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천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25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광덕(匡德) 1690∼1748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성뢰(聖賴), 호는 관양(冠陽)·존재(尊齋). 경석의 현손이며 `탕평론(蕩平論)\'을 최초로 주창하였던 박세채(朴世采)의 외손자이며 대제학 진망(眞望)의 장남이다. 1722년(경종 2)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설서(說書)가 되어 왕세제 영조대왕의 신임을 받았다. 노소론의 붕쟁이 심할 때 중간에 서서 극렬파들의 미움을 샀다. 소론 중 완소계열(緩少系列)의 일원으로서 송인명(宋寅命) · 조문명(趙文命) · 정석삼(鄭錫三) 등과 함께 `탕평론\'을 주장하였는데, 경종 연간 노소론 분쟁의 와중에서 조태구(趙泰耉) · 류봉휘(柳鳳輝) · 김일경 등 급소계열(急少系列)로부터 특히 심한 배척을 받았다. 지평 · 교리를 거쳤으나 민진원(閔鎭遠)을 구하려다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삭직되었다. 영조대왕이 즉위하자 수찬 교리에 임명되었다가 1727년(영조 3) 호남에 기근이 심하자 별견어사(別遣御史)로 파견되었고, 돌아와 이조좌랑을 지냈다.
이때 전에 조태억(趙泰億)의 아들 지빈(趾彬)이 이조참의에 오르려는 것을 제어하여 조태억으로부터 미움을 받던 중, 홍문관 관원의 천거 시비를 계기로 조태억부자와 심히 다투다가 대사간 조지빈과 함께 파직되었다. 1728년(영조 4)에는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대대로 경작을 금해 오던 전주의 건지산(乾止山)을 내수사(內需司)에서 경작하려는 것을 거절하여 추고를 받았고, 같은 해 관찰사로서 이인좌의 난의 모의를 미리 알았으리라는 노론의 무고로 삭직당했다.
1728년 1월 호남의 감진어사(監賑御史)로 파견되었다가 그 해 3월에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 전라도 태인에서 이인좌의 일당인 박필현(朴弼顯)이 반란을 일으키자, 파직된 정사효(鄭思孝)를 대신하여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반란군을 토벌하였다. 감사로 부임한 뒤에는 지방 재정 부세제도(賦稅制度) 등에 일대 개혁을 일으켜 크게 원성을 들었고, 1729년 부수찬 이양신(李亮臣)이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소론을 몰아내기 위하여 이광좌(李光佐)를 탄핵할 때에 함께 연루되었다. 호남어사로 있으면서 역모를 미리 알았을 터인데 이를 묵인하였다는 혐의를 씌워 무고하였으나 무사하였다. 같은 해에 전주부 건지산 밑의 전답을 매수사에서 옹주방전(翁主房田)으로 인수하려는 것을 거부하고 상소를 올렸는데, 상소문에 불경스러운 말들이 있다 하여 추고를 받았고, 그때부터 영조대왕의 미움을 받았다.
이듬해 중앙에 올라와 이조참의를 지내던 중, 전라감사 시절의 사소한 잘못으로 파직되었고, 1731년에 승지를 거쳐 다시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에 호남어사로 임명되었음에도 병을 핑계로 부임하지 않는다 하여 파직되었다. 1732년 다시 호남의 감진어사로 파견되었고, 1733년 강화유수로 임명되었으나 끝내 응하지 않아 갑산부사로 좌천되었다. 대신들이 너무 심하다고 주청하여 형조참의에 제수되었다. 그 뒤 예문관제학 · 대사헌을 거쳐 1739년(영조 15) 동지중추부사 겸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대제학·예조참판을 지냈다. 1741년(영조 17) 이른바 위시사건(僞詩事件)이 일어났을 때, 아우인 지평 광의(匡誼)가 김복택(金福澤)을 논죄하다가 국문을 받게 되었다. 광의를 구하려고 변론하다가 정주에 유배된 뒤 다시 친국을 받고 해남으로 이배되었다. 이듬해에 풀려나와 과천에 은거하던 중, 1744년(영조 20) 서용하도록 명이 내려 한성부우윤 · 좌윤 등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을 사양하였다. 저서로는 <관양집(冠陽集)>이 있다.
만년에는 급소계열로 당을 바꾸었으나 중용되지 못한 채 별세했다.
배위는 풍양조씨 대사간 경명(景命)의 딸과 광주정씨 오규(五奎)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 도운공 국내에 있다.
이때 전에 조태억(趙泰億)의 아들 지빈(趾彬)이 이조참의에 오르려는 것을 제어하여 조태억으로부터 미움을 받던 중, 홍문관 관원의 천거 시비를 계기로 조태억부자와 심히 다투다가 대사간 조지빈과 함께 파직되었다. 1728년(영조 4)에는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대대로 경작을 금해 오던 전주의 건지산(乾止山)을 내수사(內需司)에서 경작하려는 것을 거절하여 추고를 받았고, 같은 해 관찰사로서 이인좌의 난의 모의를 미리 알았으리라는 노론의 무고로 삭직당했다.
1728년 1월 호남의 감진어사(監賑御史)로 파견되었다가 그 해 3월에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 전라도 태인에서 이인좌의 일당인 박필현(朴弼顯)이 반란을 일으키자, 파직된 정사효(鄭思孝)를 대신하여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반란군을 토벌하였다. 감사로 부임한 뒤에는 지방 재정 부세제도(賦稅制度) 등에 일대 개혁을 일으켜 크게 원성을 들었고, 1729년 부수찬 이양신(李亮臣)이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소론을 몰아내기 위하여 이광좌(李光佐)를 탄핵할 때에 함께 연루되었다. 호남어사로 있으면서 역모를 미리 알았을 터인데 이를 묵인하였다는 혐의를 씌워 무고하였으나 무사하였다. 같은 해에 전주부 건지산 밑의 전답을 매수사에서 옹주방전(翁主房田)으로 인수하려는 것을 거부하고 상소를 올렸는데, 상소문에 불경스러운 말들이 있다 하여 추고를 받았고, 그때부터 영조대왕의 미움을 받았다.
이듬해 중앙에 올라와 이조참의를 지내던 중, 전라감사 시절의 사소한 잘못으로 파직되었고, 1731년에 승지를 거쳐 다시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에 호남어사로 임명되었음에도 병을 핑계로 부임하지 않는다 하여 파직되었다. 1732년 다시 호남의 감진어사로 파견되었고, 1733년 강화유수로 임명되었으나 끝내 응하지 않아 갑산부사로 좌천되었다. 대신들이 너무 심하다고 주청하여 형조참의에 제수되었다. 그 뒤 예문관제학 · 대사헌을 거쳐 1739년(영조 15) 동지중추부사 겸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대제학·예조참판을 지냈다. 1741년(영조 17) 이른바 위시사건(僞詩事件)이 일어났을 때, 아우인 지평 광의(匡誼)가 김복택(金福澤)을 논죄하다가 국문을 받게 되었다. 광의를 구하려고 변론하다가 정주에 유배된 뒤 다시 친국을 받고 해남으로 이배되었다. 이듬해에 풀려나와 과천에 은거하던 중, 1744년(영조 20) 서용하도록 명이 내려 한성부우윤 · 좌윤 등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을 사양하였다. 저서로는 <관양집(冠陽集)>이 있다.
만년에는 급소계열로 당을 바꾸었으나 중용되지 못한 채 별세했다.
배위는 풍양조씨 대사간 경명(景命)의 딸과 광주정씨 오규(五奎)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 도운공 국내에 있다.
광려(匡呂) 1720∼1783 파명:덕천군(德泉君)
광명(匡明) 1701∼1778 파명:덕천군(德泉君)
광보(匡輔) 1687∼1745 파명:덕천군(德泉君)
광사(匡師) 1705∼1777 파명:덕천군(德泉君)
광세(匡世) 1679∼1756 파명:덕천군(德泉君)
광신(匡臣) 1700∼1744 파명:덕천군(德泉君)
광영(光英) 1598∼1626 파명:덕천군(德泉君)
광의(匡誼) 1697∼1746 파명:덕천군(德泉君)
광찬(匡贊) 1702∼1766 파명:덕천군(德泉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