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성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79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병응(秉膺) 1844∼1910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한수(漢壽), 선성군의 12대손이며 헌종(憲宗)의 아들이다.
관직으로 훈련원 주부 · 통훈대부 거산도찰방(居山道察訪) · 중추원 의관 · 정3품 통정대부 태천군수에 이르렀다. 증손 철화(哲和)는 <기해보>(1959)와 <기미보>(1979)수보 때 선서간사 감인위원이었다.
윤화(閏和) [1862(철종 13)∼1944]
자는 순필(舜必), 호는 창남(滄南). 선성군의 15대손이고 <죽사유고(竹史遺稿)> 2책을 남긴 원류(源流)의 아들이다. 종사랑(從仕郞) 의릉참봉(懿陵參奉)이었고 <창남문집> 1책을 남겼다.
관직으로 훈련원 주부 · 통훈대부 거산도찰방(居山道察訪) · 중추원 의관 · 정3품 통정대부 태천군수에 이르렀다. 증손 철화(哲和)는 <기해보>(1959)와 <기미보>(1979)수보 때 선서간사 감인위원이었다.
윤화(閏和) [1862(철종 13)∼1944]
자는 순필(舜必), 호는 창남(滄南). 선성군의 15대손이고 <죽사유고(竹史遺稿)> 2책을 남긴 원류(源流)의 아들이다. 종사랑(從仕郞) 의릉참봉(懿陵參奉)이었고 <창남문집> 1책을 남겼다.
병정(炳鼎) 1850∼?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자중(子仲), 호는 국로(즿老)이며 선성군의 14대손이다. 명산도정 금정의 손자인 파평부령 찬(瓚)의 큰 아들 극검의 둘째 아들 세주의 10대손이다. 세주는 병자호란 때 황간 국암에 와서 은거했다.
공은 어려서 내시 집안에 양자로 갔다가 숭록대부의 벼슬에 올랐으며 영왕의 시강관에 제수되었다. 아우 건수(建秀 : 1860∼1910)의 둘째 아들 근화(根和 : 1903∼ )를 양자로 삼았고, 다시 근화는 응덕을 입후하여 지금까지 대를 잇고 있다.
공은 어려서 내시 집안에 양자로 갔다가 숭록대부의 벼슬에 올랐으며 영왕의 시강관에 제수되었다. 아우 건수(建秀 : 1860∼1910)의 둘째 아들 근화(根和 : 1903∼ )를 양자로 삼았고, 다시 근화는 응덕을 입후하여 지금까지 대를 잇고 있다.
봉환(鳳煥) 1710∼1770 파명:선성군(宣城君)
 봉환(鳳煥) [1710(숙종 36)∼1770(영조 46)]
자는 성장(聖章), 호는 우념재(雨念齋). 선성군의 9대손이고 육은당 시매의 현손이다.
1733년(영조 9) 진사에 급제, 양지현감이 되었다. 공은 장헌세자(사도세자)가 세자로 있을때 인정을 받았으며 1762년(영조 38) 이 후 벼슬을 하지 않았다. 1770년(영조 46)에 공이 “세손은 영우원(永祐園)을 참배해야 한다.”는 상소를 초하였다. 이를 공의 제자 최익남(崔益男 : 1724∼1770)이 베껴 상소했다가 임금이 국문(鞠問)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공이 의분에 겨워 “모년에 내리신 처분은 부득이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으나 세손궁(世孫宮)의 입장으로 볼 때 하늘의 이치이니 인정상으로 어찌 참배하는 정성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항의하였다. 임금은 잠시 말없이 있다가 “이미 그에게 산소를 살펴보게 할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하였다. 이 사건으로 공은 해남으로 귀양갔다가 11월에 대간의 계청(啓請)으로 다시 옥에 갇혔으며 1770년 11월 26일에 별세하였다. 3년 뒤 영조대왕은 공이 이미 세상에 없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한탄스러워 했다. 1793년(정조 17)에 정조대왕은 <우념재 문집>을 친히 수정해 주었다. 1797년(정조 21) 토지 25결을 하사하고 공의 충성을 표창하는 조처를 취할 예정이었으나 1800년(정조 24)에 정조대왕이 승하하여 시행되지 못하였다.
1809년(순조 9)에 비로소 벼슬이 복직되었다. 또 1900년(광무 4)에 융릉(隆陵)을 추존할 때 특별히 가선대부 학부협판 관직을 증직하고 1910년 자헌대부 · 규장각제학 관직을 얻음과 동시에 `충정(忠貞)\'이란 시호를 받았다. 저서로 <우념재문집(雨念齋文集)> 춘 · 하 · 추 · 동 4책이 있다. 묘소는 경기도 김포시 청수동 화전 유좌 묘향이다.
자는 성장(聖章), 호는 우념재(雨念齋). 선성군의 9대손이고 육은당 시매의 현손이다.
1733년(영조 9) 진사에 급제, 양지현감이 되었다. 공은 장헌세자(사도세자)가 세자로 있을때 인정을 받았으며 1762년(영조 38) 이 후 벼슬을 하지 않았다. 1770년(영조 46)에 공이 “세손은 영우원(永祐園)을 참배해야 한다.”는 상소를 초하였다. 이를 공의 제자 최익남(崔益男 : 1724∼1770)이 베껴 상소했다가 임금이 국문(鞠問)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공이 의분에 겨워 “모년에 내리신 처분은 부득이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으나 세손궁(世孫宮)의 입장으로 볼 때 하늘의 이치이니 인정상으로 어찌 참배하는 정성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항의하였다. 임금은 잠시 말없이 있다가 “이미 그에게 산소를 살펴보게 할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하였다. 이 사건으로 공은 해남으로 귀양갔다가 11월에 대간의 계청(啓請)으로 다시 옥에 갇혔으며 1770년 11월 26일에 별세하였다. 3년 뒤 영조대왕은 공이 이미 세상에 없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한탄스러워 했다. 1793년(정조 17)에 정조대왕은 <우념재 문집>을 친히 수정해 주었다. 1797년(정조 21) 토지 25결을 하사하고 공의 충성을 표창하는 조처를 취할 예정이었으나 1800년(정조 24)에 정조대왕이 승하하여 시행되지 못하였다.
1809년(순조 9)에 비로소 벼슬이 복직되었다. 또 1900년(광무 4)에 융릉(隆陵)을 추존할 때 특별히 가선대부 학부협판 관직을 증직하고 1910년 자헌대부 · 규장각제학 관직을 얻음과 동시에 `충정(忠貞)\'이란 시호를 받았다. 저서로 <우념재문집(雨念齋文集)> 춘 · 하 · 추 · 동 4책이 있다. 묘소는 경기도 김포시 청수동 화전 유좌 묘향이다.
사렴(師濂) 1730∼1796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성연(聖淵), 호는 용은(췈隱) 또는 뇌은옹(懶隱翁). 선성군의 10대손이고, 대구부사 준도의 6대손이다. 보만당 육의 손자, 경(툑)의 증손이다.
1762년(영조 38) 사마 양시에 실패하고 이듬해 증광시에 합격, 생원이 되었다. 1767년(영조 43) 제술에 장원하여 특명으로 전시에 직부(直赴)하여 1768년(영조 44) 무자식년시 병과에 급제했다.
통정대부가 되어 승정원 좌부승지가 되었다. 내직으로 한림 · 아장 · 종정 · 복정(僕正) · 병조참의 · 사간원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외직으로는 양산 · 안주 · 파주 · 영월 · 북청부사 등을 거쳤다. 북청부사로 있을 때 임소(任所)에서 별세했다.
신임사화(1721∼1722) 때, 실록을 기록한 사관이 반역의 속셈을 드러내어 사실을 허위로 작성하여 시비흑백을 뒤바꿔 놓았을 뿐만 아니라 영조대왕과 계비의 능인 원릉을 공박하는 구절까지 기재한 일이 있었다. 공이 상소하여 그 내용을 고치자고 청하니 이때서야 비로소 허위기재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1762년(영조 38) 사마 양시에 실패하고 이듬해 증광시에 합격, 생원이 되었다. 1767년(영조 43) 제술에 장원하여 특명으로 전시에 직부(直赴)하여 1768년(영조 44) 무자식년시 병과에 급제했다.
통정대부가 되어 승정원 좌부승지가 되었다. 내직으로 한림 · 아장 · 종정 · 복정(僕正) · 병조참의 · 사간원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외직으로는 양산 · 안주 · 파주 · 영월 · 북청부사 등을 거쳤다. 북청부사로 있을 때 임소(任所)에서 별세했다.
신임사화(1721∼1722) 때, 실록을 기록한 사관이 반역의 속셈을 드러내어 사실을 허위로 작성하여 시비흑백을 뒤바꿔 놓았을 뿐만 아니라 영조대왕과 계비의 능인 원릉을 공박하는 구절까지 기재한 일이 있었다. 공이 상소하여 그 내용을 고치자고 청하니 이때서야 비로소 허위기재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사증(師曾) 1728∼1789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노수(魯첤), 위방의 현손이다. 1752년(영조 28) 에 문과 정시 병과에 급제하고 내직으로 정언, 지평 · 이랑 · 공조참의를 지냈다. 외직으로 광양현감 · 함경도 문천군수를 역임했다.
상로(商老) 1506∼1576 파명:선성군(宣城君)
 상로(商老) [1506(중종 1)∼1576(선조 9)]
자는 덕옹(德翁), 호는 체소당(?素堂). 종의군의 현손이고 광산도정의 2남이다.
행 어모장군 충좌위 부사과, 증 가선대부 공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를 지냈다. 천성이 강직하고 효성이 지극하며 숭조(崇祖)정신이 투철하여 관직 퇴임 후 청주시 서촌동 내거부락으로 이주, 정착하였다. 또한 공은 종의군 봉사를 궐사함을 가슴 아파하고 사우를 부락에서 가까운 동산 아래 이건하였다.
매년 한식날과 음력 10월 초정일(初丁日)에 시제를 봉향하고 있으며 서울 미아동에 있는 종의군 묘소 시향은 매년 음력 10월 10일에 봉행하고 있다.
참판공은 부락 앞에 약 천평 넓이의 연못을 만들고 연못 중앙에 토대를 축조하여 토대 위에는 정자를 세웠다. 연못 주위 둑에는 5색 백화를 심었으며 연못에는 양어를 겸하여 화원에는 봉접(蜂蝶)이 난무하고, 그야말로 화조월석(花朝月夕)에 화영찬란(花影燦爛)하고 수색영롱(水色玲瓏)하니 경색수려(景色秀麗)하였다. 금상첨화로 정자에는 매일같이 공의 친구를 비롯 인근의 학자들이 모여 시를 짓고 담소하는 등 가일층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당시는 권세도 당당한지라 지나가는 행인은 물론 고을 수령도 동구 밖에서 하마(下馬)하여 통과했다 한다.
450여 년이 지난 지금 연못은 향사(享祀) 위토답으로 변하고 정자는 없어졌으며 깎이고 깎인 정대(亭垈)는 축소되고 정대 위에는 정자 대신 한 그루의 참나무가 자라고 있어 그 옛날을 흠모케 하고 있다. 그러나 이름만은 지금도 `연정답(蓮亭畓)\'이라고 불리고 있다.
공은 5남 2녀를 두었는데 자손이 번창하여 종원의 90%를 점하고 있다.
1992년 3월에 참판의 후손들이 뜻을 모아 공의 행적사실을 널리 알려 후손에게 귀감이 되고 길이 보존키 위한 공적비를 공의 묘전에 세웠다.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안동김씨(安東金氏)로서 1506년(중종 1)에 태어나 1581년(선조 14) 생을 마쳤다.
묘소는 충북 청주시 서촌동 산67-3번지에 쌍봉이다.
자는 덕옹(德翁), 호는 체소당(?素堂). 종의군의 현손이고 광산도정의 2남이다.
행 어모장군 충좌위 부사과, 증 가선대부 공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를 지냈다. 천성이 강직하고 효성이 지극하며 숭조(崇祖)정신이 투철하여 관직 퇴임 후 청주시 서촌동 내거부락으로 이주, 정착하였다. 또한 공은 종의군 봉사를 궐사함을 가슴 아파하고 사우를 부락에서 가까운 동산 아래 이건하였다.
매년 한식날과 음력 10월 초정일(初丁日)에 시제를 봉향하고 있으며 서울 미아동에 있는 종의군 묘소 시향은 매년 음력 10월 10일에 봉행하고 있다.
참판공은 부락 앞에 약 천평 넓이의 연못을 만들고 연못 중앙에 토대를 축조하여 토대 위에는 정자를 세웠다. 연못 주위 둑에는 5색 백화를 심었으며 연못에는 양어를 겸하여 화원에는 봉접(蜂蝶)이 난무하고, 그야말로 화조월석(花朝月夕)에 화영찬란(花影燦爛)하고 수색영롱(水色玲瓏)하니 경색수려(景色秀麗)하였다. 금상첨화로 정자에는 매일같이 공의 친구를 비롯 인근의 학자들이 모여 시를 짓고 담소하는 등 가일층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당시는 권세도 당당한지라 지나가는 행인은 물론 고을 수령도 동구 밖에서 하마(下馬)하여 통과했다 한다.
450여 년이 지난 지금 연못은 향사(享祀) 위토답으로 변하고 정자는 없어졌으며 깎이고 깎인 정대(亭垈)는 축소되고 정대 위에는 정자 대신 한 그루의 참나무가 자라고 있어 그 옛날을 흠모케 하고 있다. 그러나 이름만은 지금도 `연정답(蓮亭畓)\'이라고 불리고 있다.
공은 5남 2녀를 두었는데 자손이 번창하여 종원의 90%를 점하고 있다.
1992년 3월에 참판의 후손들이 뜻을 모아 공의 행적사실을 널리 알려 후손에게 귀감이 되고 길이 보존키 위한 공적비를 공의 묘전에 세웠다.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안동김씨(安東金氏)로서 1506년(중종 1)에 태어나 1581년(선조 14) 생을 마쳤다.
묘소는 충북 청주시 서촌동 산67-3번지에 쌍봉이다.
서경(犀慶) 1557∼ ? 파명:선성군(宣城君)
  공은 영상 노저 양원의 장남이다. 무과 군수를 역임하고 증 병조판서이고 전원군(全原君)으로 봉군되었으며 아들 복광(復匡)은 충청병사 증 병조판서에 완남군(完南君)으로 봉군되었다. 부자 내외분은 과천 청계산 광명동 하영에 묘소가 있으며 공의 손자 기로(?老)는 5형제 아들을 두었으나 3남 우청(宇淸)의 후손만이 번창하였다.
석원(碩遠) 1756∼1822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공미(公美), 선성군의 12대손이고 동복공 양형의 8대손이고 창중의 손자이다. 아버지 시혁(始赫)은 통덕랑이다.
1789년(정조 13) 무과에 급제하고 정평부사, 대구진영장 병마첨절제도위사, 평안도 영원(寧遠)군수를 역임했다.
1812년(순조 12)에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여 그 능력을 인정받아 통정대부 영원군수로 나가 임기를 다한 후에 1년을 더 있었다. 임지에 있을 때 계속 풍년이 드는 등 백성들의 신임이 두터웠으나 공은 겸손하였다.
공은 효행이 남다르고 동기간 우애도 깊었다. 어머니의 병환이 깊었을 때는 12년 동안 사리에 어긋남이 없이 행동을 하여 몸을 보하고 약이 되는 식품을 올리고 병환의 차도를 알기 위해 상분(嘗糞)을 하며 단지수혈도 하였다.
1789년(정조 13) 무과에 급제하고 정평부사, 대구진영장 병마첨절제도위사, 평안도 영원(寧遠)군수를 역임했다.
1812년(순조 12)에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여 그 능력을 인정받아 통정대부 영원군수로 나가 임기를 다한 후에 1년을 더 있었다. 임지에 있을 때 계속 풍년이 드는 등 백성들의 신임이 두터웠으나 공은 겸손하였다.
공은 효행이 남다르고 동기간 우애도 깊었다. 어머니의 병환이 깊었을 때는 12년 동안 사리에 어긋남이 없이 행동을 하여 몸을 보하고 약이 되는 식품을 올리고 병환의 차도를 알기 위해 상분(嘗糞)을 하며 단지수혈도 하였다.
석진(奭鎭) 1874∼1963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공선(公善), 호는 백초(白樵). 선성군의 13대손이며 주완(周琬)의 아들이다. <기해보>(1959) 문장이었고 시작(詩作)에 능했다. 많은 시작이 전해졌으나 6 · 25전쟁 때 산일되고 남은 290여 수를 <백초선생문집(白樵先生文集)>으로 엮어 손자 익화(益和)가 소장하고 있다.
석효(錫孝) 1797∼1870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문원(文源), 호는 산곡(山谷)이다. 이천상공 홍주의 8대손이며 지백(知白)의 12대손 언휴(彦休 : 1736∼1816)의 손자이며 관수(寬秀 : 1769∼1839)의 아들이다. 공의 아들로는 원흥(源興 : 1818∼1884)과 원만(源萬 : 1822∼1892)이 있다.
저서로는 <산곡문집(山谷文集)> 2권이 있다.
저서로는 <산곡문집(山谷文集)> 2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