翼) · 정엽(鄭曄) 등과 교유하다가 여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신병을 이유로 거절하였다. 1620년(광해군 12) 통정대부에 올랐고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양근리 간좌이다. 양평군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되었으며, 1992년 양평군 용문면 조현리 산48의 13으로 이장하였다. 비문은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이 찬하였다. 문집에 <동고문집>이 있다.
배위는 정경부인 진천송씨이며 묘소는 합부이다.
승록(承祿) 1573∼1660 파명:밀성군(密城君)
  승록(承祿) [1573(선조 6)∼1660(현종 1)]
자는 승지(承之), 극륜의 계자이며 생원 · 현감 · 첨추를 역임하였다. 묘소는 충북 청원군 남이면 가마리 수유현 임좌이며 현손 신지(愼之)가 찬한 묘표가 있다.
배위는 풍천임씨와 경주노씨, 영광장씨이다. 숙부인 풍천임씨의 묘소는 가마리 대곡 뒤 선영하에 있으며 표석이 있다.
자는 승지(承之), 극륜의 계자이며 생원 · 현감 · 첨추를 역임하였다. 묘소는 충북 청원군 남이면 가마리 수유현 임좌이며 현손 신지(愼之)가 찬한 묘표가 있다.
배위는 풍천임씨와 경주노씨, 영광장씨이다. 숙부인 풍천임씨의 묘소는 가마리 대곡 뒤 선영하에 있으며 표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