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성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74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득록(得祿) 1600∼1664 파명:밀성군(密城君)
  득록(得祿) [1600(선조 33)∼1664(현종 5)]
자는 득지(得之), 극륜의 4남이다. 1620년(광해군 12)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과가 되었고, 형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충북 청원군 남이면 가마리 선영 좌록 계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단양우씨로 진사 시민(時敏)의 딸이며 묘소는 쌍분이다.
자는 득지(得之), 극륜의 4남이다. 1620년(광해군 12)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과가 되었고, 형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충북 청원군 남이면 가마리 선영 좌록 계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단양우씨로 진사 시민(時敏)의 딸이며 묘소는 쌍분이다.
문용(文容) 1828∼1888 파명:밀성군(密城君)
  문용(文容) [1828(순조 28)∼1888(고종 25)]
자는 경흠(敬欽), 의안대군파 병본(秉本)의 아들이다. 1858년(철종 9) 정시무과에 급제, 1875년(고종 12) 통제우후(統制虞候)를 지내고 내금장을 역임했다.
묘소는 충남 서산시 동문동 휴암산하 신좌에 있다.
배위는 증 숙부인 의령남씨와 평창이씨이다.
자는 경흠(敬欽), 의안대군파 병본(秉本)의 아들이다. 1858년(철종 9) 정시무과에 급제, 1875년(고종 12) 통제우후(統制虞候)를 지내고 내금장을 역임했다.
묘소는 충남 서산시 동문동 휴암산하 신좌에 있다.
배위는 증 숙부인 의령남씨와 평창이씨이다.
민서(敏敍) 1633∼1688 파명:밀성군(密城君)
  민서(敏敍) [1633(인조 11)∼1688(숙종 14)]
자는 이중(彛仲), 호는 서하(西河), 시호는 문간(文簡). 광원군의 증손이며 경여의 3남으로 후여(厚輿)의 계자이다.
1650년(효종 1) 진사에 급제, 1652년(효종 3)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 정언 · 수찬 · 병조좌랑 · 지평 · 교리 · 응교 · 사인 · 나주목사 · 이조참의 · 호조참의를 거쳐 1677년(숙종 3) 광주목사로 있을 때 임진왜란의 의병장 박광옥(朴光玉 : ?∼1593)의 사우를 중수하고, 김덕령(1567∼1596)을 제향케 했다. 그 후 승지 · 대사간을 거쳐 1680년(숙종 6) 양관 대제학 · 공조 · 병조 · 이조 · 호조참판, 1683년(숙종 9) 우참찬 · 강화유수 · 예조판서 · 이조판서 등의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러한 결과로 정헌대부 지돈녕 부사에 이어 녹보사원종공신 1등을 제수받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문집에 <서하문집(西河文集)> 15권이 있다.
공이 꿈속에서 생사당(生祠堂)에서 술을 먹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이 숙종대왕 때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다른 경연관들과 함께 궁중에서 밤에 임금과 함께 경서를 가르치는 자리에서 잠이 들면서 얼굴이 붉어졌다. 다른 대신들은 공이 취중인줄 알고 임금에게 벌을 내릴 것을 청하자 임금은 “그가 평소에 술을 못하는데 깬 다음에 물어 보겠다.”하고 처벌을 보류하였다. 이윽고 공은 얼마 후에 잠에서 깨어나 황공하여 땅에 엎드려 죄를 청하니 임금은 공이 졸은 까닭을 물었다. 공이 대답하기를 “1677년(숙종 3)에 광주목사로 나가 있을 때 시골선비와 친하게 지냈었습니다. 지금 입시하는 자리에서 저도 모르게 깜박 졸았는데 꿈속에 광주에 가니 많은 사람들이 그 곳 동헌에 모여 있다가 저를 보자 서로 술을 권하여 저절로 몹시 취하여 이렇게 실수했던 것입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고 하였다.
임금은 사람을 시켜 이날 밤에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알아보도록 하였다. 그랬더니 보고하기를 “민서공이 은혜로운 정치를 했으므로 군민이 이를 잊지 못하여 살았을 때 세우는 생사당(生祠堂)을 건립하여 이 날 낙성식을 마치고 밤에 제사를 지냈었습니다.”고 했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축현리 축좌에 있다.
배위는 정경부인 원주원씨이다.
자는 이중(彛仲), 호는 서하(西河), 시호는 문간(文簡). 광원군의 증손이며 경여의 3남으로 후여(厚輿)의 계자이다.
1650년(효종 1) 진사에 급제, 1652년(효종 3)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 정언 · 수찬 · 병조좌랑 · 지평 · 교리 · 응교 · 사인 · 나주목사 · 이조참의 · 호조참의를 거쳐 1677년(숙종 3) 광주목사로 있을 때 임진왜란의 의병장 박광옥(朴光玉 : ?∼1593)의 사우를 중수하고, 김덕령(1567∼1596)을 제향케 했다. 그 후 승지 · 대사간을 거쳐 1680년(숙종 6) 양관 대제학 · 공조 · 병조 · 이조 · 호조참판, 1683년(숙종 9) 우참찬 · 강화유수 · 예조판서 · 이조판서 등의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러한 결과로 정헌대부 지돈녕 부사에 이어 녹보사원종공신 1등을 제수받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문집에 <서하문집(西河文集)> 15권이 있다.
공이 꿈속에서 생사당(生祠堂)에서 술을 먹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이 숙종대왕 때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다른 경연관들과 함께 궁중에서 밤에 임금과 함께 경서를 가르치는 자리에서 잠이 들면서 얼굴이 붉어졌다. 다른 대신들은 공이 취중인줄 알고 임금에게 벌을 내릴 것을 청하자 임금은 “그가 평소에 술을 못하는데 깬 다음에 물어 보겠다.”하고 처벌을 보류하였다. 이윽고 공은 얼마 후에 잠에서 깨어나 황공하여 땅에 엎드려 죄를 청하니 임금은 공이 졸은 까닭을 물었다. 공이 대답하기를 “1677년(숙종 3)에 광주목사로 나가 있을 때 시골선비와 친하게 지냈었습니다. 지금 입시하는 자리에서 저도 모르게 깜박 졸았는데 꿈속에 광주에 가니 많은 사람들이 그 곳 동헌에 모여 있다가 저를 보자 서로 술을 권하여 저절로 몹시 취하여 이렇게 실수했던 것입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고 하였다.
임금은 사람을 시켜 이날 밤에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알아보도록 하였다. 그랬더니 보고하기를 “민서공이 은혜로운 정치를 했으므로 군민이 이를 잊지 못하여 살았을 때 세우는 생사당(生祠堂)을 건립하여 이 날 낙성식을 마치고 밤에 제사를 지냈었습니다.”고 했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축현리 축좌에 있다.
배위는 정경부인 원주원씨이다.
민장(敏章) 1620∼1694 파명:밀성군(密城君)
  민장(敏章) [1620(광해군 12)∼1694(숙종 20)]
자는 비중(斐仲), 경여(敬輿)의 장남이다.
1651년(효종 2)에 별검이 되고, 1672년(현종 13)에 연안부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통정대부 원주목사를 지냈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엄현리 안양동 선영 묘좌에 있다.
배위는 증 정부인 함평이씨이다.
자는 비중(斐仲), 경여(敬輿)의 장남이다.
1651년(효종 2)에 별검이 되고, 1672년(현종 13)에 연안부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통정대부 원주목사를 지냈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엄현리 안양동 선영 묘좌에 있다.
배위는 증 정부인 함평이씨이다.
민적(敏迪) 1625∼1673 파명:밀성군(密城君)
  민적(敏迪) [1625(인조 3)∼1673(현종 14)]
자는 혜중(惠仲) · 계신(啓伸), 호는 죽서(竹西). 경여의 차남이며 정여(正輿)의 계자가 되었다. 1646년(인조 24) 진사에 급제, 1655년(효종 6)에 세마가 되고, 1656년(효종 7)에 별시문과에 장원하여 정언 · 수찬을 거쳐 교리 · 지평 · 암행어사 · 사인 · 승교 · 도승지 · 충청도 관찰사 · 한성부윤 · 비변사 제조 · 대사헌 · 이조참판을 지냈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문정공 송준길을 변호하다가 무고로 파직되어 교하에 잠시 머물러 살았다.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조현리 조랑골 자좌에 있으며 충문공(忠文公) 이명(?命)이 찬한 묘표와 영의정 문정공 이의현이 찬한 신도비가 있다.
문집에는 <죽서문집> 4권이 있다.
배위는 창원황씨이다.
자는 혜중(惠仲) · 계신(啓伸), 호는 죽서(竹西). 경여의 차남이며 정여(正輿)의 계자가 되었다. 1646년(인조 24) 진사에 급제, 1655년(효종 6)에 세마가 되고, 1656년(효종 7)에 별시문과에 장원하여 정언 · 수찬을 거쳐 교리 · 지평 · 암행어사 · 사인 · 승교 · 도승지 · 충청도 관찰사 · 한성부윤 · 비변사 제조 · 대사헌 · 이조참판을 지냈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문정공 송준길을 변호하다가 무고로 파직되어 교하에 잠시 머물러 살았다.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조현리 조랑골 자좌에 있으며 충문공(忠文公) 이명(?命)이 찬한 묘표와 영의정 문정공 이의현이 찬한 신도비가 있다.
문집에는 <죽서문집> 4권이 있다.
배위는 창원황씨이다.
민철(敏哲) 1631∼1715 파명:밀성군(密城君)
  민철(敏哲) [1631(인조 9)∼1715(숙종 41)]
자는 영중(英仲), 경여의 4남이다. 1688년(숙종 14)에 영월군수를 지내고 수 동지중추부사를 제수받았다. 1669년(현종 10) 송준길의 명을 받아 기형(璣衡 :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관측하던 기계)과 수격(水激)을 만들었으며 그에 관한 일이 <최석정기(崔錫鼎記)>에 기록되어 있다.
묘소는 충남 부여군 임천면 두무사(杜武寺) 임좌에 있다. 설천(雪川) 봉상(鳳祥)이 찬한 묘지명이 있다.
배위는 여산송씨이다.
자는 영중(英仲), 경여의 4남이다. 1688년(숙종 14)에 영월군수를 지내고 수 동지중추부사를 제수받았다. 1669년(현종 10) 송준길의 명을 받아 기형(璣衡 :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관측하던 기계)과 수격(水激)을 만들었으며 그에 관한 일이 <최석정기(崔錫鼎記)>에 기록되어 있다.
묘소는 충남 부여군 임천면 두무사(杜武寺) 임좌에 있다. 설천(雪川) 봉상(鳳祥)이 찬한 묘지명이 있다.
배위는 여산송씨이다.
병규(秉珪) 1797∼1884 파명:밀성군(密城君)
  병규(秉珪) [1797(정조 21)∼1884(고종 21)]
자는 우옥(愚玉), 건명의 5대손이며 헌유(獻猶)의 장남이다.
1837년(헌종 3) 진사, 1847년(헌종 13) 정미년 정시문과 병과에 급제, 참의를 역임했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금촌읍 맥금리 선영하 간좌이다.
배위는 증 숙부인 풍양조씨, 숙부인 안동김씨이다.
자는 우옥(愚玉), 건명의 5대손이며 헌유(獻猶)의 장남이다.
1837년(헌종 3) 진사, 1847년(헌종 13) 정미년 정시문과 병과에 급제, 참의를 역임했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금촌읍 맥금리 선영하 간좌이다.
배위는 증 숙부인 풍양조씨, 숙부인 안동김씨이다.
병례(秉禮) 1797∼1857 파명:밀성군(密城君)
  병례(秉禮) [1797(정조 21)∼1857(철종 8)]
자는 사의(士誼), 헌일(憲一)의 장남이다.
1834년(순조 34)에 진사, 목사를 지냈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건좌에 있다.
배위는 숙인 창원황씨이다.
자는 사의(士誼), 헌일(憲一)의 장남이다.
1834년(순조 34)에 진사, 목사를 지냈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건좌에 있다.
배위는 숙인 창원황씨이다.
병문(秉文) 1826∼1888 파명:밀성군(密城君)
  병문(秉文) [1826(순조 26)∼1888(고종 25)]
자는 덕여(德汝), 시호는 효정(孝靖). 헌구(憲球)의 계자이며 생부는 헌도(憲度)이다.
1848년(헌종 14) 증광문과 을과에 급제, 시교를 거쳐서 평안도 관찰사 · 이조판서 · 판돈녕 부사를 역임했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에서, 1900년(광무 4)에 경기도 여주군 산북면 품곡후동 갑좌에 이폄하였다.
배위는 정경부인 광산김씨이다.
자는 덕여(德汝), 시호는 효정(孝靖). 헌구(憲球)의 계자이며 생부는 헌도(憲度)이다.
1848년(헌종 14) 증광문과 을과에 급제, 시교를 거쳐서 평안도 관찰사 · 이조판서 · 판돈녕 부사를 역임했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에서, 1900년(광무 4)에 경기도 여주군 산북면 품곡후동 갑좌에 이폄하였다.
배위는 정경부인 광산김씨이다.
병오(秉五) 1804∼1875 파명:밀성군(密城君)
  병오(秉五) [1804(순조 4)∼1875(고종 12)]
자는 사행(士行), 호는 옥로. 헌성(憲成)의 아들이며 헌술(憲述)의 계자이다.
참봉 · 현감 · 통정대부 · 돈녕부 도정을 지냈다.
묘소는 충북 옥천군 청산면 평장동 옥녀봉 병좌에 있다.
배위는 숙부인 기계유씨이다.
자는 사행(士行), 호는 옥로. 헌성(憲成)의 아들이며 헌술(憲述)의 계자이다.
참봉 · 현감 · 통정대부 · 돈녕부 도정을 지냈다.
묘소는 충북 옥천군 청산면 평장동 옥녀봉 병좌에 있다.
배위는 숙부인 기계유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