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녕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52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득인(得仁) 1541∼1612 파명:경녕군(敬寧君)
  청평도정의 아들로, 천성이 호탕하고 영특하며, 문장이 뛰어나 임금이 지평에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음사로 사과를 지냈다.
묘소는 강화 구주동 자좌이다. 배위는 숙부인 의령남씨로 참봉 상하(尙夏)의 딸이다. 아들로 중명(重溟)이 있다.
묘소는 강화 구주동 자좌이다. 배위는 숙부인 의령남씨로 참봉 상하(尙夏)의 딸이다. 아들로 중명(重溟)이 있다.
만백(萬白) 1672∼1757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여장(汝章), 복성군의 9대손 선룡(善龍)의 아들이다. 증 가선대부 한성부윤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이 되었다.
묘소는 전남 영암군 신북면 갈곡 비실치 유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함안박씨로 정룡(廷龍)의 딸이다. 슬하에 태경(台卿) 1남을 두었다.
묘소는 전남 영암군 신북면 갈곡 비실치 유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함안박씨로 정룡(廷龍)의 딸이다. 슬하에 태경(台卿) 1남을 두었다.
명(銘) 1575∼ ?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경원(敬遠), 복성군의 현손 용침(用沈)의 아들이다. 1594년(선조 27) 문과급제하여 선전관을 제수받았으나 거절하였다. 통정대부와 증 장락원 정이 되었다.
묘소는 남포 심전면 선조 유좌이다. 배위는 숙인 평산신씨로 장사랑 응복(應福)의 딸이다. 슬하에 의영(義英) 1남을 두었다.
묘소는 남포 심전면 선조 유좌이다. 배위는 숙인 평산신씨로 장사랑 응복(應福)의 딸이다. 슬하에 의영(義英) 1남을 두었다.
명견(命堅) 1596∼1639 파명:경녕군(敬寧君)
  은천군의 현손 척(滌)의 아들이다. 증 통정대부 공조참의의 벼슬을 지냈다.
묘소는 선영 국내 옥전산 임좌이다. 배위는 증 숙부인 남원양씨로 참봉 홍제(弘濟)의 딸이다. 슬하에 혜(蕙) 1남을 두었다.
묘소는 선영 국내 옥전산 임좌이다. 배위는 증 숙부인 남원양씨로 참봉 홍제(弘濟)의 딸이다. 슬하에 혜(蕙) 1남을 두었다.
문욱(文郁) 1546∼ ? 파명:경녕군(敬寧君)
  단산도정의 증손 침(沈)의 아들이다. 행 군자감정을 지내고,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이 되었다.
묘소는 충남 홍성군 홍북면 초막동 유좌이다. 배위는 증 숙부인 평산신씨로 통덕랑 지(祉)의 딸이다. 계자로 혁(爀)이 있다.
묘소는 충남 홍성군 홍북면 초막동 유좌이다. 배위는 증 숙부인 평산신씨로 통덕랑 지(祉)의 딸이다. 계자로 혁(爀)이 있다.
민구(敏求) 1589∼1670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자시(子時), 호는 동주(東洲) 또는 관해(觀海). 수광의 차남이다. 1609년(광해군 1)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12년(광해군 4) 증광 별시 갑과에 장원급제하여 수찬으로 등용되었다. 이어서 예조 · 병조좌랑이 되었고, 1622년(광해군 14) 지평이 되고, 이듬해 선위사로 일본사신을 대접하였다. 교리 · 응교 등을 거쳐 1623년(인조 1) 사가독서를 하였고,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도원수 장만의 종사관이 되어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1626년(인조 4) 대사간이 되고, 이듬해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병조참의가 되어 세자를 모시고, 남쪽으로 난을 피하였다. 그 해 승지가 되었다가 외직인 임천군수로 나갔다. 1636년(인조 14) 이조참판 · 동지경연사를 역임하고, 이 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도검찰부사가 되어 왕을 강화에 모시기 위한 배편을 준비하였으나, 적군의 진격이 빨라 어가의 길을 막았으므로, 임금이 부득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소임을 완수할 수 없었다. 난이 끝난 뒤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다는 죄로 아산에 유배되었다가 영변으로 옮겼다. 유배지에서 책임을 통감하면서 날마다 눈물로 자책을 하다가 1649년(인조 27)에 풀려났다. 그 뒤 부제학·대사성 도승지·예조참판 등을 지냈다. 문장에 뛰어나고 사부(詞賦)에 능하였을 뿐 아니라 저술을 좋아해서 평생에 쓴 책이 4,000권이 되었으나 병화에 거의 타버렸다. 저서로는 <동주집(東洲集)> <독사수필(讀史隨筆)> <간언귀감(諫言龜鑑)> <당률광선(唐律廣選)> 등이 있다.
백윤(百潤) 1778∼1832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치호(致好), 은천군의 11대손 진룡(鎭龍)의 아들이다.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이 되었다.
묘소는 충북 충주시 노은면 안락동 오좌이다. 배위는 경주김씨로 효달(孝達)의 딸이다. 슬하에 용권(容權) · 용기(容機) · 용실(容實) 3남을 두었다.
묘소는 충북 충주시 노은면 안락동 오좌이다. 배위는 경주김씨로 효달(孝達)의 딸이다. 슬하에 용권(容權) · 용기(容機) · 용실(容實) 3남을 두었다.
병선(秉善) 1781∼1857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덕윤(德潤), 호는 국(菊). 단산도정 11대손 오(墺)의 계자이고 생부는 철(喆)이다. 증 통정대부 공조참의가 되었다.
묘소는 충북 청주시 강서면 내거산 유좌이다. 배위는 숙부인 진주류씨로 환성(煥星)의 딸이다. 슬하에 용원(容元) · 용정(容貞) · 용상(容常) · 용관(容觀) 4남을 두었다.
묘소는 충북 청주시 강서면 내거산 유좌이다. 배위는 숙부인 진주류씨로 환성(煥星)의 딸이다. 슬하에 용원(容元) · 용정(容貞) · 용상(容常) · 용관(容觀) 4남을 두었다.
병수(秉洙) 1779∼1851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시지(時之), 은천군의 11대손 창하(昌夏)의 아들이다.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의금부사가 되었다.
묘소는 충북 충주시 노은면 양촌 서록 건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풍양조씨로 운집(雲集)의 딸이다. 슬하에 용회(容晦) · 용락(容樂) · 용상(容尙) 3남을 두었다.
묘소는 충북 충주시 노은면 양촌 서록 건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풍양조씨로 운집(雲集)의 딸이다. 슬하에 용회(容晦) · 용락(容樂) · 용상(容尙) 3남을 두었다.
빈(斌) 1564∼ ?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성지(成之), 호는 모재(慕齋). 오성군의 증손 경룡의 아들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친지를 부양하는 데 지극하였다. 당시 집안에 고관이 많았지만 벼슬을 사양하고 은거하며 지냈다. 문장도덕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문집 7권을 남겼다. 증 가선대부가 되었다.
묘소는 전남 화순군 동면 수촌 후록 간좌이다. 배위는 증 정부인 반남박씨로 참봉 시무(時武)의 딸이다. 슬하에 덕형(德亨)을 두었다.
묘소는 전남 화순군 동면 수촌 후록 간좌이다. 배위는 증 정부인 반남박씨로 참봉 시무(時武)의 딸이다. 슬하에 덕형(德亨)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