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녕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52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권(權) 1652∼1686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대이(大而), 단산도정의 7대손 제성(齊晟)의 아들이다. 가선대부 행 동지중추부사를 하였다. 효도와 우애가 깊고,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묘소는 장도면 사시봉 남곡 진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삭녕최씨로 세정(世禎)의 딸이다. 슬하에 현우(顯祐) · 현지(顯祉) 2남을 두었다.
묘소는 장도면 사시봉 남곡 진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삭녕최씨로 세정(世禎)의 딸이다. 슬하에 현우(顯祐) · 현지(顯祉) 2남을 두었다.
기선(耆善) 1608∼1673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자우(子優), 모양군 5대손 후근(厚根)의 아들이다. 벼슬은 감역을 지냈다.
묘소는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법암 선조좌 건좌이다. 배위는 충주최씨로 호(皓)의 딸이다. 슬하에 일삼(日三), 명삼(明三) 2남을 두었다.
묘소는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법암 선조좌 건좌이다. 배위는 충주최씨로 호(皓)의 딸이다. 슬하에 일삼(日三), 명삼(明三) 2남을 두었다.
기옥(基沃) 1812∼1867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윤원(允元), 호는 감송재(感松齋). 은천군의 11대손 서훈(瑞勳)의 아들이다. 효심이 깊고 박학하여 선조들의 훈계를 잘 지켰다. 양친상을 당했을 때 매우 슬퍼하여 공이 흘린 눈물에 두그루의 소나무가 살아났다고 한다. 사람들은 공의 효심때문이라고 여겼고 감사는 고장의 인물로 추천하였다. 1892년(고종 29)에 증 호조참판이 되었다.
묘소는 종치 토진 곤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한양조씨로 현희(玄熙)의 딸이다. 슬하에 용원(容元) 1남을 두었다.
묘소는 종치 토진 곤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한양조씨로 현희(玄熙)의 딸이다. 슬하에 용원(容元) 1남을 두었다.
당규(堂揆) 1625∼1684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기중(基仲), 호는 퇴촌(退村). 시호는 문경(文敬). 영의정 성구(聖求)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로 한림사 흔(昕)의 딸이다.
1650년(효종 1)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같은 해 동료들을 이끌고 당론문제로 상소하자, 임금이 비지(批旨)를 내려 학업에만 열중할 것을 당부하였다. 곧 문음(門蔭)으로 입사하여 여러 관직을 거친 뒤 1668년(현종 9) 의성현령이 되었다. 이 해에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72년(현종 13) 홍문관 수찬이 된 이래 정언·이조좌랑·이조정랑을 거쳐 국장도감의 낭청이 되었다. 다시 겸문학을 거쳐 1674년(숙종 15) 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 그 뒤 이조참의 · 승지 · 대사간 · 부교리 · 대사성 · 대사헌 · 이조참판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숙종 초 남인정권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1677년(숙종 3) 대제학으로서 백골징포(白骨徵布)·황구첨정(黃口簽丁)과 같은 군포(軍布)의 폐단과, 서북방면의 전세(田稅)문제에 대하여 과감한 개혁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 뒤 이조참판·대사간·부제학을 역임하고, 1679년(숙종 5) 함경도관찰사로 외직에 나갔다가 다음 해에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경신출척으로 파직되어 서인이 되었다. 1682년(숙종 8) 직첩(職牒)을 환수하였다.
1650년(효종 1)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같은 해 동료들을 이끌고 당론문제로 상소하자, 임금이 비지(批旨)를 내려 학업에만 열중할 것을 당부하였다. 곧 문음(門蔭)으로 입사하여 여러 관직을 거친 뒤 1668년(현종 9) 의성현령이 되었다. 이 해에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72년(현종 13) 홍문관 수찬이 된 이래 정언·이조좌랑·이조정랑을 거쳐 국장도감의 낭청이 되었다. 다시 겸문학을 거쳐 1674년(숙종 15) 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 그 뒤 이조참의 · 승지 · 대사간 · 부교리 · 대사성 · 대사헌 · 이조참판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숙종 초 남인정권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1677년(숙종 3) 대제학으로서 백골징포(白骨徵布)·황구첨정(黃口簽丁)과 같은 군포(軍布)의 폐단과, 서북방면의 전세(田稅)문제에 대하여 과감한 개혁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 뒤 이조참판·대사간·부제학을 역임하고, 1679년(숙종 5) 함경도관찰사로 외직에 나갔다가 다음 해에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경신출척으로 파직되어 서인이 되었다. 1682년(숙종 8) 직첩(職牒)을 환수하였다.
대방(大邦) 1575∼1652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희안(希安), 복성군의 5대손 환(丸)의 아들이다. 18세에 임진왜란을 당했는데, 양친이 순절하자 이에 통분을 이기지 못해 복수하고자 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절개를 지키며 보냈다. 여묘(廬墓) 3년에 훼척골립(毁脊骨立)하여, 1597년(선조 30)에 마을 사람들이 의분을 풀게 하고 호장(戶長)을 권하였다. 임금이 충효를 가상히 여겨 증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묘소는 전북 정읍시 북면 묵점 우강 사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김해김씨이고, 슬하에 경길(慶吉) · 경상(慶祥) · 경발(慶發) · 경운(慶雲) · 경백(慶伯) · 경순(慶純) 6남을 두었다.
묘소는 전북 정읍시 북면 묵점 우강 사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김해김씨이고, 슬하에 경길(慶吉) · 경상(慶祥) · 경발(慶發) · 경운(慶雲) · 경백(慶伯) · 경순(慶純) 6남을 두었다.
대원(大垣) 1684∼?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사원(思遠), 은천군의 9대손 세방(世芳)의 아들이다.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가 되었다.
묘소는 순천시 쌍암면 유정리 선영 우편 간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목천장씨이다. 슬하에 진일(鎭日) 1남을 두었다.
묘소는 순천시 쌍암면 유정리 선영 우편 간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목천장씨이다. 슬하에 진일(鎭日) 1남을 두었다.
대정(大鼎) 1569∼ ? 파명:경녕군(敬寧君)
  은천군의 현손 위의 아들이다. 증 통훈대부 군자감정을 하였다.
묘소는 충북 충주시 신니면 문숭리 능동 축좌이다. 배위는 증 숙부인 여흥민씨로 첨사 기조(起祖)의 딸이다. 슬하에 규(珪) · 욱(頊) · 황(璜) 3남을 두었다.
묘소는 충북 충주시 신니면 문숭리 능동 축좌이다. 배위는 증 숙부인 여흥민씨로 첨사 기조(起祖)의 딸이다. 슬하에 규(珪) · 욱(頊) · 황(璜) 3남을 두었다.
덕경(德景) 1631∼1711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화일(和日), 오성군의 7대손 정수(廷守)의 아들이다. 도량과 재간이 크고 문행이 뛰어났다. 수직(壽職)으로 동지중추부사를 하였다.
묘소는 백룡산 계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함평노씨이다. 슬하에 익호(益虎) · 익룡(益龍) · 익표(益豹) 3남을 두었다.
묘소는 백룡산 계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함평노씨이다. 슬하에 익호(益虎) · 익룡(益龍) · 익표(益豹) 3남을 두었다.
덕주(悳胄) 1696∼1751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여일(汝一) 또는 직심(直心), 호는 변정(?亭). 모양군의 8대손 한보(漢輔)의 아들이다. 일찍이 경전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문집이 있는데, 동생 기원(杞園) 변포(?圃), 종형 의호(義湖)의 저서와 더불어 <가림4고(嘉林四稿)>라 칭해진다. 그 밖에 <변정집(?亭集)> 4권이 있다.
묘소는 충남 부여군 임천면 가신리 손좌이다. 배위는 무안박씨로 장령 이문(履文)의 딸이다. 슬하에 반(磐) 1남을 두었다.
묘소는 충남 부여군 임천면 가신리 손좌이다. 배위는 무안박씨로 장령 이문(履文)의 딸이다. 슬하에 반(磐) 1남을 두었다.
동규(同揆) 1623∼1677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조연(祖然), 호는 혼천(混泉). 모양군의 5대손 성구(聖求)의 아들이다. 벼슬은 좌승지에 이르렀다. 증 좌참찬이 되었다. 문집이 전한다.
묘는 경기도 화성군 송산면 사강리 유좌이다. 배위는 안동권씨로 완원군 환()의 딸이다. 슬하에 현기(玄紀) · 현수(玄綏) · 현위(玄緯) · 현소(玄紹) · 현치(玄緻) 5남을 두었다.
묘는 경기도 화성군 송산면 사강리 유좌이다. 배위는 안동권씨로 완원군 환()의 딸이다. 슬하에 현기(玄紀) · 현수(玄綏) · 현위(玄緯) · 현소(玄紹) · 현치(玄緻) 5남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