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보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2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익(?) ? ∼ ? 파명:석보군(石保君)
  석보군의 6대손으로 운흥감(雲興監)의 증손이며 3형제 중 막내다. 기해년 4월 15일에 출생하였다. 공은 어릴 때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어려서 학당에 다닐 적에 그 인물이 하도 준수하여 이웃에 사는 안진사가 훈장에게 중매하게 하여 어렸을 때에 혼인하였다. 공은 차차 성장하며 큰 뜻을 품고 도성에 출입하여 고관대작 댁을 순방하였다. 선략장군 용양위 대호군에 배명되었다. 노년에는 관직을 사양하고 귀향하여 시를 읊으며 이웃들과 교유하며 학업에 전념하였다.
공은 65세를 일기로 연대미상의 8월 13일에 별세하였다. 묘는 충북 괴산군 청안면 조천리 월라동 안산 병좌원이다. 비석이 있다.
공은 65세를 일기로 연대미상의 8월 13일에 별세하였다. 묘는 충북 괴산군 청안면 조천리 월라동 안산 병좌원이다. 비석이 있다.
정회(禎會) 1841∼1909 파명:석보군(石保君)
  자는 헌표(憲表), 석보군의 14대손으로 1841년(헌종 7) 4월 10일 인재(仁栽)의 아들로 태어나 1909년(순종 3) 2월 22일 향년 69세의 나이에 별세하였다. 어릴 때부터 효심이 강하고 인자하며 학문에도 능통하여 매사에 명민하였다.
공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맞아 괴산과 음성의 접주로 창의하고 많은 의병을 모아 괴산 및 음성 충주 등지에서 구한말의 부패한 관리의 타도와 제도개혁을 위해 도처에서 관군을 맞아 격전하였다. 그러나 동학군의 열세로 혁명이 실패하자 당시 출전한 동학군의 희생자 가족들의 심한 타격을 받았다. 1905년(광무 9)에 충청도 수접주에 임명되어 연일 `포덕천하 광제창생 보국안민(布德天下 廣濟蒼生 輔國安民)\'의 기치를 높이 들고 오직 신분의 귀천타파와 인류평등, 평화사상을 고취해 갔다. 한편 인근의 완고사상과의 대결과 충돌사태가 격심해지고 공은 충청도 수접주의 신분으로 책임 완수의 과정에서 음성 관아와 관속들의 집을 습격하는 데 진두지휘했다. 공의 동학 경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892년 10월 북접으로 교수, 1894년 8월 괴산 접주, 1897년 3월 음성 접주, 1900년 4월 충주 음성 접주, 1905년 1월 충청도 수접주. 1995년 12월 10일 음성지방 애국단체들의 주선으로 음성읍 용산2리에 공적비를 세웠다.
공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맞아 괴산과 음성의 접주로 창의하고 많은 의병을 모아 괴산 및 음성 충주 등지에서 구한말의 부패한 관리의 타도와 제도개혁을 위해 도처에서 관군을 맞아 격전하였다. 그러나 동학군의 열세로 혁명이 실패하자 당시 출전한 동학군의 희생자 가족들의 심한 타격을 받았다. 1905년(광무 9)에 충청도 수접주에 임명되어 연일 `포덕천하 광제창생 보국안민(布德天下 廣濟蒼生 輔國安民)\'의 기치를 높이 들고 오직 신분의 귀천타파와 인류평등, 평화사상을 고취해 갔다. 한편 인근의 완고사상과의 대결과 충돌사태가 격심해지고 공은 충청도 수접주의 신분으로 책임 완수의 과정에서 음성 관아와 관속들의 집을 습격하는 데 진두지휘했다. 공의 동학 경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892년 10월 북접으로 교수, 1894년 8월 괴산 접주, 1897년 3월 음성 접주, 1900년 4월 충주 음성 접주, 1905년 1월 충청도 수접주. 1995년 12월 10일 음성지방 애국단체들의 주선으로 음성읍 용산2리에 공적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