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공파 현조약기에는 총 23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춘성(春成) 1923∼1984 파명:시중공(侍中公)
 양후공의 20세손이며 초등학교장 덕근(德根)의 아들이다. 전주출신이며 1941년 전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경상대학과 미국 미네소타대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전주고등학교 교사 · 전주공보원장 · 전주방송국장 · 문화공보부차관 · 전라북도지사 · 주시에라리온 대사 · 주뉴질랜드 대사 등을 역임하였다. 예술에 조예가 깊어 문화공보부 차관 재직시에는 전통문화 보존에 힘쓰고 전통 예술을 현대에 조화시켜 창조적으로 개발시켰다. 또한 전북도지사 재직시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창도한 새마을 운동에 앞장서서 통일벼로 녹색혁명을 일으켜 농촌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또 전주교도소를 노송동에서 평화동으로 옮겼으며 주거환경의 아파트시대를 열었으며 진안(鎭安) 인삼조합 건립, 팔봉(八峰) 골프장 개설, 전북 언론3사 통합, 전북도와 이리공단(裡里工團)의 재정확립 등 업적이 지대하였으나 당시 김현옥(金玄玉) 내무부장관이 자주 쓰던 `목민관(牧民官)\'이란 말을 비판한 일이 잘못되어 전북지사를 사임하게 되었다고 한다. 리지사는 권모술수를 모르고 온화한 성품에 미남형으로 사람을 대하는 데에 친화력이 있었다.
현상(鉉相) 1905∼1953 파명:시중공(侍中公)
 문헌공의 20세손이며 면장 면배(勉培)의 아들로 충남 금산 출신이다. 4백섬지기 부농이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덕망가로 가난한 이웃에게 베푼 혜택이 많아 대전의 충절로에 송덕비가 있다. 고창고보에서 서울 중앙고보에 전학하여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하였다. 1925년 박헌영 · 김삼룡 등과 조선 공산당 결성에 참여하였으며 1928년 박헌영을 정점으로 경성컴뮤니스트클럽을 결성하여 컴크럽의 핵심멤버가 되었으며 2차대전 말기엔 출옥 후 덕유산에 피신하였다가 광복 후 1945년 8월에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에 참여하여 박헌영 · 김삼룡 등과 조직위원이 되고 후에 남로당으로 개편 후 연락부장 · 간부부장이 되었다. 1948년 11월에 지리산에 들어간 후 빨치산 활동을 시작하여 남조선인민유격대를 창설하여 지리산지구인민유격대 제2병단사령관 · 남조선인민유격대독립4지대장 통칭 남반부유격대사령관 · 조선인민군유격대 남부군사령관이 되었으며 1951년 1월에 조선인민군유격대남부군으로 개칭되고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이해 5월 송치골 회의에서 남한 빨치산의 공식적인 총사령관이 되고 6개도당(전라남북도 · 충청남북도 · 경상남북도)의 유격대가 그 휘하의 남부군의 지휘하에 들어갔다. 1952년 9월에는 5지구당 위원장을 겸하여 지리산에서 치열한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1953년 9월 18일 지리산 빗점골에서 전사하였다.
1948년 2 · 7투쟁 직후 북에 있던 박헌영의 주선으로 소련 모스크바 고급학교 유학차 평양에 들른 그는 남로당 간부부장으로 북로당 간부부장인 이상조(후에 정전협정 북측대표 및 북조선 주 모스크바대사 역임)의 초대 환영연회에서 “그대들이 말하는 김일성은 조선의 국토와 인민으로부터 떨어져 외국에서 성장했고 외국 공산당에 입당해서 그들의 지시를 받으며 그들의 이익을 위해 투쟁해 왔다. 그러나 박헌영은 김일성보다 15년이나 일찍부터 국내에서 인민들과 투쟁했다. 박헌영은 25년이나 조선공산당과 공산청년동맹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었고 혹독한 일제의 탄압속에서도 끝내 국내에서 투쟁해왔다. 그의 경력에는 한점도 흐린점이 없다. 김일성은 내가 알기로는 본명이 김성주라는 사람인데 언제부터 왜 김일성이 됐는지 분명치 않고 그의 투쟁 경력도 확실치 않은 데가 많다. 어떻게 박헌영을 제쳐놓고 광복 후 갑자기 외국에서 나타난 정체 불명의 청년을 최고 지도자로 인정하겠는가.” 하고 그는 공산주의자로서는 처음으로 김일성을 비판하고 지도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이상조가 김일성을 지지하며 반론을 펴자 그는 술상을 뒤엎고 퇴장하였다. 후에 이 말이 김일성에게 전해져 소련 유학을 취소 당하자 강동학원에서 3개월의 군사교육을 받은 후 서울로 돌아와 지리산에 들어갔다. 그는 이 사건 후 무자비한 스탈린식 독재를 지향하는 김일성 일파와의 타협과 그들 체제하에서의 등용을 완강히 거부하여 다시는 월북을 하지 않고 빨치산에 투신하여 최후를 마쳤다. 당시 스탈린의 점령지배정책은 민족주의의 색채를 띤 토착 좌익세력을 쓸어내고 소련에서 배양한 스탈린의 충복들을 앉히는 것으로 한반도도 예외일 수 없어 국내파 토착 공산주의자인 박헌영 일파가 숙청되고 몰락하자 그도 피할 수 없는 비극의 말년을 마쳤다 할 것이다. <남부군>의 저자 리태씨는 그를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고독한 인물이요 고독한 영웅이라.” 하였으며 그와 교분이 두터웠다고 알려진 송시백씨(당시 전북노동신문 주필)는 “리현상만큼 어려서부터 지하활동 · 서클활동 · 빨치산 활동을 줄기차게 해온 사람은 세계 혁명운동사상 그 예가 드물다. 남미의 체 게바라에 비견된다고 할까.”라고 평하였다고 한다. 그는 사회활동을 할 수 있었던 중학교에 진학한 18세부터 최후를 맞이한 48세까지의 30년 동안 12년 6개월을 옥중에서 보냈으며 6·25전쟁 전후 8년 여를 산중에서 보내고 나머지 9년이 학생시절과 사회지하운동 기간이었다. 그는 일제하에서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사상가로서 토착공산주의자(사회개혁주의자)가 되었으며 후에 빨치산 사령관(남부군 사령관)으로 48세에 생을 마쳤다. 그가 최후로 남긴 일기 수첩에는 한시 몇 수가 적혀 있었는데 그중에 다음과 같은 한시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智異風雲嘗鴻動, 伏劒千里南走越. 一念何時非祖國, 胸有萬甲心有血(지리산에 풍운이 일고 바야흐로 기러기떼가 움직이네, 검을 품고 남쪽으로 천리길을 달려왔네. 뜻은 한시도 조국을 걱정하지 아니한 적 없고, 가슴에 강철의 갑옷과 마음속엔 끓는 피가 솟구치네.)”
1948년 2 · 7투쟁 직후 북에 있던 박헌영의 주선으로 소련 모스크바 고급학교 유학차 평양에 들른 그는 남로당 간부부장으로 북로당 간부부장인 이상조(후에 정전협정 북측대표 및 북조선 주 모스크바대사 역임)의 초대 환영연회에서 “그대들이 말하는 김일성은 조선의 국토와 인민으로부터 떨어져 외국에서 성장했고 외국 공산당에 입당해서 그들의 지시를 받으며 그들의 이익을 위해 투쟁해 왔다. 그러나 박헌영은 김일성보다 15년이나 일찍부터 국내에서 인민들과 투쟁했다. 박헌영은 25년이나 조선공산당과 공산청년동맹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었고 혹독한 일제의 탄압속에서도 끝내 국내에서 투쟁해왔다. 그의 경력에는 한점도 흐린점이 없다. 김일성은 내가 알기로는 본명이 김성주라는 사람인데 언제부터 왜 김일성이 됐는지 분명치 않고 그의 투쟁 경력도 확실치 않은 데가 많다. 어떻게 박헌영을 제쳐놓고 광복 후 갑자기 외국에서 나타난 정체 불명의 청년을 최고 지도자로 인정하겠는가.” 하고 그는 공산주의자로서는 처음으로 김일성을 비판하고 지도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이상조가 김일성을 지지하며 반론을 펴자 그는 술상을 뒤엎고 퇴장하였다. 후에 이 말이 김일성에게 전해져 소련 유학을 취소 당하자 강동학원에서 3개월의 군사교육을 받은 후 서울로 돌아와 지리산에 들어갔다. 그는 이 사건 후 무자비한 스탈린식 독재를 지향하는 김일성 일파와의 타협과 그들 체제하에서의 등용을 완강히 거부하여 다시는 월북을 하지 않고 빨치산에 투신하여 최후를 마쳤다. 당시 스탈린의 점령지배정책은 민족주의의 색채를 띤 토착 좌익세력을 쓸어내고 소련에서 배양한 스탈린의 충복들을 앉히는 것으로 한반도도 예외일 수 없어 국내파 토착 공산주의자인 박헌영 일파가 숙청되고 몰락하자 그도 피할 수 없는 비극의 말년을 마쳤다 할 것이다. <남부군>의 저자 리태씨는 그를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고독한 인물이요 고독한 영웅이라.” 하였으며 그와 교분이 두터웠다고 알려진 송시백씨(당시 전북노동신문 주필)는 “리현상만큼 어려서부터 지하활동 · 서클활동 · 빨치산 활동을 줄기차게 해온 사람은 세계 혁명운동사상 그 예가 드물다. 남미의 체 게바라에 비견된다고 할까.”라고 평하였다고 한다. 그는 사회활동을 할 수 있었던 중학교에 진학한 18세부터 최후를 맞이한 48세까지의 30년 동안 12년 6개월을 옥중에서 보냈으며 6·25전쟁 전후 8년 여를 산중에서 보내고 나머지 9년이 학생시절과 사회지하운동 기간이었다. 그는 일제하에서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사상가로서 토착공산주의자(사회개혁주의자)가 되었으며 후에 빨치산 사령관(남부군 사령관)으로 48세에 생을 마쳤다. 그가 최후로 남긴 일기 수첩에는 한시 몇 수가 적혀 있었는데 그중에 다음과 같은 한시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智異風雲嘗鴻動, 伏劒千里南走越. 一念何時非祖國, 胸有萬甲心有血(지리산에 풍운이 일고 바야흐로 기러기떼가 움직이네, 검을 품고 남쪽으로 천리길을 달려왔네. 뜻은 한시도 조국을 걱정하지 아니한 적 없고, 가슴에 강철의 갑옷과 마음속엔 끓는 피가 솟구치네.)”
희문(希文) 1510∼1582 파명:시중공(侍中公)
 자는 망지(望之), 호는 송헌(松軒). 문헌공 자을의 잉손(仍孫)이며 예조참의 우량(遇良)의 아들이고 증 좌찬성 희안(希顔)의 동생이다. 1528년(중종 23) 진사가 되고 음으로 곡성현감이 되고, 고양군수를 거쳐 양양도호부사로 승진하고, 1564년(명종 19)에 통정대부 원주목사를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