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명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32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민승(敏承) 1841∼1912 파명:경명군(景明君)
  자는 공납(公納), 호는 현계(玄溪). 경명군의 12대손이며 종준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정부인 순흥안씨이고 목사(牧使)를 지낸 성연(性淵)의 딸이다.
1841년(헌종 7) 11월 23일에 태어나 1858년 권무과(勸武科)에 합격하여 1860년 비변량을 시작으로, 1882년 광양현감 · 이원부사 · 전라좌수사 · 경상좌병사 · 가의대부 · 의금부지사 · 한성부판윤 · 궁내부특진관 · 의정부찬성 · 정헌대부를 지냈다. 1912년 10월 30일 별세하니 향년 72세였다. 묘소는 양주 미금면 일비리에 있다.
배위 정부인 청주한씨는 부사를 지내고 병판(兵判)에 추증된 승렬(承烈)의 딸로 1838년(헌종 4) 11월 11일 태어났고 기일은 8월 22일이다. 묘소는 부좌(府左)이다.
1841년(헌종 7) 11월 23일에 태어나 1858년 권무과(勸武科)에 합격하여 1860년 비변량을 시작으로, 1882년 광양현감 · 이원부사 · 전라좌수사 · 경상좌병사 · 가의대부 · 의금부지사 · 한성부판윤 · 궁내부특진관 · 의정부찬성 · 정헌대부를 지냈다. 1912년 10월 30일 별세하니 향년 72세였다. 묘소는 양주 미금면 일비리에 있다.
배위 정부인 청주한씨는 부사를 지내고 병판(兵判)에 추증된 승렬(承烈)의 딸로 1838년(헌종 4) 11월 11일 태어났고 기일은 8월 22일이다. 묘소는 부좌(府左)이다.
복연(復淵) 1688∼1732 파명:경명군(景明君)
  자는 예중(禮仲), 경명군의 7대손이며 단석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청송심씨로 참봉 지영의 딸이다.
1688년(숙종 14) 5월 3일에 서울의 남소동(南小洞) 집에서 태어났다. 이 때 부친은 병중이라 유모를 시켜 안고 오게하고 “참으로 재상감인데 내가 오래 살지 못하여 성장하는 것을 보지 못할 것이 한이구나.”고 하였다. 다음날 부친이 별세하고 집이 매우 가난한데다 흉년까지 겹쳐 모친은 콩죽도 제대로 먹지 못해 공은 늘 앓고 있었다.
1713년(숙종 39)에 무과(武科)에 합격하였고, 1717년(숙종 43) 울진현감에 임명되어 어머니를 모시고 부임하였다. 곧이어 훈련원정에 임명되고 통정대부에 오르고 내금위(內禁衛) 장(將) 겸 내사복의 내승에 임명되었다.
1721년(경종 1) 겨울에 모친이 별세하였으며 1725년(영조 1)에 삼화부사에 임명되었고 승지를 거쳐 충청도 병사에 임명되었다. 병영을 영호남 요새지로써 훌륭하게 관리하였다. 암행어사가 청렴한 공직자의 아들로 가문의 명예를 지켰다하여 표창을 상신하였는데, 임금은 “이름난 아버지의 아들이 바로 이 사람이구나.”하고, 가선대부에 올리고 어영장(御營將) 중군(中軍) 용호영(龍虎營) 대장(大將) 겸 훈련원 도정(都正)에 임명하고 또 삼도통제사에 임명하였다.
1727년(영조 3) 호남 구례현 직전동은 통영에 소속되어 참나무를 길러서 군함재료로 쓰려고 했는데 중앙정부에서 이 땅을 차지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공은 “해상방어의 중요한 임무는 오로지 해군에만 의지하고 있는데 직전동이 아니면 배 재목은 나올 곳이 없습니다.”고 네 차례나 상소하였다. 임금은 결국 그 요청을 받아들이니 공의 나라 위하는 정성은 여기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하여 암행어사의 상소가 있었고 결국 무주로 귀양가게 되자, 공은 “나의 죄는 배후에서 조종하는 데 빠진 것이다. 모함을 당하여 첫번째로 귀양가는 것이니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느냐. 다만 내 아버님의 아들로서 이 누명을 쓰는 것이 아버님의 청렴하셨던 인격에 부끄러울 뿐이며 통제사로 있기 3년에 관청에서 소비한 것이 이렇게 적은 것도 역시 후세에 말이 있을 것이다. 이곳이 비록 세상과 멀리 떨어졌으나 산수가 아름답고 아늑하여 세상을 끊고 오래 살기에 맞는다.”라고 하였다.
1732년(영조 8) 4월 19일 병을 얻어 별세하니 향년 45세였다. 공이 별세한 소식이 전해지자 임금은 “나의 젊은 무신이 가석하다.”하고 복직을 명령하였으며 양주 문곡에 장례하니 묘적산 모친 산소가 있는 곳에서 5리 떨어진 가까운 곳이다.
이상의 기록은 이조판서 류최기(柳最基)가 찬한 행장(行狀)에 기초한 것이다.
배위 경주최씨는 장령 형한(亨漢)의 6대손 도사(都事) 운익(雲翼)의 딸로 머리카락을 자르고 옷을 팔아 지성으로 시모를 봉양하였으니, 공의 형제가 의지하며 즐겁게 지낸 것은 내조의 공이라 할 수 있다. 공보다 9년 후에 별세했고 묘소를 무주 거산리 동북향에서 서남향으로 장례하였으니 공의 뜻을 따른 것이다.
1688년(숙종 14) 5월 3일에 서울의 남소동(南小洞) 집에서 태어났다. 이 때 부친은 병중이라 유모를 시켜 안고 오게하고 “참으로 재상감인데 내가 오래 살지 못하여 성장하는 것을 보지 못할 것이 한이구나.”고 하였다. 다음날 부친이 별세하고 집이 매우 가난한데다 흉년까지 겹쳐 모친은 콩죽도 제대로 먹지 못해 공은 늘 앓고 있었다.
1713년(숙종 39)에 무과(武科)에 합격하였고, 1717년(숙종 43) 울진현감에 임명되어 어머니를 모시고 부임하였다. 곧이어 훈련원정에 임명되고 통정대부에 오르고 내금위(內禁衛) 장(將) 겸 내사복의 내승에 임명되었다.
1721년(경종 1) 겨울에 모친이 별세하였으며 1725년(영조 1)에 삼화부사에 임명되었고 승지를 거쳐 충청도 병사에 임명되었다. 병영을 영호남 요새지로써 훌륭하게 관리하였다. 암행어사가 청렴한 공직자의 아들로 가문의 명예를 지켰다하여 표창을 상신하였는데, 임금은 “이름난 아버지의 아들이 바로 이 사람이구나.”하고, 가선대부에 올리고 어영장(御營將) 중군(中軍) 용호영(龍虎營) 대장(大將) 겸 훈련원 도정(都正)에 임명하고 또 삼도통제사에 임명하였다.
1727년(영조 3) 호남 구례현 직전동은 통영에 소속되어 참나무를 길러서 군함재료로 쓰려고 했는데 중앙정부에서 이 땅을 차지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공은 “해상방어의 중요한 임무는 오로지 해군에만 의지하고 있는데 직전동이 아니면 배 재목은 나올 곳이 없습니다.”고 네 차례나 상소하였다. 임금은 결국 그 요청을 받아들이니 공의 나라 위하는 정성은 여기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하여 암행어사의 상소가 있었고 결국 무주로 귀양가게 되자, 공은 “나의 죄는 배후에서 조종하는 데 빠진 것이다. 모함을 당하여 첫번째로 귀양가는 것이니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느냐. 다만 내 아버님의 아들로서 이 누명을 쓰는 것이 아버님의 청렴하셨던 인격에 부끄러울 뿐이며 통제사로 있기 3년에 관청에서 소비한 것이 이렇게 적은 것도 역시 후세에 말이 있을 것이다. 이곳이 비록 세상과 멀리 떨어졌으나 산수가 아름답고 아늑하여 세상을 끊고 오래 살기에 맞는다.”라고 하였다.
1732년(영조 8) 4월 19일 병을 얻어 별세하니 향년 45세였다. 공이 별세한 소식이 전해지자 임금은 “나의 젊은 무신이 가석하다.”하고 복직을 명령하였으며 양주 문곡에 장례하니 묘적산 모친 산소가 있는 곳에서 5리 떨어진 가까운 곳이다.
이상의 기록은 이조판서 류최기(柳最基)가 찬한 행장(行狀)에 기초한 것이다.
배위 경주최씨는 장령 형한(亨漢)의 6대손 도사(都事) 운익(雲翼)의 딸로 머리카락을 자르고 옷을 팔아 지성으로 시모를 봉양하였으니, 공의 형제가 의지하며 즐겁게 지낸 것은 내조의 공이라 할 수 있다. 공보다 9년 후에 별세했고 묘소를 무주 거산리 동북향에서 서남향으로 장례하였으니 공의 뜻을 따른 것이다.
식(是) 1808∼? 파명:경명군(景明君)
  자는 배여(倍汝), 경명군의 10대손이며 호참(戶參)을 추증받은 지국(持國)의 아들이다.
1808년(순조 8) 12월 15일에 태어났고 가선대부 겸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기일은 11월 5일이고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성덕리 길마현(吉馬峴)에 있다.
배위 정부인 광산김씨는 기(琦)의 딸로 1807년(순조 7) 7월 18일에 태어났고 기일은 11월 24일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송학리 학곡의 선영에 있다.
1808년(순조 8) 12월 15일에 태어났고 가선대부 겸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기일은 11월 5일이고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성덕리 길마현(吉馬峴)에 있다.
배위 정부인 광산김씨는 기(琦)의 딸로 1807년(순조 7) 7월 18일에 태어났고 기일은 11월 24일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송학리 학곡의 선영에 있다.
엽(曄) 1602∼1648 파명:경명군(景明君)
 자는 일화(日華), 호는 월곡(月谷). 경명군의 4대손이며 금계정 대린(大麟)의 외아들이다. 어머니는 신부인(愼夫人) 평산신씨로 군수 홍서(弘緖)의 딸이다.
1602년(선조 35) 7월 25일에 서울 경명군 옛집에서 태어났다. 본성이 순후하고 어려서부터 성숙한 기품이 있었으며 10세에 처음으로 구원(九횁) 이춘원(李春元)의 문하(門下)에서 수업하였는데 재능이 매우 탁월하였다.
자라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선생의 문하에서 유학하여 학문에 전념하니, 밤낮으로 부지런히 힘쓰는 것이 모두 실천궁행함으로써 하늘의 이치를 통달하는 길이라 여기고 그 밖의 시문 역시 널리 닦았으며 과거보는 공부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사계선생이 과거보기를 권하여, 지방의 초시와 중앙의 회시에 응시하였으나 1633년(인조 11)에 소과(小科)에 합격하고는 더 이상 과거볼 생각이 없이 더욱 이치를 연구하고 공부에 힘써, 사물(事物)의 당연한 이치에서부터 본체(本體 : 理)와 현상(現象 : 氣)의 나뉘고 합치는 것과 음양의 변화유통하는 오묘함에 이르기까지 근본을 탐구하고 요점을 종합하여 혹은 책으로 저술하고 혹은 시로 읊었다.
사계선생도 늘 현대의 황숙도(黃淑度)라 일컬었고 당시의 명현으로 김상헌(金常憲),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도 다 재능이 높다고 칭찬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다음 해 삼전도(三田渡 : 서울 송파구)에서 조선이 항복하자 세상을 등지고 부풍(扶風) 변산(邊山)에 자리잡고 경전(經傳)연구에 몰두하며 가끔 시와 술로 여가를 즐기고 자식과 세상 둘 다 잊어버린 채 항상 남쪽의 선비들을 모아 가르치기에 학문을 크게 이룬 이가 매우 많았다.
공은 벼슬에 나아가지 않을 뜻을 굳게 지켜 특명으로 찰방(察訪)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또 대군(大君)의 사부(師傅)로 임명되어서도 역시 취임하지 않으니 세상사람들이 그 기상과 지조를 높이 칭찬하였다.
인조대왕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리엽이 시골에 있는데 관직에 나오도록 권할 수 있겠는가?”하니, 병으로 칩거하여 움직이기 어렵다고 대답하자 특별히 어의를 보내어 병을 진찰하게 하고 임금의 옷을 하사하였다. 또 호남으로 가는 암행어사가 출발인사를 드리자 임금은 “리엽의 뛰어난 행위와 높은 도의는 내가 참으로 가상히 여겨 여러번 불러도 응하지 않으니 나는 항상 잊지 못하는 바 그대가 찾아가서 나의 뜻을 전하오.”라고 하였으니, 그의 인격과 덕망을 임금이 항상 생각하며 잊지 않았다.
공은 1648년(인조 26) 9월 30일에 부풍별장에서 병환으로 별세하니 향년 47세였다. 교유했던 명사들을 비롯해 애석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제자들 가운데서 마음으로 3년상을 치른 이가 수십 명이었다.
배위 전주최씨는 성원(性源)의 딸로 온유 정숙하고 가훈(家訓)을 지극히 받들다가 공보다 5년뒤에 별세하니 1652년(효종 3) 12월 13일이다. 묘소는 공과 합장으로 공주군청 소재지 북쪽 반룡동(盤龍洞) 동남향이다.
공은 인품이 맑고 도량이 깊고 넓으며, 경전에 널리 통달하여 그 뜻과 이치를 환히 밝히고, 지조 또한 쇠와 돌도 당할 수 없었으니 그 학문은 성실과 공경이 둘다 갖추어 시남(市南) 유(兪)가 찬한 제문에 `선생의 천품은 순수하고 밝으셨으며 선생의 도량은 깊고 넓으시었고, 선생의 학문은 삼가고 성실하였으며, 선생의 지조는 확고하고 곧으시었다.\'하였으니 참으로 바른 평론이었다.(이상의 기록은 공의 사비(賜碑)에 적힌, 영의정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이 찬(撰)한 비문에 기초한 것이다.)
1602년(선조 35) 7월 25일에 서울 경명군 옛집에서 태어났다. 본성이 순후하고 어려서부터 성숙한 기품이 있었으며 10세에 처음으로 구원(九횁) 이춘원(李春元)의 문하(門下)에서 수업하였는데 재능이 매우 탁월하였다.
자라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선생의 문하에서 유학하여 학문에 전념하니, 밤낮으로 부지런히 힘쓰는 것이 모두 실천궁행함으로써 하늘의 이치를 통달하는 길이라 여기고 그 밖의 시문 역시 널리 닦았으며 과거보는 공부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사계선생이 과거보기를 권하여, 지방의 초시와 중앙의 회시에 응시하였으나 1633년(인조 11)에 소과(小科)에 합격하고는 더 이상 과거볼 생각이 없이 더욱 이치를 연구하고 공부에 힘써, 사물(事物)의 당연한 이치에서부터 본체(本體 : 理)와 현상(現象 : 氣)의 나뉘고 합치는 것과 음양의 변화유통하는 오묘함에 이르기까지 근본을 탐구하고 요점을 종합하여 혹은 책으로 저술하고 혹은 시로 읊었다.
사계선생도 늘 현대의 황숙도(黃淑度)라 일컬었고 당시의 명현으로 김상헌(金常憲),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도 다 재능이 높다고 칭찬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다음 해 삼전도(三田渡 : 서울 송파구)에서 조선이 항복하자 세상을 등지고 부풍(扶風) 변산(邊山)에 자리잡고 경전(經傳)연구에 몰두하며 가끔 시와 술로 여가를 즐기고 자식과 세상 둘 다 잊어버린 채 항상 남쪽의 선비들을 모아 가르치기에 학문을 크게 이룬 이가 매우 많았다.
공은 벼슬에 나아가지 않을 뜻을 굳게 지켜 특명으로 찰방(察訪)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또 대군(大君)의 사부(師傅)로 임명되어서도 역시 취임하지 않으니 세상사람들이 그 기상과 지조를 높이 칭찬하였다.
인조대왕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리엽이 시골에 있는데 관직에 나오도록 권할 수 있겠는가?”하니, 병으로 칩거하여 움직이기 어렵다고 대답하자 특별히 어의를 보내어 병을 진찰하게 하고 임금의 옷을 하사하였다. 또 호남으로 가는 암행어사가 출발인사를 드리자 임금은 “리엽의 뛰어난 행위와 높은 도의는 내가 참으로 가상히 여겨 여러번 불러도 응하지 않으니 나는 항상 잊지 못하는 바 그대가 찾아가서 나의 뜻을 전하오.”라고 하였으니, 그의 인격과 덕망을 임금이 항상 생각하며 잊지 않았다.
공은 1648년(인조 26) 9월 30일에 부풍별장에서 병환으로 별세하니 향년 47세였다. 교유했던 명사들을 비롯해 애석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제자들 가운데서 마음으로 3년상을 치른 이가 수십 명이었다.
배위 전주최씨는 성원(性源)의 딸로 온유 정숙하고 가훈(家訓)을 지극히 받들다가 공보다 5년뒤에 별세하니 1652년(효종 3) 12월 13일이다. 묘소는 공과 합장으로 공주군청 소재지 북쪽 반룡동(盤龍洞) 동남향이다.
공은 인품이 맑고 도량이 깊고 넓으며, 경전에 널리 통달하여 그 뜻과 이치를 환히 밝히고, 지조 또한 쇠와 돌도 당할 수 없었으니 그 학문은 성실과 공경이 둘다 갖추어 시남(市南) 유(兪)가 찬한 제문에 `선생의 천품은 순수하고 밝으셨으며 선생의 도량은 깊고 넓으시었고, 선생의 학문은 삼가고 성실하였으며, 선생의 지조는 확고하고 곧으시었다.\'하였으니 참으로 바른 평론이었다.(이상의 기록은 공의 사비(賜碑)에 적힌, 영의정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이 찬(撰)한 비문에 기초한 것이다.)
오(晤) ? ∼ ? 파명:경명군(景明君)
 경명군의 4대손이며 운계군(雲溪君)의 3남이다. 어머니는 신부인 창녕성씨이고 군수를 지낸 영우(永遇)의 딸이다.
8월 24일에 태어났으며 어모장군 훈련원의 첨정(僉正)을 지냈고 통정대부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 기일은 12월 10일이며,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송학리 학곡에 있다. 배위는 숙부인 영산신씨이며 생일은 6월 25일이고 기일은 5월 15일이다. 묘소는 남편 오(晤)와 같다.
생인(生寅) [1586(선조 19)∼1616(광해군 8)]
자는 진경(震卿), 호는 송파(松坡). 경명군의 4대손이며 창원정의 외아들이다. 어머니는 신부인 창녕성씨로 참판(參判)을 지내고 찬성과 창산군으로 추증되고 호가 칠봉(七峰)인 수익(壽益)의 딸이다.
1586년(선조 19) 3월 10일에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고생하면서 글을 익혀 오산(五山) 차천로에게 배워 1606년(선조 39)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천품이 맑고 깨끗하며 성실하고 착하여 세속을 벗어난 기상이 있었고 시(詩)에 능하면서 사육병체(四六騈體)에 뛰어났다.
이때 이위경(李偉卿)이 권력을 잡고 당파를 만들어 인목대비를 폐위하기를 상소하고 한편으로는 공을 귀양보낼 것을 간하자 공은 그날부터 이경증(李景曾) · 최유연(崔有淵) 등 여러 인사들과 서호(西湖)에 배를 띄우고 술로서 나날을 보냈으며 공은 이 때문에 통분을 느껴 그만 1616년(광해군 8) 여름에 술병으로 일어나지 못하고 향년 31세로 별세했으며 양주(지금의 의정부) 송산 동북장에서 남향에 장례하였다. 배위 상주김씨는 좌의정 귀영(貴榮)의 딸이다.
이조참판 이민구가 지은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훌륭한 인재 내고 그 길을 막았으니, 하늘의 뜻 있는가 없는가. 자손의 훌륭함과 아름다움이 이어지고 학문과 덕망이 집안 가득할지니, 틀림없는 뛰어난 인물이라.\'
8월 24일에 태어났으며 어모장군 훈련원의 첨정(僉正)을 지냈고 통정대부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 기일은 12월 10일이며,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송학리 학곡에 있다. 배위는 숙부인 영산신씨이며 생일은 6월 25일이고 기일은 5월 15일이다. 묘소는 남편 오(晤)와 같다.
생인(生寅) [1586(선조 19)∼1616(광해군 8)]
자는 진경(震卿), 호는 송파(松坡). 경명군의 4대손이며 창원정의 외아들이다. 어머니는 신부인 창녕성씨로 참판(參判)을 지내고 찬성과 창산군으로 추증되고 호가 칠봉(七峰)인 수익(壽益)의 딸이다.
1586년(선조 19) 3월 10일에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고생하면서 글을 익혀 오산(五山) 차천로에게 배워 1606년(선조 39)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천품이 맑고 깨끗하며 성실하고 착하여 세속을 벗어난 기상이 있었고 시(詩)에 능하면서 사육병체(四六騈體)에 뛰어났다.
이때 이위경(李偉卿)이 권력을 잡고 당파를 만들어 인목대비를 폐위하기를 상소하고 한편으로는 공을 귀양보낼 것을 간하자 공은 그날부터 이경증(李景曾) · 최유연(崔有淵) 등 여러 인사들과 서호(西湖)에 배를 띄우고 술로서 나날을 보냈으며 공은 이 때문에 통분을 느껴 그만 1616년(광해군 8) 여름에 술병으로 일어나지 못하고 향년 31세로 별세했으며 양주(지금의 의정부) 송산 동북장에서 남향에 장례하였다. 배위 상주김씨는 좌의정 귀영(貴榮)의 딸이다.
이조참판 이민구가 지은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훌륭한 인재 내고 그 길을 막았으니, 하늘의 뜻 있는가 없는가. 자손의 훌륭함과 아름다움이 이어지고 학문과 덕망이 집안 가득할지니, 틀림없는 뛰어난 인물이라.\'
원재(元在) 1778∼1857 파명:경명군(景明君)
  자는 경인(景仁), 호는 현곡(玄谷). 경명군의 10대손이며 종혁(宗爀)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숙부인 대구서씨로서 군수를 지낸 유용(有容)의 딸이다.
1778년(정조 2) 12월 7일에 태어났으며 현감을 거쳐 1848년(현종 13)에는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았고 중추부 첨지사, 오위부 장, 조사 위장을 역임하였으며 1857년(철종 8)에 가선대부의 품계를 받고 중추부 동지사로서 조관(朝官)이 되었다. 이 해 5월 26일 별세하니 향년 80세였다.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신곡동 효자봉 선영에 있다. 1868년(고종 5)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배위 정부인 밀양박씨는 돈양(敦養)의 딸로 1775년(영조 51) 5월 26일 태어났고 1854년(철종 5) 1월 14일에 별세했다. 묘소는 암장동(巖壯洞)에 있다.
1778년(정조 2) 12월 7일에 태어났으며 현감을 거쳐 1848년(현종 13)에는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았고 중추부 첨지사, 오위부 장, 조사 위장을 역임하였으며 1857년(철종 8)에 가선대부의 품계를 받고 중추부 동지사로서 조관(朝官)이 되었다. 이 해 5월 26일 별세하니 향년 80세였다.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신곡동 효자봉 선영에 있다. 1868년(고종 5)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배위 정부인 밀양박씨는 돈양(敦養)의 딸로 1775년(영조 51) 5월 26일 태어났고 1854년(철종 5) 1월 14일에 별세했다. 묘소는 암장동(巖壯洞)에 있다.
유담(有澹) ? ∼ ? 파명:경명군(景明君)
 경명군의 5대손이며 구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영산신씨로 성업(成業)의 딸이다.
상장원(常掌院) 판사(判事)를 지냈으며 생일은 3월 27일이고, 기일은 2월 25일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송학리 학곡에 있다. 배위는 숙부인 원주이씨이며 송수(松壽)의 딸이다. 기일은 2월 26일이고, 묘소는 합폄이다.
상장원(常掌院) 판사(判事)를 지냈으며 생일은 3월 27일이고, 기일은 2월 25일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송학리 학곡에 있다. 배위는 숙부인 원주이씨이며 송수(松壽)의 딸이다. 기일은 2월 26일이고, 묘소는 합폄이다.
유석(有錫) 1650∼1706 파명:경명군(景明君)
  자는 계오(季吾), 호는 창암(蒼岩). 경명군의 6대손이고 제형의 5남이다.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창녕성씨로서 참봉을 지내고 참의(參議)로 추증된 대수(大受)의 딸이다.
1650년(효종 1) 3월 25일에 태어났고 1683년(숙종 9) 초시에 등과하여 진사를 시작으로 동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통정대부 ·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1706년(숙종 32) 2월 25일에 별세하였고 묘소는 경기도 김포시 월곳면 고양봉 서쪽 기슭이다.
배위 숙부인(淑夫人) 경주이씨는 군수를 지내고 이참(吏參)에 추증된 수익(壽益)의 딸이다. 1652년(효종 3) 11월 1일에 태어나 1714년(숙종 40) 2월 26일에 별세했으며 묘는 공과 같은 곳에 있다.
1650년(효종 1) 3월 25일에 태어났고 1683년(숙종 9) 초시에 등과하여 진사를 시작으로 동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통정대부 ·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1706년(숙종 32) 2월 25일에 별세하였고 묘소는 경기도 김포시 월곳면 고양봉 서쪽 기슭이다.
배위 숙부인(淑夫人) 경주이씨는 군수를 지내고 이참(吏參)에 추증된 수익(壽益)의 딸이다. 1652년(효종 3) 11월 1일에 태어나 1714년(숙종 40) 2월 26일에 별세했으며 묘는 공과 같은 곳에 있다.
유제(有濟) 1677∼1765 파명:경명군(景明君)
 자는 여집(汝集), 경명군의 5대손이고 오(晤)의 계자이고 생부는 향(餉)이다. 어머니는 숙부인 영산(靈山) 신씨이다.
1677년(숙종 3) 3월 15일에 태어났으며 어모장군 훈련원 첨정을 지냈으며, 통정대부와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
1765년(영조 41) 7월 27일에 별세했으며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송학리 백미현(白未峴) 정좌이다. 배위 정부인(貞夫人) 원주원씨는 금빈(金玭)의 딸이다. 생일은 5월 14일이고, 기일은 5월 19일이다.
1677년(숙종 3) 3월 15일에 태어났으며 어모장군 훈련원 첨정을 지냈으며, 통정대부와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
1765년(영조 41) 7월 27일에 별세했으며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송학리 백미현(白未峴) 정좌이다. 배위 정부인(貞夫人) 원주원씨는 금빈(金玭)의 딸이다. 생일은 5월 14일이고, 기일은 5월 19일이다.
응혁(應爀) 1735∼1799 파명:경명군(景明君)
  자는 백응(伯應), 경명군의 9대손이며 명수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정부인 창원황씨로서 관하(觀河)의 딸이다.
1735년(영조 11) 6월 23일에 태어나 1755년(영조 31) 무과(武科)에 합격하였고 부총관을 지냈다. 1799년(정조 22) 1월 1일에 별세하였고 묘소는 충남 아산시 영인면 신현리 유좌이다.
배위는 광산김씨 · 진주류씨 · 양주조씨 · 안동김씨이다. 정부인 광산김씨는 군수 선재(善材)의 딸로 1734년(영조 10) 3월에 태어났으며 기일은 11월 11일이다. 묘소는 양주군 문곡 통제사공의 묘 아래에 있다.
배위 정부인 진주류씨는 부사 진진(鎭晉)의 딸로 1740년 6월 21일에 태어나 1781년 6월 5일 별세하였고 묘소는 안산 신현리 선산에 있다.
배위 정부인 양주조씨는 사철(師喆)의 딸로 1761년에 태어나서 1790년에 별세했다. 묘소는 신현리 선산에 있다.
배위 정부인 안동김씨는 1767년에 태어나서 1791년에 별세했다. 묘소는 신현리 선산에 있다.
1735년(영조 11) 6월 23일에 태어나 1755년(영조 31) 무과(武科)에 합격하였고 부총관을 지냈다. 1799년(정조 22) 1월 1일에 별세하였고 묘소는 충남 아산시 영인면 신현리 유좌이다.
배위는 광산김씨 · 진주류씨 · 양주조씨 · 안동김씨이다. 정부인 광산김씨는 군수 선재(善材)의 딸로 1734년(영조 10) 3월에 태어났으며 기일은 11월 11일이다. 묘소는 양주군 문곡 통제사공의 묘 아래에 있다.
배위 정부인 진주류씨는 부사 진진(鎭晉)의 딸로 1740년 6월 21일에 태어나 1781년 6월 5일 별세하였고 묘소는 안산 신현리 선산에 있다.
배위 정부인 양주조씨는 사철(師喆)의 딸로 1761년에 태어나서 1790년에 별세했다. 묘소는 신현리 선산에 있다.
배위 정부인 안동김씨는 1767년에 태어나서 1791년에 별세했다. 묘소는 신현리 선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