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94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기홍(基鴻) 1846∼1920 파명:안창대군(安昌大君)
  자는 군점(君漸). 대군의 20대손이며 석민(碩民)의 아들이다. 통정대부에 올랐으며 묘소는 함남 함주군 서허면 탄동 신원에 있다. 배위는 숙부인 청주한씨로 일연(日延)의 딸이다. 1900년(광무 4)의 <대군신도비문>에 기명, 방손 면하가 찬하였다.
길운(吉運) 1757∼1836 파명:안창대군(安昌大君)
  자는 내상(乃祥), 호는 석수(石첤). 대군의 16대손이며 동로(東老)의 아들이다. 효행이 극진하고 불순한 마음이 일체 없고 문장은 세인의 으뜸이었고 7세에 시를 읊어 `훈훈한 바람 남방으로부터 불어오니(薰風自南來) 만물이 모두 희희하게 빛나도다(萬物皆凞凞).\'하였다.
모친의 병환시 단지하여 구하고 장례일에 폭우로 물난리이기에, 공이 머리를 조아려 비니 비가 개이고 물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큰형과 함께 여묘하고 효도의 감응으로 1801년(순조 1)에 사마, 1811년(순조 11)에 안릉참봉을 제수하고 1814년(순조 14)에 숙릉참봉, 1816년(순조 16)에 덕릉직장, 1818년(순조 18)에 조지서 별제로 승계되고, 같은 해 4월 의금부도사, 6월에 사헌부감찰, 같은 달에 동부령이 되고, 1820년(순조 20)에 장릉령, 1821년(순조 21) 흡곡(?谷)현령을 제수받았다. 사리가 분명하여 송사를 듣고서 재판할 때에는 공평하고 경결한 판결로써 아전들과 백성들이 평안하였다. 1836년(헌종 2)에 통정대부로 승계하였으나 그 해 4월 22일 타계했다. 영안부원군 김조순(金祖淳)이 표서하기를 `시례고가 충효전세(詩禮古家 忠孝傳世).\'라 하였다. 유고가 있으며 참사 한규원(韓奎垣)이 행장을 지었다. 구함산지 명관기에 있다. 묘는 함남 흥남시 서호리 선산 청룡내사 축원부에 있으며 비석이 있다. 배위는 숙인 청주한씨로 홍일(弘鎰)의 딸과 숙인 청주한씨로 승계(承啓)의 딸이다.
모친의 병환시 단지하여 구하고 장례일에 폭우로 물난리이기에, 공이 머리를 조아려 비니 비가 개이고 물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큰형과 함께 여묘하고 효도의 감응으로 1801년(순조 1)에 사마, 1811년(순조 11)에 안릉참봉을 제수하고 1814년(순조 14)에 숙릉참봉, 1816년(순조 16)에 덕릉직장, 1818년(순조 18)에 조지서 별제로 승계되고, 같은 해 4월 의금부도사, 6월에 사헌부감찰, 같은 달에 동부령이 되고, 1820년(순조 20)에 장릉령, 1821년(순조 21) 흡곡(?谷)현령을 제수받았다. 사리가 분명하여 송사를 듣고서 재판할 때에는 공평하고 경결한 판결로써 아전들과 백성들이 평안하였다. 1836년(헌종 2)에 통정대부로 승계하였으나 그 해 4월 22일 타계했다. 영안부원군 김조순(金祖淳)이 표서하기를 `시례고가 충효전세(詩禮古家 忠孝傳世).\'라 하였다. 유고가 있으며 참사 한규원(韓奎垣)이 행장을 지었다. 구함산지 명관기에 있다. 묘는 함남 흥남시 서호리 선산 청룡내사 축원부에 있으며 비석이 있다. 배위는 숙인 청주한씨로 홍일(弘鎰)의 딸과 숙인 청주한씨로 승계(承啓)의 딸이다.
난주(鸞周) 1852∼1905 파명:안창대군(安昌大君)
  자는 군행(君行). 대군의 20대손이며 부는 면영(冕榮)이다. 통정대부 순릉령에 올랐으며 묘는 하조양면 오봉산하 신원이다. 배위는 숙인 청주한씨로 대일(大一)의 딸이다.
논석(論碩) 1519∼ ? 파명:안창대군(安昌大君)
  대군의 7대손이며 종사랑 성손(星孫)의 아들이다. 어모장군를 지냈으며 묘소는 함남 함주군 운남면 운중리 송풍동 90번지 산 건원이다. 배위는 숙인 경주김씨로 일손(一孫)의 딸이다.
달호(達浩) 1906(광무 10)∼1985 파명:안창대군(安昌大君)
  자는 덕삼(德三), 호는 청천(淸川). 대군의 22대손으로 정팔(鋌八)의 아들이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지극한 정성으로 모친을 섬기어 효자로 이름이 났고, 덕행으로 신망이 높았다. 교육열이 높아 6·25전쟁 중 피난처였던 거제도에서 설악산인 김종권(金鍾權) 등과 현 연초중학교 전신인 연초전시중학교를 설립하였다. 숭조돈종에 귀감이 되어 1970년대에 기찬(起燦)· 강훈(康薰) · 명상(明祥) 등과 전주리씨대동종약원 인천부평구 분원을 창립하였다.
설악산인이 찬한 행장에 “지극한 효성에다 우애하시었고(敦孝則友), 정성으로 남을 대하셨던 이시여(接物以誠). 덕은 종친 중에 으뜸이셨고(德首宗親), 선을 행하시기를 낙으로 삼으셨도다(爲善新樂). 어지신 분이 장수하신다는 말이(謂仁護壽), 어찌하여 이다지도 맞지 않으신가(云胡錯漠).”라고 하였다.
또 다른 행장은 교분이 두터웠던 한양대학교 전 총장 이병희(李炳熙) 박사가 찬하였다. “6·25전쟁 중 전쟁의 포화속에서 가산을 포기한 채 족보를 휴대하고 이향(離鄕) 남하하니 과연 리공은 <연행록(燕行錄)>의 위급시의 조치를 그대로 실천한 분”이라고 세인에게 칭송되었다. 1985년 1월 10일에 별세하였으며 산소는 경기도 수원시 하광교동 산32번지, 광교산 문암골이다. 서간문집 <망향함산(望鄕咸山)>, <선리고가(璿李古家)>가 있고 가훈으로 `덕업상조(德業相助)\', `진실심지(眞實心地)\'가 있다. 부인은 동래정씨 진사 승동(升東)의 딸 경녀(慶女)이며 슬하에 8남 1녀를 두었다.
설악산인이 찬한 행장에 “지극한 효성에다 우애하시었고(敦孝則友), 정성으로 남을 대하셨던 이시여(接物以誠). 덕은 종친 중에 으뜸이셨고(德首宗親), 선을 행하시기를 낙으로 삼으셨도다(爲善新樂). 어지신 분이 장수하신다는 말이(謂仁護壽), 어찌하여 이다지도 맞지 않으신가(云胡錯漠).”라고 하였다.
또 다른 행장은 교분이 두터웠던 한양대학교 전 총장 이병희(李炳熙) 박사가 찬하였다. “6·25전쟁 중 전쟁의 포화속에서 가산을 포기한 채 족보를 휴대하고 이향(離鄕) 남하하니 과연 리공은 <연행록(燕行錄)>의 위급시의 조치를 그대로 실천한 분”이라고 세인에게 칭송되었다. 1985년 1월 10일에 별세하였으며 산소는 경기도 수원시 하광교동 산32번지, 광교산 문암골이다. 서간문집 <망향함산(望鄕咸山)>, <선리고가(璿李古家)>가 있고 가훈으로 `덕업상조(德業相助)\', `진실심지(眞實心地)\'가 있다. 부인은 동래정씨 진사 승동(升東)의 딸 경녀(慶女)이며 슬하에 8남 1녀를 두었다.
대승(大升) 1788(정조 12)∼1858 파명:안창대군(安昌大君)
  자는 익보(益甫), 호는 우둔당(愚鈍堂). 대군의 17대손으로 기운(起運)의 계자이며 생부는 통정대부 의금부도사 길운(吉運)이다. 영의정 정원용(鄭元容)이 표제를 쓰고 부사 서유교(徐有轎)가 전기를 짓고, 진사 서원보(徐元輔)가 찬하였다. 효심이 지극하여 부모 병환시 단지(斷指)하여 수를 연장하였다. 효로써 천거되어 수차 공거하였다. 정릉참봉에 제수되고 용양위 부사과 선공 주부에 오르고 온릉 · 장릉 · 창릉 · 광릉령을 역임하고 관직은 안기찰방에 이르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경북 안동에 거주하였다. 참의 이면우(李勉愚)가 찬장하였다. 묘소는 경북 안동시 북선미동 갑원이며 배위는 숙인 남평문씨로 상렬(尙烈)의 딸이다.
대이(大?)) 1777∼1851 파명:안창대군(安昌大君)
  자는 자양(子養). 대군의 17대손이며 부는 종운(宗運)이다. 통정대부에 이르렀고 묘소는 청룡내록 간원이다. 배위는 숙부인 진주류씨로 종현(宗賢)의 딸이다.
대천(大天) ? ∼ ? 파명:안창대군(安昌大君)
  대군의 13대손이며 가선대부 계일(繼一)의 아들이다. 통정대부에 올랐으며 묘소는 함남 가평사 화잠동 묘원부이다. 배위는 숙부인 태원김씨로 덕남(德男)의 딸이다.
대춘(大春) 1514∼ ? 파명:안창대군(安昌大君)
  자는 경유(景有). 대군의 8대손이며 어모장군 논석(論石)의 아들이다. 어모장군에 올랐으며 묘소는 함남 함주군 운남면 운중리 송풍동 산90번지 건원이다. 배위는 숙부인 전주임씨이다.
덕용(德用) 1789∼1846 파명:안창대군(安昌大君)
  대군의 15대손, 부는 용양위 부사과 훈련원참사 종권(宗權), 가선대부, 묘는 함남 함주군 서호면 능서리 산 탄동 1204번지 건원, 배위는 정부인 여산송씨이다.